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비가 몰고 온 감기 바람에 휩싸였다
아침 8시 30분. 드디어 개강이다!라는 생각이 눈 뜨자마자 들었다. 한국에서는 9월 1일에 땡 하고 개강인데, 영국은 9월 30일부터 학기가 시작되어서 그동안 휴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정신없던 정착기도 어느 정도 지나가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할 때가 왔다. 사실 학기는 시작되었지만 수업도 40 credit 두 개 과목만 듣기도 하고 P/F이기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이 덜했다. 과목 공부 자체보다는 내가 '영국'에서 수업을 듣고 학교생활을 한다는 경험에 더 집중하고 싶었다. 한 마디로 놀고 싶다는 뜻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개강 첫날에는 화장도 하고 청바지에 검은 목폴라, 그리고 요즘 매일 입는 검은 가죽 재킷을 걸쳐 준비에 나름 공을 들였다. 신경 써서 옷을 입은 채 영국의 캠퍼스 안을 걸어 다니고 싶었다.
샤워하면서부터 느꼈지만 유독 이날이 겨울 아침처럼 추웠다. 옷을 벗는 순간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수준의 추위였다. 거기에다 비까지 내렸다. 나오자마자 비가 미친 듯이 쏟아져서 '이거 오늘 괜찮으려나?' 싸한 느낌이 들었다. 일단 10시까지 강의실에 가야 했기 때문에 무작정 걸었다.
Arts Tower라는 건물에서 'Dynamics of Social Policy'라는 수업이 있었다. 회사 건물처럼 생겨서 처음에는 학교 건물이 맞나?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3달 만에 듣는 강의는 처음 10분만 설렜다. 스르륵 감길 것 같은 눈꺼풀을 간신히 붙잡은 채 애플 펜슬을 쥐고 들리는 내용을 필기했다.
수업이 끝나니 11시였다. 점심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배가 고팠다. 강의실이 있는 층에 카페가 있길래 기웃거렸다. 내가 사랑하는 샌드위치가 쫙 진열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차가운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다가 날씨도 쌩해서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햄앤치즈 파니니와 좀 든든하게 먹고자 평소에 마시는 아메리카노 대신 카페라테를 시켰다.
따뜻한 파니니 한 조각을 베어 먹으니 치즈가 당겨 나왔다. 바삭한 빵과 함께 먹는데 이게 뭐라고 작은 감동을 주었다. 무엇보다 카페라테가 너무 맛있었다. 놀랍게도 지금까지 먹어본 카페라테 중 제일 기억에 남았다. 앞으로 월요일 점심은 여기서 사 먹어야겠다는 하찮지만 기대되는 마음을 가진 채 멍 때리면서 먹었다. 반 조각만 먹었는데도 배가 찼다. 그래서 남은 반 조각은 이따 수업 끝나고 먹으려고 가방에 넣었다.
건물 바로 옆에 Western Bank Library라는 학교 도서관이 있어 슬쩍 구경했다. 셰필드 대학교에는 총 3개 도서관이 있는데 이곳이 내 최애 도서관이 될 것 같다. 운영시간이 다른 도서관보다 일찍 닫는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가장 풍경이 예쁘고 '도서관'다운 장소였다. 도서관 바로 옆에 Weston Park가 있어 도서관 통창 유리 너머로 푸릇한 공원의 정경을 만끽할 수 있다. 난방이 안돼서 쌀쌀했지만 따뜻한 카페라테를 마시며 공원 나무들을 바라보니 그 순간 교환 생활과 또 한 번 사랑에 빠졌다. 평화로운 분위기를 혼자서 온전히 즐기며 런던 책방에서 사 온 'Wandering Through Life'를 읽었다. 기숙사에서 15분 걸어야 하는 거리이지만 바로 앞에 있는 Diamond 도서관 대신 이곳으로 발걸음이 향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감상은 감상이고 수업은 수업이다. 두 번째 수업은 'Sheffield University Management School'에서 들어야 했다. 도서관에서 무려 15분을 더 걸어야 했다. 가는 길도 좁고 언덕길이어서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우산과 구글 지도가 켜진 폰을 든 채 비틀비틀 올라갔다.
Sociology of Family라는 수업을 들었다. '가족'이라고 해서 배울 내용이 무엇일지 상상이 안 갔다. 가족의 정의와 구성이 현대에 와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에 대해서 첫 시간에 배웠는데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생각보다 성 역할에 가족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나 크다는 점도 깨달았다. 교수님도 좋으시고 예상외로 얻을 게 많은 수업이 될 것 같았다. 2시간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금방 갔다.
