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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실거릴 거야, 영국에서 [셰필드 교환일기 Week1]

거칠게 적고, 솔직한 감정을 담아낸 일기장입니다

by 윤슬


2024.09.22 일요일


4일 동안 런던 여행을 마치고 5일째 본격적으로 생존이 시작되는 날이 밝았다. 오전 11시 50분 기차에 탑승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씻었다. 한인 민박집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왔으니 영국 식사를 많이 하고 싶었던 우리는 한식 조식을 떠나는 날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었다. 주인아저씨의 자부심이 들어간 짜장밥이 주방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흰쌀밥이 다 떨어졌다며, 대신 더 맛있는 김치볶음밥에 짜장 소스를 담아주시겠다고 아저씨는 너스레를 떨며 친근하게 담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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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한국인들과 옹기종기 식탁에서 모여 앉아 김치볶음밥과 김치를 먹으니 친근했다. 이제는 이런 한식도 자주 못 먹겠다는 생각에 최대한 꼭꼭 씹어 먹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입맛이 없어 결국 남겼다. 주인아저씨의 음식 솜씨가 상당히 좋아서 더 아쉬웠던 것 같다. 그래서 싱크대에서 '잘 먹었습니다'라고 진심을 담아 말하며 다시 방으로 올라가 부랴부랴 짐을 쌌다. 작은 캐리어 1개, 큰 캐리어 1개, 그리고 지게만 한 배낭까지 지퍼를 모두 닫은 후 손을 탁탁 털었다. 짧았지만 정들었던 싼불친절 한인 민박집 3층 방과도 작별 인사를 했다. 덩그러니 놓인 2개의 침대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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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필드 대학교의 교환학생으로서 셰필드행 기차를 킹스크로스 역에서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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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되어서야 '나 이제 교환학생으로 가는구나' 실감이 났었다. 지금까지는 마냥 해맑게 여행자 신분으로 런던을 뛰어다녔다면, 이제는 살림을 하러, 새로운 도전을 하려고 셰필드로 뛰어든다는 느낌이었다. 기차를 타면서 음악을 듣다가 어느새 입을 벌리며 졸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중간에 Doncaster 역에서 갈아타고 Sheffield 역까지 도착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순식간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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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는 날씨가 영국 날씨치고 화창했는데, 셰필드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전형적인 영국 날씨를 드디어 마주한 것이다. 모든 광경이 처음 보는 풍경이니, 나와 친구 H는 주위 사람들에게 계속 물어보면서 대학교 기숙사까지 가는 방법을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트램을 타고 가려고 했으나 비로 인해 길바닥도 미끈거리고, 트램 역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어 재빠르게 H와 택시를 타기로 결정했다. H와 나는 기숙사가 달랐다. H는 성당을 개조한 기숙사 St. Vincent's Place에서 머물고, 나는 거기에서 8분 정도 거리에 떨어진 Allen Court에서 머문다. H가 먼저 택시에서 짐을 들고 내렸다. 막상 5일 내내 붙어 다니다가 떨어지니 긴장이 된 것 같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영어로 사람들과 대화하고 내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택시 안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Allen Court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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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길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아무것도 세팅되지 않은 방을 보니, 공허함이 순간 밀려 들어왔다. 공용 주방을 봤을 때는 시설이 좋긴 하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여기서 지낼 플랫 메이트들에 대한 기대감도 생겼다.


긴장감이 온몸에서 곤두섰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캐리어에서 짐을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1시간 30분 정도 걸렸을까, 그때 H한테서 카톡이 왔다.


- 우리 언제 볼까?


짐을 다 풀면 연락하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한 10분 내로 끝날 것 같아 5시에 보자고 했다. 지금이야 셰필드 대학교가 하나의 큰 동네 정도라는 자각을 하고 있지만 지리 감각이 전혀 없었던 그때는 구글 지도에 'University of Sheffield'라고 치면 건물이 수도 없이 나와 당황했었다. 목록 맨 위에 뜨는 Blackwell's Bookshop 앞에서 보자고 했다. 그래도 짐을 바깥으로 꺼내놓으니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앞으로 나의 OOTD를 보여주기 위해 자주 찍게 될 것 같은 거울에서 사진도 한 장 찍었다.

