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옌옌 Mar 10. 2022

혐오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브런치 첫 글 발행 이후 또 언제나 쓰려나 했는데, 이렇게 빨리 돌아오게 될 줄이야.


바이든과 김대중 케이스를 보며 개표율 99%까지 버티다 새벽 5시에 잠을 청했다. 울고 싶고, 죽고 싶다는 여성들의 글에 왜 우냐고 우리가 왜 죽어야 하냐며 꿋꿋이 살아내자고 적고 '고맙다'는 답글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내가 잠에 들기 위해 누워 유시민의 인터뷰를 재생하곤 눈물이 터졌다. 그의 말대로 젊은 여성들의 움직임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여성은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며 온라인에서만 조직적이라는 이준석의 말과 달리, 2030 여성 유권자들의 표 결집력을 명확히 보여주었기에 우리가 결코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하거나 실패감에 흐른 눈물이 아니다. 다만 앞으로 한국에서 살아갈 여성들의 삶과 내 삶이 측은하기 짝이 없고, 두렵고, 맹목적인 집단적 무지함에 공포스러움을 느낀 것뿐이다.


국민의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약자 혐오를 전면에 내세우고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라며 본인이 성차별주의자임을 떳떳하게 자랑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현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난 아직 20대인데 이런 사람들과 앞으로 70년 가량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 숨을 옥죄어 온다. 앞으로 5년 동안 여성들의 실질적 삶의 질이 얼마나 떨어질지, 여권이 어디까지 내려갈지 두렵다. 개표가 끝나자 '호신용품'이 실트에 올랐다는데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다들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대선에 여성 정책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교체된다고 하더라도 잃어버린 5년을 되찾는 과정만으로 꽤 소요가 될 것이고, 그럼 도합 10년 가량이 멈춰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약자 죽이기에 눈이 먼 2030 남성들은 내 예상보다도 더 무지성임을 다시 한 번 온 세포로 체감했다. 이미 한국에서 연애나 결혼, 할 생각도 없었지만 더더욱 4B를 다짐한다.




2022년 여성의 날을 맞이하여 이코노미스트 경제지에서 발표한 유리천장지수. 29개국 중 한국은 29위다. 수직 하락하는 헝가리를 보고 안타까워 했지만 X축에 달하는 내 나라 꼬라지를 보니 측은지심이 싹 사라졌다. 여남 임금 차이도 한국이 31.5%로 1위를 기록했다.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성추행/성폭행 사건과 스토킹 기사. 이게 어제 본 기사인지 새로 뜬 기사인지, 이미 청원한 글인지 아닌지도 헷갈리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청원 동의는 한 번만 할 수 있습니다.' 팝업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구조적 성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검찰이니 경찰이니 군인이니 직장이니 여성 피해자들 죽어 나가는 건 뉴스 보는 사람이면 알겠지. 불법 촬영 카메라와 N번방의 나라. 더 최악을 상상할 수 없는 지금, 여권을 더 짓밟겠다는 후보가 당선됐다. 그리고 그 표에 여성들의 자발적인 표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것보다도 같은 여성이 그에게 지지를 표했다는 사실만은 내게 무력감을 준다.


기본 인권이 기반이 되어야 나머지 정책도 누릴 수 있다. 노예가 정책 따지는 것 본 적 있는가? 어떤 좋은 정책을 펼쳐도 내 일이 아닌데. 여성은 국민으로도 안 보고 유세에서 아예 배제한 사람인데 이런 저런 이유로 정권 교체니 세금이니 갖다 붙이며 지지하면, 당장 '한국 여성'인 본인 목에 칼 들어오는 건 모르는 것인가? 여권은 우선 순위가 아니다-라는 말이 2등 시민 취급 당하는 한국 여성 입에서 나올 말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분명 동시대를 살아낸 동료이며 공고한 가부장 세대를 겪어낸 희생자들 아니었나. 소신투표도 마찬가지로 본인이 본인으로서 위협 받지 않고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 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심 없었으면 어떡할 뻔했냐, 역시 큰일은 여자가~' 하며 비꼬는 남초 사이트를 보고 있자니 환멸이 난다.




내가 원래부터 여당 지지자였는가? 오히려 아니다. 이전에 여성의당과 정의당에 투표했고, 무엇보다 민주당의 '피해호소인' 발언 이후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당이 좋아서가 아니라 이번만큼은 야당을 '차마 뽑을 수가 없었다'는 게 맞다. 미투 조롱하며 안희정이 불쌍하다는 김건희 녹취록이 공개되자 사과한 이수정 교수에게 '네가 왜 사과하냐'며 따진 젊은 남성들과 이준석. 그들에게 질려 이수정 교수는 국힘 고문직을 사퇴했다. 그런 당에 비해 비교적 여성 혐오를 인지하고 개선하겠다며 목소리 내는 후보, 불꽃 박지현님을 영입하고 함께 유세 현장에 다닌 그를, 나는 살기 위해 차악으로 뽑은 것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여가부 폐지는 오히려 성별 갈등을 조장하는 꼴이니 폐지하지 않겠다는, 구조적 성차별의 존재를 인정하고 개선하겠다며 채용 시 성차별 당할 경우 바로 사업장 조사 실시하도록 개편하겠다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무관용 처벌하겠다는, 임신 중단에 건강보험 적용하겠다는, 산부인과를 '여성건강의학과'로 명칭 변경하겠다는 사람을 지지함으로써 나와 반대의 스탠스를 가진 여성들을 포함한 모든 여성이 최소한 지금보다는 안전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투표했다.