드디어 2개의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이번 주 강의도 모두 끝났다! 이번 주에는 강의가 월요일에 몰려 있었고 수업 외로 나가는 세미나 수업도 없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운 채로 강의실 밖을 나왔다. 오후 3시였고 다시 허기가 져서 아까 먹다 남은 파니니를 꺼냈다. 바로 앞에 식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먹으면서 노트북을 꺼냈다. 당시 1주 차 교환일기를 부랴부랴 쓰고 있었기에 시간이 빈 김에 적어내리기로 했다.
시간은 어느덧 6시로 향하고 있었다. 짐을 정리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비가 그칠 줄 알았으나 낮보다 훨씬 거세게 내렸다. 이 와중에 우산을 안 쓰고 바람막이 잠바에 달린 모자만 씌운 채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미끈거리는 거리를 조심히 가던 중 한 차가 빠르게 물이 고여 있는 차도를 휩쓸었다. 그 순간 바퀴가 튀긴 물 한 움큼이 내 옆모습을 덮쳤다. 청바지가 홀딱 젖고 말았다. 화난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고 발걸음을 멈출 수 없기에 일단 계속해서 내려갔다.
'그래 여기 사람들도 우산을 안 쓰고 다니는데, 나도 우산을 안 썼다고 생각하지 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이는 다음날 큰 파장을 몰고 오고 만다.
이날 밤에 H와 Korean Society를 방문하기로 했다. H가 한국에서 숙대로 교환을 온 외국 학생들과 소통하는 동아리에 들었었는데 당시 셰필드 학생인 Adam과 만나면서 친분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Adam이 속해 있는 Korean Society에 놀러 가면서 또 한 번 socializing을 하기로 했다. Society에서 술도 마시고 음식도 먹을 것 같아 저녁은 가볍게 차려 먹었다. 뮤즐리로 토핑 한 요거트와 통밀빵의 조합에 빠져있던 시기다.
밥을 먹고 화장 좀 고친 뒤 흰 부츠로 멋을 한층 더 부리고 H를 만나러 나갔다. H는 또 다른 숙대 교환학생을 함께 데려왔다. 이전에 만났던 적이 있기에 반가웠다. 곧이어 Adam 그리고 그의 플랫 메이트들과 만나 Society 활동이 열린다는 건물로 향했다. Adam의 플랫 메이트 중 한 여자가 능청스럽게 한국말을 잘하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Korean Society에 가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도착한 곳은 아주 큰 pub이었다. 들어가면서 무엇에 쓰일지 모르는 종이도 받았다. Pub 안에는 외국인과 한국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200명 정도가 왔다고 한다. 순간 홍대 술집에 들어온 줄 알았다.
Society라고 해서 규모가 많아도 50명쯤 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왁자지껄함에 당황했다. 정신없이 사람들과 마주하고 인사를 나눴다. 칵테일을 한 잔 시키려고 하는 순간 진행자로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모두 자기 팀원을 찾으세요!'
아까 받은 종이에 적힌 카테고리가 같은 사람들을 찾아서 팀을 만들어야 했다. 사람들에게 종이를 보여주면서 팀원들을 찾아냈다. 시끄러운 분위기 속 어색한 감정과 반가운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결성된 팀별로 진행자가 제시하는 퀴즈를 맞히는 구성이었지만 사실상 거의 팀 내에서 수다 떠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나를 비롯한 한국인 3명과 한국학과 학생들 3명과 케이팝에 대해서 열띠게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케이팝 덕후로써 대화 주제에 신이 안 날 수가 없었다. 한국학과 학생들은 모두 다양한 나라에서 왔는데 케이팝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한 친구는 케이팝 안무도 관심이 많아 80명 앞에서 안무를 가르친 적이 있다고 한다.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케이팝 곡을 듣고 손짓으로 안무를 추는데 멋있었다. 다들 케이팝에 진심인 모습이 보여 동질감도 들고 뿌듯했다. 그중 Mai라는 친구가 한국 이름을 지어줄 수 있냐고 물어봤다. 이왕 지어주는 거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기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Mai에게 이름 뜻을 물어봤다. '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하자 바로 떠올린 이름이 있었다.
'How about 은하?'