우산을 들고 밖에 나가니 하늘은 회색빛이었고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우중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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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과 마주하니 날씨와 함께 주눅이 들었다. 싱숭생숭하면서 기분이 가라앉은 채 H를 다시 만났다. 그래도 그 사이에 안 봤다고 반가웠다. 원래는 베개랑 이불을 여기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인 Primark에서 사는 게 계획이었는데 맙소사 오후 5시까지밖에 안 여는 것이다. 짐을 풀지 말고 바로 샀어야 했는데 닫는 시간을 생각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오늘은 전기장판 한 장으로 버텨보기로 하고 내일 아침 곧바로 Primark로 향하기로 했다. 목적성을 잃은 우리는 일단 지금 당장 필요한 생필품들을 사기로 했다. 기숙사 근처에 Tesco Express 마트가 있어 종종걸음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마트, 거리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여행지에 온 것 마냥 신기하게 바라봤다. 물티슈, 핸드워시, 샴푸, 린스, 물 등을 사고 Tesco 비닐 가방에 담아 바리바리 들고나왔다. 아침에 먹은 짜장밥이 다인데도 배가 하나도 안 고팠다. H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리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몸속에 긴장감이 똘똘 뭉쳐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살기 위해서 밥을 먹기로 했다. 먹기 위해 사는 여자들이 살기 위해 먹는다니...


H가 비도 오니 뜨끈한 국물이 마시고 싶다고 해서 온 집이다. 나는 속이 편한 음식을 먹고 싶어 토마토 계란 국수를 시켰다. 당시 정신이 없어서 가격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결제했는데 결제하고 보니 10파운드(17000원)여서 황당했다. 이래서 다들 외식비에 혀를 차는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맛있었다. 다만 급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먹을 것 같지는 않은 맛있음 정도였다. 나는 절반도 못 먹은 채 남겼다. 도저히 음식을 넘길 컨디션이 아니었다.


H가 숙대 교환학생 중 자신이 아는 친구가 Allen Court 기숙사라고 해서 30분 뒤에 보기로 했다. 그전에 H 기숙사 방을 한 번 구경하러 갔다. 아직 플랫 메이트들이 도착하지 않아서인지 내 플랫처럼 한산했다. 다시 내 기숙사로 돌아가 이번에는 H에게 내 플랫을 소개해 주려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외국인 여자를 마주쳤다. 내가 사는 층과 똑같았다. 알고 보니 플랫 메이트였던 것이다! 연갈색의 곱슬 단발머리를 한 친구였다. 셰필드에 와서 처음으로 또래 친구에게 영어로 말하는 순간이었다. 이름은 Emily고 뉴질랜드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나도 횡설수설 내 이름과 국적을 소개했다. Emily는 플랫 단체 채팅방을 만들 생각이라며 내 전화번호를 물어봤다. 나는 아직 What's app에 내 영국 번호를 등록 안 해놔서 내가 Emily 번호를 받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H는 부럽다며 자신도 얼른 플메들이랑 만나고 싶다고 했다. 어벙한 상태로 다시 1층 Common room에서 H의 숙대 친구들을 봤다. 오랜만에 다른 한국인들을 만나니 고향 음식을 먹은 것 마냥 마음은 편안했다. 그날 저녁에 새로운 사람들을 와르르 마주하니 평소 내가 써야 할 소셜 에너지를 초과해 기숙사 방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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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이 그날 제일 편안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비록 이불과 베개가 없어 전기장판 하나로 추위를 피해야 했지만 마음만큼은 포근했다. 런던 Vauxhall 역 앞에 있던 Sainsbury's Local에서 산 단백질 바가 남아서 넷플릭스와 함께 즐겼다. 내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새도 없이 푹 쓰러져 잤다.



2024.09.23 월요일


H와 함께 이불과 베개를 사러 아침 일찍 나갔다. 거리는 15분 정도라고 했는데 길이 낯설어서인지 체감상 더 오래 걸렸던 것 같다. 셰필드에 도착하면 바로 Primark에 들러야 한다고 익히 들었다. 돈이 좀 더 나가는 다이소 느낌이었다. 이불과 배게 외에도 컵이나 그릇, 양말, 수건 등을 샀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었는데 다 사고 나서 기운이 쫙 빠졌었다. 날씨가 우울하니 괜히 내 기분까지 살짝 우울해졌다. 깊은 우울함은 아니고, 그저 앞으로 여기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함이 우울함으로 변해 다가온 것 같았다. 특히 어제 Emily한테 연락을 못해 플랫 메이트들에 대한 불안함이 가장 컸었다. 마음의 표면에는 '괜찮아'라고 썼지만 깊은 곳에서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때 H가 Costa Coffee shop에서 커피 한잔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빨리 기숙사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사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니 속이 따뜻해지면서 불안감도 함께 씻겨내려갔다.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일까. 그저 커피를 마시며 H와 함께 서로 느끼는 막막함을 공유했을 뿐인데 생각이 자연스럽게 정리되었다.