앞으로의 5년은 어떨까?


성폭행을 당해도 무고죄가 두려워 목소리 내지 못 하는 피해자가 많아질 것이다. 구조적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고 개인의 문제라고 한 사람이니 갑을 관계에서의 피해자가 더욱 늘어나겠다. 여가부는 6~70%의 예산을 한부모 가족, 미혼모 양육비, 다문화 가정, 학교 밖 청소년을 지원하는 데에 쓰고 겨우 7% 남짓만 여성을 위해 쓴다. 그것도 '경력 단절' 여성 취업 지원을 목적으로. 이 여가부가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며 폐지한다고 한다. 그의 여성 정책은 임신 1회 당 몇십만 원 지원과 스토킹 가해자도 스마트워치 착용(심지어 사후 정책), 두 가지뿐이다. 임신 중단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단다. 여성들이 시위를 통해 겨우 본인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얻어냈는데 다시 합의가 필요하게 생겼다.


여성 정책을 떠나서 보아도 주 120시간 근무, 최저시급 폐지, 의료민영화, 선제 타격 등 한국 국민으로서 감내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젊은 남성들은 선제 타격 시 본인의 안전이 직결되는 문제임에도 여가부 폐지가 우선이었는지도 참 궁금하다. 병역 기간 줄이고 월급 올린 건 여당인데? 정권 교체니 부동산이니 세금이니 과연 지금보다 현저히 나아질까? 또한 반려동물을 키우는 국민이 1,450만명에 달하고 식용견이 처한 환경과 도살의 잔인함에 관한 이슈가 이렇게나 떠올랐음에도, 그는 어떠한 개선 정책도 없이 개 식용에 찬성한다. 그리고 다 떠나서, 정계 입문한 지 겨우 6개월 된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고 싶지 않다. 아참 청약 점수도 몰랐지. 나는 분명 여성이 아니었어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페미는 해치웠는데, 앞으로 어떡하냐? 의료민영화 실제로 이행하려나 우리 집에 환자 있는데.. 선제 타격은? 주 120시간은? 사드는?' 하는 글도 여럿 올라오는데, 당신들이 혐오에 눈 멀어 무작정 뽑고 본 사람이니 앞으로 감당하시면 되겠다. 부동산 현저히 좋아져서 상위 n%가 아닌 국민들이 내 집 마련하기 좋아질지, 페미니스트 사라지고 출생률 상승할지, 여가부 폐지될지, 군대 더 편해질지, 직장인들이 일하기 좋아질지, 청렴하기 짝이 없는 정부가 될지. 이제 다 같이 지켜보면 되겠다.




나는 한국 여성들이 각자의 삶과 자리를 잘 지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위험에 더 노출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여성 인권이 그닥 중요한 대목이 아니니 그에게 투표했겠지만, 정작 본인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돕는 건 여성인 점만은 인지했으면 한다. 하다 못해 당장 대중교통에서 생리통으로 쓰러져도 부축해주고 응급차 불러주는 건 여성이다.


이번에 여성은 분명히 보여줬다. 2030에서도 여성이 결코 밀리지 않았다. 20대 전체에서 47.8 : 45.5. 여아 낙태 시기에 태어나 50만 명 이상 표수가 밀림에도 불구하고 20만 남짓의 차이로 좁혀 여성 유권자의 힘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것은 정말 대단하고 뿌듯하다. 심지어 4050 여성과 남성도 힘이 되었다. 이번 대선은 단지 6~70대 이상의 절대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뿐이다. 청소년들도 일찍이 여성 혐오 구조를 깨닫고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무지성 혐오'는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이번 청소년 모의 투표 결과 48 : 24.8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번 결집력을 기억하고 곱씹으며 남은 삶을 악착같이 살아낼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슬퍼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의지가 꺾여 그들이 원하는 여성상에 합류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한 번 깨닫게 된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게 페미니즘이다. 짓밟으려 할수록 화마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혐오는 결코 생존을 건 이들을 이길 수 없다.




2030 여성들이 대선의 향배를 좌우할 수도 있는 유권자 집단으로 최초로 떠올랐습니다. 젊은 여성 유권자들께 존경한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요. 여러분들 정말 잘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여러분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모이고, 대화하고, 뭉치고, 행동하고, 선택하셔야 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나타난 2030 여성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시작에 불과하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여러분들 존경하는 마음으로 늘 함께 지켜보고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 2022.03.10 유시민



작가의 이전글 저요? 결혼 생각 없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