Mai는 이름을 듣고 예쁘다고 하며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한국어로 '은하'라고 적었다. 실제로 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저장해 놓은 마음이 예뻐서 나도 메모해 둔 이름을 사진으로 남겼다.
11시가 되었고 슬슬 피곤했다. 잠시 떨어진 H는 어디 있으려나 생각하던 찰나 옆에 있던 한국인 Y 님이 이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Y 님은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고 하셨는데 같이 이야기하면서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에 내가 사는 기숙사인 Allen Court로 오시면 한식 요리를 해드리겠다고 말했다. Y 님도 좋다고 하며 연락 주라고 하셨다. 그렇게 다음을 기약한 채 헤어졌다. 나 역시 H와 다시 만났고 H를 비롯한 한국 교환학생들과 함께 기숙사로 향했다. Adam도 함께 갔는데 우리에게 영국의 맛있는 디저트를 나눠주고 싶다며 자기 기숙사에 들러 쿠키를 하나씩 줬다. 처음에는 낯을 가리는 30대 아저씨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하다 보니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인 것 같았다.
기분 좋게 기숙사로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내일은 늦게 일어나야겠다는 행복한 계획을 세운 채 잠에 들었다.
아침 11시쯤, 침대에서 눈을 떴는데 싸한 느낌이 들었다. 목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마냥 따가웠다. 젠장. 결국 일주일 만에 감기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에이, 어쩌겠어' 하고 주섬주섬 한국 병원에서 처방받은 한 달 치 감기약을 꺼내 먹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감기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어 원래 가려던 운동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전날부터 생각해 뒀던 닭가슴살 고추장 덮밥을 요리하기 위해 공용 주방으로 갔다.
Emily와 남자애 셋이서 밥솥을 공동 구매했는데 드디어 처음 써봤다. 인터넷을 열심히 서핑하며 밥솥 사용법을 알아낸 후 쌀을 씻고 물을 부은 다음 전원 버튼을 켰다. 재료를 준비하는 사이 밥이 완성됐다는 '딸칵' 소리가 났다. 15분 만에 밥이 완성되다니. 영국에서 이렇게 밥을 쉽게 먹을 수 있을 줄 몰랐다. 대부분 마트에서 파는 쌀들은 인도식 카레에 들어있는 날아다니는 쌀인데, '스시 라이스'를 사면 한국에서 매일 먹었던 찰기 있는 밥을 먹을 수 있다. 낯선 외국에서 한식을 해 먹었다는 사실이 뿌듯해서 인스타그램 스토리랑 친구들한테 카톡으로 자랑했다.
밥을 먹고 침대에서 전기장판을 틀었다. 약을 먹으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 싶다가도 갑자기 목이 따가워서 연신 콜록댔다. 어제 지나가는 차가 공격한 비 때문인 것 같아 속상했다. 오후 5시에 'GIAG Baking Society' 활동이 있어 위아래로 내복으로 무장하고 나갔다. 이날도 비가 추적추적 오니 우중충했다.
H와 같이 신청한 활동이라 이날도 만났다. H는 개강 첫 주부터 수강 정정을 해야 해서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이날은 둘 다 정신없이 활동에 참여했던 것 같다.
디저트를 너무 좋아하는 나는 베이킹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이 컸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었다. 동아리 부원들은 우리에게 레시피 한 장과 재료들을 건네주고는 레시피를 보고 만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레시피를 보면서 노오븐 초코 치즈케이크를 만들었다.
만드는 과정은 신났다. 고소하면서 달달한 다이제 쿠키 냄새를 맡으며 기분이 좋아졌다. 크림치즈와 누텔라, 더블 크림을 섞은 후 다이제 쿠키 위에 살살 발라주니 치즈케이크가 완성됐다. 나는 항상 만드는 활동에 있어서는 손이 느려 가장 마지막에 남아서 만들었다. H가 옆에서 기다려줘서 고마웠다.
예상하지 못한 점이 또 있었다. 레시피가 1인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눈을 감았다 뜨니 투썸플레이스 아이스박스만 한 크기의 케이크가 3개 생겼다. 하하 호호 학교 사람들과 웃으면서 예쁜 조각 케이크 1개를 완성하는 모습을 상상했는데 정신없이 케이크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면서 큼직한 케이크가 3개 생겼다. 우리가 기대했던 GIAG가 아니었다. 시무룩하지는 않았다. '이게 맞아?'라는 물음표가 머릿속에서 띄워졌을 뿐이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H가 수강 정정 때문에 고민이 많아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을 잠깐 풀어주고 싶었다.