모든 게 알고 보면 별거 아니야

떠나기 직전 아빠가 나에게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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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개강하기 한 주 전으로 Welcome Week이다. 숙대에서는 이런 Week가 없을 분더러 다양한 이벤트가 열지 않아 생소했다. Student Union 앱에 들어가니 매일 여러 개 이벤트가 열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오늘은 일단 교환학생들이 모이는 OT 이벤트에 참석해야 했다. 나름 멋을 부리고 방문을 나섰다.


H와 만남의 장소가 되어버린 셰필드 대학교의 도서관 Diamond 도서관이다. H와 만난다 하면 앞으로 계속 여기서 만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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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해가 뜨지를 않는 모양인 것 같다.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이곳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부터 궁금했다. 비가 많이 와도 옷과 머리를 다 젖히며 돌아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의 생활 방식이기에 받아들이지만, 비에 젖기 싫은 나는 조금이라도 내리면 우산을 쓰고 다닐 예정이다. 또 충격받은 게 있다면 이곳은 무단횡단이 일상적이라는 점이었다. 런던에서도 여기에서도 사람들은 신호를 무시하고 차가 안 온다 싶으면 도로를 건넌다. 하지만 이 점은 나도 적응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와 다르게 신호가 규칙적인 것도 아니고, 버튼을 눌러서 신호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번거로웠다. 따라서 나도 자연스럽게 요즘은 도로를 마음대로 횡단하며 명예 셰필드인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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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학생회관도 숙대와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물론 나는 우리 학교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학교가 주는 아기자기한 느낌을 애정 하지만 이렇게 큰 규모의 학교와 건물들을 보면서 신기하고 재미있다는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새내기가 된 것처럼 눈이 계속 반짝거렸다.


OT 후 저녁을 먹으려고 공동 중방에 들어갔는데 낯선 외국인 2명이 있었다. 내 플랫 메이트들이었다. 한 명은 이탈리아에서 온 Anna, 한 명은 프랑스에서 온 Louisa이다. 둘은 같은 법학과였고 친해 보였다. 처음에는 긴장되지만 플랫 메이트들과 친해지고 싶어 대화를 했지만, 이야기하다 보니 나와 '결'이 안 맞는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들이 하는 대화 주제, 관심사, 생활 방식은 나와 다른 색깔을 지녔다. 교환 후기를 보면 다들 플랫 메이트들과 친하게 지내던데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아 속으로 시무룩해졌다.


감정은 감정이고 배를 채워야 했다. 제대로 된 주방도구가 없었기에 지금 할 수 있는 조리는 베이글 샌드위치밖에 없었다. 심지어 주방 칼도 없어 토마토도 빵칼로 겨우 잘라 샌드위치 바깥에 장식처럼 놓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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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 메이트들이 그때 나에게 물어봤다.


"Is it okay if we have vapor? It's not smoking but if you don't want to smell then we won't."


Vapor? 그게 뭐지?라는 생각이 일단 들었다.


'쥐고 있는 게 담배 같지는 않고... 그냥 진정제 같은 건가?'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이브 한 생각이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쏟아지는 영어와 바로 대답해야겠다는 압박감 때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오케이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자담배였다. 전자담배를 생각하지 못했다. 바보가 된 것 같아 살짝 자괴감이 들었지만 지나간 걸 어쩌겠는가. 다행이게도 그 이후로 피는 모습을 못 봤다. 그토록 좋아하는 베이글임에도 불구하고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먹었다. 평소보다 살짝 급하게 먹고 방에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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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정돈된 방이다. 그래도 이틀 만에 방 정리를 마쳐서 뿌듯했다. 살짝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방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자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전부터 독립적인 방과 혼자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었던 나는 이 사실이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혼자서 빨래도 하고 건조기도 썼다. 여기 와서 느낀 점이 있다면 내 생각보다 나는 독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돈을 지원받기는 하지만 혼자서 살림을 하는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마음대로 생활패턴을 정하고 내 취향을 반영한 하루를 꾸밀 수 있어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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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까지 정리하고 내 영혼의 친구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었다. 저녁에 유럽 플랫 메이트들을 만난 후 괜스레 한국의 정서가 그리워져 '삼시 세끼'를 시청했다.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모든 사람들과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없었고, 결이 안 맞아 굳이 내가 더 다가가기 싫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곳이라고 다를 게 있는가. 억지로 가까운 관계를 만들 수 없는 게 인간관계이다. 그저 플랫 메이트로서의 거리를 가지자고 다짐하며 잠에 들었다.



2024. 09. 24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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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있던 영국에서의 아침 러닝을 오늘 드디어 했다. 나는 러닝 머신에서 뛰는 것보다 이렇게 거리를 활보하며 뛰는 러닝이 좋다. 바깥공기와 풍경을 보면서 뛰면 청춘 만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뛰는 순간에는 어떠한 잡생각도 나지 않아 노력하지 않아도 부정적인 감정들이 씻겨 내려간다. 셰필드의 Weston Park를 이때 처음 봤는데, 꿈에 그리던 유럽 공원 위에서 뛸 수 있어 설렜다. 앞으로 러닝 루틴 중 한곳이 될 공원과 첫인사를 한 뒤, 오는 길에 Tesco Express에서 귀리 우유 한 팩과 뮤즐리를 샀다. 만성변비인 나에게 낯선 환경에서 화장실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뮤즐리가 변비에 좋다는 사실을 한국에서 안 뒤 영국에 도착하면 바로 사야겠다고 다짐했다.


최근 계속 조금밖에 못 먹었는데, 이날은 입맛이 다시 생기기 시작해 아침을 귀리 우유에 말은 뮤즐리로 맛있게 먹었다. 중간에 Emily가 들어와 아침 인사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눴는데 내가 외국에서 외국인 친구와 자연스럽게 영어로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교환을 온 목적을 다시금 새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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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Activity Fair'가 있는 날이었다. Welcome Week의 대형 행사 중 하나로, 모든 동아리를 둘러보고 신청할 수 있는 날이다. 오늘도 역시 H와 함께 Diamond에서 만나 Student Union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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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학생이 아닌, 앞으로 4년 동안 머무를 셰필드 대학생이었다면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나의 관심 진로와 관련된 동아리를 들었을 것이다. Radio Broadcasting Society에 그래서 관심을 가져보기는 했으나, 여기서 6개월만 있을 거고, 동아리 활동에 꾸준히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는 없었다. 확 타오른 마음이 확 식었다. 대신, 잠깐 즐기기 좋은 Baking Society의 GIAG 세션을 다음 주에 H와 듣기로 했다. 우리 둘 다 디저트를 좋아하기도 하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해서 고민 없이 신청했다. GIAG는 'Give It A Go'의 줄임말로, '한 번 시도해 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일회성 체험으로 내가 딱 원하는 무게의 활동이었다.


1시간 정도 다 둘러보고 스타벅스를 들르기로 했다. H가 한국에서부터 벼르고 있단 영국 스타벅스의 명물 Pumpkin Spice Latte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나도 항상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에만 파는 스타벅스 음료를 마시는 게 루틴이었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갔다. 샌드위치까지 먹으려고 했으나 H는 배고프지 않다며 안 먹는다고 말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배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나도 안 먹어야지 하고 라테만 시켰다. 나는 새로운 순간들을 연속적으로 마주하면 식욕이 떨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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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mpkin이라서 이국적인 맛이 날 줄 알고 큰 기대를 안 했는데 너무 맛있었다! 시나몬 맛도 나면서 씁쓸한 맛과 달달한 맛이 공존해 조화를 이루었다. Pumpkin에 spice가 추가된 맛 그대로였다. 달달한 음료를 선호하지 않는데 다음에 스타벅스에 오게 된다면 또 마실 것 같다. H와 이제 다음 일정에 뭐 할지 정하던 중, 식재료를 대량으로 사기 위해 Tesco Superstore를 방문하기로 했다. 정착한다는 것은 곧 대량으로 사는 쇼핑을 완료하는 것. 일단은 돈을 쓰고 보는 일주일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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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홈플러스나 이마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가장 좋았던 점은 비건 재료가 다양했다는 점이다. 나는 비건은 아니지만 비건 음식도 좋아했기에 다양하게 시도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 1층짜리 마트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1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쇼핑이 2시간이 걸려서 끝났다. 비어있던 카트에서 꽉 채워진 카트를 보니 마음이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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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이 끝나고 기숙사로 가는 길에 본 풍경이었는데 너무 예뻤다.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은 나를 들뜨게 했다. 몰랐는데 나는 날씨에 영향을 꽤나 받는 사람인가 보다. 앞으로 자주 못 볼 풍경이 될 것 같아 눈에 꼭꼭 담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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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가 내 기숙사로 가서 저녁을 함께 요리하기로 했다. 처음 해보는 공동 요리이자 요리 다운 요리를 하는 저녁이었다. 이날 메뉴는 '볼로 노제 토마토 파스타'였다. 원래는 내가 주도해서 요리를 하기로 했으나 요리 경력이 더 많은 H가 어느새 프라이팬을 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처음 써보는 공동주방의 인덕션과 조리도구를 다루며 우왕좌왕 요리했다. 순식간에 파스타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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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만 빵 터질 수밖에 없었다. 여러 재료도 꺼내가면서 우당탕탕 만들었는데 식탁에 놓인 2개의 작은 그릇이 옹졸해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비주얼은 옹졸해 보이지만 맛은 훌륭했다. 우리는 서로를 칭찬하며 앞으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날 H와 소중한 추억을 또 쌓게 되어서 기뻤다. 요 며칠간 살림살이를 같이 꾸리면서 그 사이 더 가까워진 것 같다.