"내가 위로의 뜻을 담아 내 치즈케이크 세 박스라도 나눠줄까?"
H는 손사래를 치며 크게 웃었다. 오히려 더 골머리를 앓을 것 같다고 하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이날 감기에 걸리고 날씨도 내 마음을 본떴는지 회색 구름으로 가득했지만, 이러한 웃음과 소소한 즐거움 덕분에 무거웠던 우울함이 가볍게 느껴졌다.
공용 주방에서 케이크를 포크로 한 입 퍼먹었는데 맛이 기대 이상이어서 놀랐다. 저녁 먹고 디저트로 조금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채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틀 전, Emily와 Nicholas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요리를 하기로 동맹을 맺었다. 일명 'Shared Cooking 동맹'이다. Emily는 화요일, 나는 목요일, Nicholas는 금요일 당번이었다. 이날 GIAG 때문에 참여하지 못할 것 같다고 했는데 Emily가 그럼 보관 통에 담아주겠다고 말했다. Whatsapp에 '라따뚜이'를 만들었다고 해서 입맛을 다시며 뚜껑을 열었다. 너무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릇에 덜어낸 후 저녁 식사를 여유롭게 즐겼다.
원래는 밥을 먹고 케이크를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큰 락앤락 통에 담아둔 케이크가 사라져 있었다. 그만큼 너무 맛있었다. 몸이 피곤해서 달달한 음식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걱정했던 3통을 금방 비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침이 나왔다. 어제보다는 컨디션이 살짝 괜찮아졌지만 목은 여전히 아팠다. 약봉지에서 아침, 점심, 저녁 약을 꺼냈다. 감기 걸렸다고 너무 방안에만 있으니 오히려 몸이 굳고 피곤한 것 같아서 1시간 짧게 헬스장에서 운동을 했다. 오히려 근육을 움직이고 스트레칭하면서 몸을 풀어주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졌다. 근력 후 단백질 섭취를 해주면 기분이 괜히 좋아진다. 디저트로 치즈케이크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이날 저녁, 앨런 코트 커먼 룸에서 'Speed-friending' 활동이 있었다. 크게 와닿았던 순간은 솔직히 없었다. 활동명 그대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빠르게 알아가면서 로테이션을 돌았다. 그 순간은 재미있었지만 상대를 더 깊이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국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끝나고 앨런 코트에 사는 한국인 교환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각자의 교환 생활을 말하고 서로 공감하며 그렇게 이날의 작은 이벤트가 끝났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에 힘이 전혀 안 들어가 평소에 잘 먹지 않는 아침을 먹었다. 이 당시에 그릭요거트와 뮤즐리, 호밀빵 조합에 빠져있었다. 이번 교환 생활에 맞춰서 가져온 <쉬운 천국>을 읽으며 사색적인 오전을 보냈다.
오늘 밤 11시부터 International Party가 있어서 컨디션을 얼른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후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원래는 Western Bank Library에 가서 책을 읽으려고 했으나 도저히 나갈 기운이 없었다. 일단 잠을 충분히 자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어 전기장판을 켜고 침대 위에 누웠다. 그렇게 4시간 정도 쓰러지듯이 잤다. 눈을 뜨니 지끈거렸던 두통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밤에 클럽 파티를 가기에는 내일이 두려웠다. 미래의 나를 위해 결국 파티에 가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교환학생들끼리 모이는 파티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아파서' 못 가게 된 점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동시에 편안한 감정도 밀러 들어왔다. 바글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에너지를 털어야 했는데 조용하고 안락한 공간에 혼자 밤을 보낼 생각에 긴장이 풀어졌다.
이날 저녁 드디어 Emily와 Nicholas와 셋이서 Shared Dinner 만남을 가졌다. 목요일 요리사는 나였기에 미리 사둔 다진 고기를 활용해 볼로네제 파스타를 만들었다. 감기에 걸려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3인분 요리를 하니, 음식 맛이고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속으로 떨리면서 플랫 메이트들의 반응을 봤는데 다들 맛있다며 계속해서 파스타를 떠먹었다.
'어쩌면 나 요리에 재능이 있을 수도?'
장난스러운 칭찬을 스스로에게 했다. 설거지를 하고 방에 들어가 침대와 다시 물아일체가 되었다. 침대와 유튜브는 나에게 감기약보다도 강력한 천하무적이다.