(H가 이 글을 볼까 부끄럽지만 일기이기 때문에 솔직한 감정을 적어내려 본다.)


2024.09.25 수요일


며칠 동안 연속해서 이른 시간에 일어나야 했다. 이날 아침에는 7시 30분에 일어나서 8시까지 H와 만나야 했다. Global Opportunity 건물에 가서 최종적으로 registration을 마치고 학생증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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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를 받은 후 피곤하다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H도 나에게 피곤해 보인다고 말했다. 일단은 오후에 'Fresher's market' 행사에 참석하기로 해서 점심때 다시 보기로 했다. 그 사이 몸을 풀기 위해 기숙사 헬스장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한국에서 VR로 봤을 때는 기구도 많아 보이고 시설도 좋아 보였는데, 막상 가보니 그 흔하다는 헬스장 음악도 안 틀어져 있고 기구도 많이 낡아서 실망했었다.

그래도 하나씩 기구들을 다 맛보면서 있을 것은 다 있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만의 근력 운동이라서 신났지만 역시 컨디션이 이날은 평소보다 안 좋았다. 40분 정도 하고 다시 기숙사로 들어가 씻었다. 그때 생리가 터졌다. 10일이나 남았는데 일찍 터져버린 것이다. 이마를 짚은 채 일단 급하게 뒤처리를 했다. 화장실을 안 간지도 오래되어 기분이 찝찝한 상태로 Fresher's Market 행사에 갔다.


생각보다 Market 둘러보는 과정이 금방 끝나 H와 뻘쭘하게 학생회관 앞에서 서성였다. 이제 뭐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곧 개강해서 가게 될 각자의 강의실 건물을 탐방하기로 했다. 이때 사실은 그냥 빨리 기숙사 방에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정해진 에너지가 있는데 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다 보니 머리와 몸에 과부하가 왔다. H와 함께 다닐 수 있어 행복했지만, 어떤 사람이던 매일 하루 종일 같이 다니게 되면 신경이 살짝 예민해진다. 상대방 때문이 아닌, 그저 나의 성격일 뿐이다. 혼자 있으면서 다시 같이 재미있게 다닐 수 있는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다.


하지만 H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들을 영문학 수업이 있는 건물과 내 사회학 수업 건물을 보고 난 후 H가 말했다.


- 너 지금 방에 가고 싶지?


- 응. 하하 오늘 너무 피곤하네. 요새 매일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혼자 좀 쉬고 싶어. 내가 쉽게 기가 빨리거든.


H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기숙사에서 각자 쉬고 이따 저녁에 자신의 기숙사 주방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말했다.


기숙사 문 앞에서 그냥 갑자기 엄마한테 전화를 걸고 싶어 카카오톡 보이스 톡을 걸었다. 지금이면 한국은 밤 11시라 시간이 괜찮을 것 같았다. 전화를 받지 않아 아빠한테 걸었다. 아빠는 엄마가 자고 있다고 말하며 바꿔주겠다고 했다. 그때 잠에서 막 깬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는 내 떨리는 목소리를 엄마는 듣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다.


- 그게...


쉴 새 없이 적응해야 했던 며칠 사이 겪었던 힘든 감정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플랫 메이트에 대한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국인 플랫 메이트가 없어서, 두 명의 유럽인 플메들과는 결이 다른 것 같아서 플랫 생활이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영국에 와서 한 번도 운 적이 없었고 플메에 대한 고민도 전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무의식의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었을 뿐이다. 의식을 하고서 타인에게 털어놓으니 속이 한결 시원해졌다.


- 인간관계는 억지로 해서 친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니깐, 네가 친해지기 싫으면 굳이 안 다가가도 돼. 어떻게 모든 게 다 완벽할 수 있겠어.


- 맞아... 그렇게 생각하고 지냈는데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봐. 그리고 엄마 목소리 들으니깐 괜히 눈물도 나고


너만의 퍼펙트 데이를 살아가야 해. 남들 생각과 상관없이.