내일은 제발 감기가 낫기를 바라며 그렇게 수요일이 지나갔다.
화요일부터 아침은 항상 몸이 피곤하다는 느낌을 확 받았었다. 목요일 파티를 깔끔하게 포기한 선택이 옳았는지, 이날은 목이 살짝 칼칼한 것 빼고는 몸에 기운이 넘쳤다. 이 기세로 헬스장도 갔었다. 날씨도 셰필드답지 않게 하늘이 파랗고 화창했다.
마지막 유산소를 뛰면서 유튜브 영상을 보는데, K-핫도그가 나왔다. 기숙사에서 요리를 하다 보면 샌드위치, 볶음밥, 덮밥, 파스타를 주로 해 먹는다. 자극적인 음식을 먹기가 힘들다. 영상을 보자마자 '아 오늘 자극적인 음식이 너무 당긴다'는 생각이 뇌에 꽂혔다. 전날 저녁에 Emily가 Diliveroo라는 앱을 통해 햄버거 배달을 시켰다는 말이 떠올라 나도 오늘만큼은 사치를 부려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엄마도 카톡으로 '아프면 돈 아끼지 말고 맛있는 거 사서 먹어'라고 왔다. 감기 걸린 것도 서러운데 맛있는 한 끼라도 먹어야지, 합리화 아닌 합리화를 하며 러닝머신에서 내리자마자 한국식 치킨 덮밥을 시켰다. 배달 시간이 30분이라고 나와서 그 사이에 오리엔탈 가게를 구경하기로 했다. 다음 주에 닭볶음탕을 요리하기로 해서 고춧가루도 필요했고 한식 재료를 더 쟁여두고 싶었다.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니 벌써 배달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뜨며 기사에게 전화가 걸렸다. 나는 급한 마음에 그냥 밖에 두고 가라고 말했다. 도착하고 보니 리셉션 안에 있었는데, 기숙사 직원에게 배달은 안된다고 한 소리 들었다. 사실 내 소중한 치킨 덮밥이 무사히 배달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한 나머지 직원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비싸기도 하고, 배달을 받으려면 밖에 나가서 받아야 하기에 아마도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배달 식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맛은 또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오랜만에 육즙과 기름이 터지는 치킨을 맛봐서 더 감격스러웠다. 요리도 즐겁고, 샌드위치도 안 질리지만 역시 남이 해준 음식이 최고임을 다시 느꼈다.
오후 4시에 탠덤 친구와 첫 만남을 가졌다. 셰필드 대학교 한국학과 학생들과 교환 온 한국 학생들을 매칭해서 소통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어 바로 신청했다. Franchesca라는 신입생과 매칭이 되었고, 교수님께서 주신 번호로 바로 연락을 했다. 첫 만남은 매우 어색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외국인과 친구처럼 이야기하듯이 편하게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나도 뚝딱댔고, Franchesca도 같이 뚝딱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어졌다. 물론 중간 정적이 찾아올 때는 속으로 무슨 화두를 던져야 하지, 머리를 떼굴떼굴 굴렸다. 1시간 30분 정도 긴 대화를 하고 다음 주 언제 만날지 정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항상 첫 만남은 상대에게 실례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이날에도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며 두 번 생각하고 말했다. 그래도 탠덤 파트너에 대해 더 알아가 보고 싶고, 친해지고 싶어 다음 주 만남이 기대되었다.
Franchesca와 헤어지자마자 Tesco Superstore로 향했다. 밥을 해 먹을 기본 재료들이 다 떨어져 갔기 때문에 감기가 다 안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 비장하게 걸어갔다. 파스타 코너에서 파스타 면을 고르고 있는데 우연하게 Emily를 마주쳤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을 밖에서 만나니 순간 너무 놀라서 자동적으로 "Oh my gosh!!"라고 외쳤다. Emily는 나의 놀란 반응에 놀랐는지 놀래서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었는데 영어로 '너무 반가워서!'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 멋쩍게 웃은 채 기숙사에서 보자고 했다. 언어와 문화로 인해 한국 친구를 대할 때처럼 외국 친구와 백 퍼센트 편하게 못 대한다는 점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아쉬움인 것 같다.