영국으로 가기 하루 전,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부모님과 함께 봤었다. 주인공은 청소부로 일하고 남들이 보기에는 안타까워 보이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았지만 주인공은 스스로 자신이 완벽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믿는다. 하나의 세계에서 살지만 각자만의 세계가 존재한다. 엄마는 나에게 그 영화를 언급하며 내 소신대로, 내가 만족할 수 있는 하루를 살아가라고 말했다. 정신이 번쩍 든 순간이었다. 여기에 오면서부터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생활을 내 생활과 비교하고 있었다. 저녁을 언제 먹는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친구들은 누구인지. 나는 나이다. 내 취향, 내 성격을 바꾸기 위해 교환을 온 게 아니다.


그렇게 기숙사 입구 뒤편 건물 벽에 쪼그려 앉아서 30분 동안 엄마와 통화를 했다.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아내고 나니 속이 확 풀렸다. 고민들이 더 이상 대수롭지 않았다.


3시간 동안 기숙사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못 봤던 NCT Wish 자컨이랑 무대 영상을 보면서 히죽거리기도 했고, 넷플릭스로 <흑백 요리사> 1화도 슬쩍 봤다. 침대에서 진저 쿠키랑 Flipz 과자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영상을 보는 것. 그야말로 크고 확실한 행복이다. 이날따라 군것질이 계속해서 당겼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안 부른 날. 역시 생리 때문이겠지 하고 합리화 아닌 합리화를 해봤다. 6시쯤 되었을 때, H 기숙사로 나갈 준비를 했다. 표정이 한결 가벼워진 모습을 거울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H도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활짝 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주방에 도착하니 H가 어젯밤에 수작업으로 까놓은 마늘과 저녁 재료들이 놓여 있었다. 이날의 메뉴는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와 모차렐라 치즈 샐러드였다. 어제보다 훨씬 푸짐해진 재료와 H의 요리 실력 덕분에 든든한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오동통 통한 파스타면과 K 마늘, 그리고 매콤한 맛까지 더해져 싹싹 먹었다. 특히 샐러드 위 놓인 모차렐라 치즈가 너무 내 취향이었다. H와 나는 식성이 상당히 비슷하다. 둘 다 밥보다는 빵을 좋아하고, 한식에 그렇게 목매달지 않는다. 우리는 박수를 짝짝 치며 연신 감탄을 했다. 오늘 하루가 피곤하고 지쳤었는데 이 순간에 다 치유가 되었다.


원래 나는 이날 저녁에 Chocolate Making 활동에 참여하려고 했는데 피곤하기도 하고 굳이 모든 이벤트에 다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과감하게 안 하고 H와 Give It A Go Trip 활동을 함께 결제하기로 했다. Fresher's Market에서 H가 산 블론디와 우유를 함께 마시며 학교에서 주관하는 여행 일정을 살펴봤다. H는 잠깐 안 본 사이에 리스트를 작성하여, GIAG Trip으로 가면 좋을 후보 장소들을 고르고 있었다고 했다. 덕분에 속전속결로 3군데를 정했고 결제까지 완료했다. 일단 정했으면 지르고 보자는 시원함까지 나와 H는 쿵작이 참 잘 맞았다. 달달한 블론디, 그리고 고소한 우유와 함께 우리의 여행을 상상해 보는 시간은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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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평화로운 순간에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소소한 행복들은 삶을 살아갈 이유가 되고, 마음속에 간직하게 되면서 힘든 순간을 별것 아닌 일로 생각하게 만드는 용기를 심어준다. 또 다른 소소한 행복을 오늘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오늘따라 유독 단짠단짠 조합이 자꾸 생각나서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감자칩 한 봉지와 생강 쿠키를 흡입하며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 역시 생리의 위력은 대단하다.


2024.09.26 목요일


오늘은 지극히 혼자 있는 시간을 누리고 싶어 H에게 각자의 시간을 보내자고 말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일주일에 3, 4일 정도는 혼자서 사색하고, 책 읽고, 글 쓰며 고요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 고요한 시간이 내게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그러다가 만나고 싶은 사람,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순간을 가진다. 활기로 가득한 순간이다. 물론 학교 일이나 비즈니스적인 일로 사람들을 만나는 순간도 있다. 나를 성장시키는 순간이다.


나 자신과의 만남, 타인과의 만남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사람마다 맞는 비율이 있고 이는 천차만별이다. 나의 경우 7:3이 가장 이상적이다. 혼자 있고 싶은 순간이 월등히 많지만, 이는 타인과의 만남이 싫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만남이 소중하고 만나면서 교류하는 대화, 행동, 생각들을 통해 삶을 살아갈 활력을 얻는다. 하지만 내게는 타인에게 쏟을 에너지의 용량이 한정되어 있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신경이 살짝 예민해지고, 반응에 무던해진다. 이럴 때는 잠깐의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나와 타인이 만나지 않는 공백의 시간.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웠는지 궁금해하면서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이다. 채워진 에너지로 다시 만나면서 유대감을 쌓는다. 내가 사람에게 애정을 갖는 방식이다. (다만 가족은 예외이다.)