냉동코너와 냉장 코너에서 음식을 고를 때는 추워서 맹구처럼 콧물이 계속 나왔다. 이러다가 다시 감기가 심해질 것 같아 재빨리 재료를 집어 들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항상 마트에 가면 계획에 없었던 물건들을 담게 된다.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은 무거운 쇼핑백을 들고 무언가에 뒤쫓기는 사람처럼 앨런 코트로 향했다.
물건을 정리하자마자 저녁밥을 먹었다. 이날은 Nicholas의 저녁밥을 먹었다. 처음에 Nicholas를 볼 때 키도 크고 프랑스인이라고 해서 괜히 더 낯설게 느껴졌다. 특히 공동주방에 나타나는 일이 별로 없어 친해지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대화하다 보니 요리를 자주 해 먹지 않으며 집돌이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과묵하기는 하지만 친절하고, 결이 비슷해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앞으로 플랫에서 마주쳐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너무 서양인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본 것 같아 반성하게 되었다.
Nicholas는 처음 요리해 봤다고 말했는데 맛있어서 놀랐다. 크림 파스타와 치킨의 조합도 완벽했다. 이곳에서 앞으로 모든 종류의 파스타를 맛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날 왠지 OOTD랑 화장이 마음에 들어 기숙사 방에서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처럼 거울 셀카와 셀카를 마구 찍었다. 살다가 한 번씩 인스타그램 프로필을 바꿔야겠다는 계시가 내려올 때가 있는데, 그게 이날이었다. 인스타그램은 나에게 있어 '자기만족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물론 지인들에게 '난 이렇게 즐겁게 살고 있어'를 자랑하고 싶어 올리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스토리나 게시글을 올림으로써 느끼는 만족감이 더 크다. 내가 지닌 색깔을 그릴 수 있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자주 스토리와 피드를 올리는 것 같다.
저녁에는 다음 주에 있을 Family 과목 seminar 수업을 위해 읽기 자료를 읽었다. 오랜만에 학문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두뇌를 굴러야 하다 보니 금방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결국 조금 읽다가 말았다. 내일을 위해 결국 침대에 뛰어들었다.
토요일 아침은 상쾌하게 헬스장에서 오랜만에 1시간 근력, 30분 유산소를 완수했다. 2주 차, 나를 힘 빠지게 만든 감기 때문에 운동 강도를 낮게 맞췄는데 다시 원래 컨디션으로 돌아오는 게 느껴져 알차게 헬스 루틴을 짰다. 대단한 루틴은 아니고, 그저 운동시간과 무게를 늘렸을 뿐이다. 신기하게도 적당히 아플 때 운동을 하면 아픈 게 나은 것 같다. 내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움직이면서 몸이 축 처지지 않도록 체력을 불어넣어 주는 과정이 필요함을 이번에 다시 느끼게 되었다.
이날 점심에 나의 영혼의 단짝이자 장수 친구인 J랑 영상통화를 하는 날이었다. 원래는 금요일에 하려다가 급하게 잡힌 탠덤 약속 때문에 토요일 점심으로 바꿨다. J는 한국에 있어서 한국 시각으로는 밤 9시였다. 급하게 샌드위치를 만들고 빨래를 G 층 세탁실에 가서 세탁기에 욱여넣은 뒤 방으로 들어갔다. 줌 화면에 J의 얼굴이 뜨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J 이름을 부르며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J랑 같이 있으면 아이가 된 기분이 든다. 평소에는 친구들의 말을 들어주고 차분한 텐션을 유지하는 편이다. J 앞에서는 통통 튀어 오르는 성격이 자연스레 나온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한테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거리듯이, 화면 너머 한국에 있는 J에게 그동안 셰필드에 도착하고 나서 있었던 사건들, 기분, 좋은 추억들을 나열했다. J는 좋겠다고 말하며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너무 나만 떠든 것 같아 J의 근황을 물었다. 한국에서의 학교생활, 술친구가 한 명(바로 나다) 없어져서 슬프다는 근황,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J의 말을 듣다 보니 내가 한국에서 지냈던 일상이 전생 같았다. 분명 2주 전까지만 해도 한국 토박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짧은 시간에 수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 3달 동안 영국에서 지낸 착각이 들었다.
카페에서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훅 가버렸듯이, 줌 세계관 속에서도 다를 게 없었다. 어느덧 1시간 반이 지나가 있었고 J의 속 아픔 사건으로 급하게 영상통화가 마무리되었다. 다음에는 서로 술을 가져와서 영상통화를 해보자고 말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고, 국경을 넘어서도 우리의 술 티키타카는 계속되었다.