교환학생 생활 특성상 공동주방에서 플랫 메이트들과 만나면서 스몰 톡도 해야 하고, 친구들과 붙어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항상 이상적인 비율을 지킬 수는 없다. 그리고 다양한 환경에 나를 노출시키고 싶어 교환학생을 도전한 이유도 있다. 생각보다 바뀐 생활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나만의 방이 있기 때문일까, 에너지가 더 빨리 충전되는 기분이다.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한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점심에는 좋아하는 베이글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먹었고, 저녁에는 혼자 거리를 산책하며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걸음을 음미했다. 나에게 집중하다 보면 나를 더 알아가게 된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좋아서 혼자 있는 순간을 즐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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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H의 기숙사에 들러 약속했던 유심칩 끼우는 것을 도와줬다. 방방 뛰는 H의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짧은 만남으로 기분이 환기가 되어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을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2024.09.27 금요일


H와 함께 IKEA를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케아. 당장 먹고살기 위해 이케아를 가야만 했다. 칼, 프라이팬, 도마가 절실했다. 오래간만에 셰필드의 하늘이 뭉게구름으로 안 뭉치고 하얀 구름으로 가득 차서 예뻤다. 햇살이 이렇게나 소중한 존재임을 여기 와서 깨달았다.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트램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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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램 역에서 내리자, '여기가 바로 이케아다'를 외치고 있는 것만 같은 건물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이제 주방에서 편하게 요리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든 채로 필요한 물건들을 담았다. 오늘도 역시나 쇼핑하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H와 나는 2층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이케아에 가면 미트볼이 그렇게나 유명하던데 드디어 먹어볼 수 있어서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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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궁금해서 비건 미트볼을 시켰는데 미트볼 소스랑 매쉬드 포테이토랑 궁합이 너무 잘 맞았다. 특히 옆에 펼쳐진 넓은 들판과 풍경이 입맛을 더 돋우게 만들었다. 한동안 변비로 배가 고생했는데 식사를 마친 후 장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장도 비우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날씨는 또 영국답지 않게 해맑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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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를 마치고 영수증을 보는데 H와 소수점까지 똑같은 가격이 나와서 우리는 서로 웃었다. 산 물건은 다른데 같은 가격이 나온 게 너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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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케아 일정을 끝내고 다시 기숙사로 돌아갔다. 나중에 한 번 밥만 먹기 위해서 셰필드 이케아를 다시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파티"에 가는 날이다. 한국에서부터 한 번쯤은 파티에 가서 춤추고 새벽까지 청춘을 즐겨야겠다는 일탈을 상상해 봤다. 나는 통금 시간도 있고, 원래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클럽을 한 번도 안 가봤다. 이참에 경험해 보고 싶어서 밤 10시에 H와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화장도 진하게 하고 나름대로 꾸몄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클럽 파티에서는 가방과 겉옷은 사치였다.


아까 저녁에 플랫 메이트들과 회의를 하면서 파워 E 플메 둘은 12시쯤 파티에 갈 것 같다고 하길래 꽤 늦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10시에 맞춰서 가니 학생회관 앞이 휑해서 우리는 쭈뼛쭈뼛 걸어갔다. 그래도 우리처럼 학교에서 클럽 파티를 여는 행사가 생소한 다른 아시아인들도 일찍 와서 외로움은 덜했다. 처음에는 디제이 앞에서 사람으로 가득 차야 하는 공간도 텅텅 비어 있어서 뻘쭘했었는데 칵테일 한 잔 시키고 생각 없이 있다 보니 어느새 광란의 밤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 눈이 마주치면 같이 춤추고 어깨 잡고 뛰어놀았는데, 알 수 없는 희열감이 들었다. '오늘만 산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청춘과 열정이 이곳을 지배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기가 빨려서 처음보다 몸에 힘이 빠졌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놀랍게도 안 들었다. 끝날 때쯤 디제이가 느린 곡을 틀기 시작했는데 나는 같이 춤을 춘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하면서 몸을 음악에 맞춰 좌우로 흔들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교환을 온 이유가 이런 경험을 하기 위해 서구나'