이날 저녁에는 H에게 한식 요리를 해주고 싶어 플랫으로 초대했다. 목요일에 Shared Cooking에서 볼로네제 파스타를 하고 남은 다진 고기를 활용해서 고추장 다진 고기볶음을 만들었다. 원래는 덮밥 비주얼을 상상했으나, 작은 프라이팬의 노쇠함과 제대로 된 밥그릇이 부족한 이유로 상상한 그대로의 음식은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맛은 상상한 그대로였다! H는 밥솥으로 밥을 해 먹는 내 모습이 대단하다며 연신 감탄을 했다. 나도 내가 영국에서 밥을 제대로 해먹을 줄 몰라서 얼떨떨했다. 처음 이곳에서 H와 함께 옹졸한 토마토 파스타 두 그릇을 놓고 먹었던 게 갑자기 기억났다. 그때는 파스타만 해먹을 줄 알았는데 H도 나도, 다양한 음식을 요리하고 있으니, 우리가 제대로 셰필드 생활에 적응했음을 실감했다.
토요일이 세탁하는 날이라면 일요일은 청소하는 날이다. 그동안 쌓였던 먼지와 머리카락을 이케아에서 산 옹졸한 빗자루로 꼼꼼히 쓴 후, 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마지막에 화장실 바닥까지 청소해 주면 끝이다. 2주 사이에 주말 루틴이 생겼다니, 자취하니깐 반강제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날은 운동 후 청소까지 해서 다 하고 나서 지쳤었다. 해야 할 일을 먼저 다 해버리고 쉬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쉬는 시간, 즉 점심시간이 무척 달콤했다. 이날 점심은 금주에 쌓인 leftover들을 털어서 볶아 먹었다.
감기도 어느 정도 나았겠다, 이제는 진짜 밖으로 나가보기로 굳은 결심을 했다. 학교 도서관 중 유일한 24시간 도서관인 Information Commons에서 수업 읽기 자료를 읽기 위해 발걸음을 나섰다. 세상이 내 외출을 방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지, 건물 앞까지 갔는데 카드 지갑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생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데 놓고 온 것이다. 한숨을 짧게 쉬며 다시 기숙사로 향했다. 그냥 기숙사에서 뒹굴뒹굴할까 짧은 내적 전쟁이 일어났지만 승리의 편은 끈질긴 의지력이었다.
'그동안 미뤘던 외출과 공부를 기필코 1시간이라도 해내리라'
심지어 두 번째 나갔을 때는 기숙사 1층에서 우산을 두고 와서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드디어 Information Commons 도서관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도서관 서적이 많아서 놀랐다. Western Bank Library에 비해 건물 외관이나 안 모두 문학적인 색깔보다는 정보 탐색적인 색깔이 짙었다. 시험공부나 과제를 조용히 하기에 좋은 장소다. 24시간이라는, 언제든지 마음 놓고 갈 수 있다는 편리함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 답답한 느낌이 들어 밤샘 과제를 하지 않은 이상 잘 안 가게 될 것 같다.
그렇게 하루의 작은 목표를 달성한 채 의기양양하게 기숙사로 돌아갔다. 테스코에서 산 뇨끼를 해 먹어 보고 싶어 늦저녁으로 요리해 먹었다. 간단하게 요리하고 싶어서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바질 페스토만으로 맛을 냈다. 안에 트러플 향이 나는 다진 고기가 들어있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양식집에서 뇨끼를 제일 좋아했는데 이렇게 간편하게 해 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남은 1인분은 여기에 크림을 더해 바질 크림 뇨끼를 만들어 먹으려고 한다.
1주 차에는 정신적으로 혼돈의 시기였다면, 2주 차는 육체적으로 힘이 많이 들었다. 건강이 최고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건강해야 요리도 하고, 여행도 하고, 학교생활도 할 수 있다. 이 기회에 나의 면역력이 한 층 강해졌기를 바란다. 생각보다 빨리 교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어서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하다. 5년 전의 나라면 안절부절못하고 쉽게 우울감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과거보다는 확고해졌기 때문에 내 가치관이라는 막대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그 막대를 단단히 쥔 채 나만이 알 수 있는 성장판 위를 걸어가고 있다. 하이킹하듯이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나타내는 조각들을 모으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교환 생활을 하면서 조각들을 찾고 맞추는 순간들이 금방 찾아올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