한국에서는 오직 한국인들로만 둘러싸여 있었는데 며칠 사이에 나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속으로 신기해하면서 파티의 끝물까지 흥에 취했다. 음악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서 나갔다. 칵테일은 반 잔 정도 마셔서 취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에 취했던 탓인지 나는 술에 기분 좋게 취한 사람처럼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같이 춤추던 홍콩 남자 애들과 H, 그리고 한국인 동생까지 우리는 셰필드 길거리를 걸으며 각자의 기숙사로 향했다. 그저 같이 클럽에서 춤췄기 때문에 자연스레 집까지 같이 가게 된 조합이었다. 정신없이 기숙사 방안에 들어왔을 때 정신이 차려졌다. 얼른 침대에 눕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들어 재빨리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여운을 느낄 새도 없이 피곤함이 나를 덮쳐 새벽에서 아침으로 시간을 빨리 감기 했다.


2024.09.28 토요일


원래라면 어제와 같이 에너지 소모가 어마 무시 했던 날에는 최소 이틀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며 충천해야 하는데, 이곳 생활은 그런 나를 봐주지 않는다. 토요일에 학교 기숙사에서 주관하는 City tour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눈 뜨자마자 샤워하고 대충 베이스만 발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2시간이면 끝나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준비하다 보니 허기가 져서 빠르게 아침 겸 점심밥을 먹은 후 기숙사 커먼 룸으로 달려갔다.


시티 투어라고 해서 가이드가 장소별로 설명을 자세히 할 줄 알았으나, 특별한 해설도 없이 따라오라며 거리를 걷기만 했다. 학교 학생들이 지원해서 가이드를 맡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학교 근처 놀 거리와 예쁜 성당을 구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하며 친해질 수 있어서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날 투어가 끝난 후 투어하면서 친해진 여러 명의 친구들과 카페에서 이야기를 더했다. 특히 H를 비롯한 독일 친구 Julie와 홍콩 친구 Gisselle과 야외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하는데, 그 순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날씨 좋은 날, 커피와 함께 오늘 처음 사귄 친구들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순간이 소중했다. 이날은 잊지 못할 교환 생활 중 하루가 될 것 같다.


Julie와 H와 함께 셋이서 Tesco 장을 보러 갔는데 Tesco까지 가는 길에 서로의 문화를 공유했다. 유럽에서는 성인이 되면 가족 곁을 떠나 혼자서 자취하는 게 대부분이라는 소리를 듣고 우리나라와 차이가 크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누구의 입장이 맞고 틀린 것은 없다. 자신이 있는 환경에 맞게 생활하면 된다. 이러한 문화 차이를 알아가면서 상상하지 못한 범위까지 시야가 확장되는 것 같다. 내가 23년 동안 머물고 있는 한국이라는 땅이 얼마나 작은지 체감하게 되었다.


저녁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베이글이 냉장고 속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어 얼른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채 베이글 샌드위치를 뚝딱 만들었다. 방 안에서 나만의 음식과 좋아하는 영상을 보는 순간은 언제나 행복하다.


2024. 09. 29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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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비가 오지 않으면 날씨가 좋은 날이다. 한국에서는 너무 덥기도 했고, 러닝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는데 유럽에 있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러닝을 하고 싶은 의욕이 마구마구 생긴다. 이날은 Weston Park 옆에 있는 Crooks Valley 공원을 처음 가봤다. 발이 이끌리는 대로 달리다 보니 마주했는데 훨씬 넓었다. 다음 러닝에는 이곳을 더 누벼야지 생각하면서 운동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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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글과 샌드위치가 소울푸드이기 때문에 질리지 않았다. 당시 마지막 참깨 베이글이었는데, 뭔가 자극적이게 먹고 싶었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놓고 베이글을 구운 후 속에는 햄과 치즈를 3장씩 넣었다. 거기에다 닭 가슴살과 버섯까지 구워서 뚱뚱한 샌드위치를 완성했다. 다음 주에는 호밀 식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까? 행복한 고민이었다. 다음날은 드디어 개강일이였다. 별 생각과 걱정이 없었다. 그저 '점심에 뭐 사 먹을까?'라고 꿀꿀대는 물음표만 머릿속에 띄워졌다.


'정신없이 달린 일주일'이라는 말로 완성되는 1주 차였다. 내 생애 이렇게 새로운 사건과 경험이 쌓인 일주일이 또 있을까. 매일 새로운 자극이 찾아왔고, 도전을 했던 것 같다. 동시에 적응을 금방 해서 나만의 루틴이 생기기도 했다. 앞으로 교환 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는 꼭 마음속에 새기고자 한다.


"나"만의 퍼펙트 데이를 만들어가자


결국 나를 알아가고 싶어서 도전한 교환 생활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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