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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필드 교환학생의 모험 Week3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교환생활을

by 윤슬


2024.10.07. 월요일


월요일이 다시 찾아왔다.


오후 1시부터 2시간 진행되는 Family 수업이 끝난 뒤 아무런 생각 없이 하교하다가 풍경을 보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사진을 찍었다. 지난주와는 상반되는 날씨였다. 비 온 뒤 맑음이라는 말은 이때 쓰는 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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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근처에 가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어 발걸음을 향하다가 Western Bank 공원 입구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셰필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해맑은 날씨를 바깥에서 온전히 누리고 싶었다. 공원 건너편에 있는 스타벅스를 발견했다. 따뜻한 카페라테에 샌드위치를 들고 공원 벤치에서 먹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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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만에 느껴보는 평화로움이었다. 지난주 고생했던 감기도 다 나았고, 날씨도 내 상태를 알아봐 준 듯,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고소하고 따뜻한 라테를 마시며 햄 치즈 토스트를 먹으니 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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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면 쉴 새 없이 사진을 찍는 습관이 있다. 구름이 낮게 깔려 공원의 나무들과 맞닿아 있어 한참을 멍을 때리며 바라봤다. 한국에 있는 소중한 친구들에게 곧바로 이 소식을 자랑했다. 행복한 순간이 찾아오면 항상 친구들과 가족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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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으로 H의 연락이 왔다.


- 이번 주 금요일에 날씨가 좋다는데 우리 맨체스터로 당일치기 여행 가는 거 어때?


나는 바로 가자고 했다. 이 기세를 몰아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주말에 H와 하이킹도 가기로 했기에 다가오는 날들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벤치에 앉아 음악을 감상했다가, 책도 읽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것 같아 이내 도서관에서 책을 마저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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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지혜 작가님의 책을 읽다가 요즘 내 고민들, 내 상황에 들어맞는 구절이 나와 아이패드 필사 노트에 적었다. 이곳에 오면서 잠시 다른 사람들의 1을 흘끔흘끔 봤었는데 이내 나만의 1에 집중하기로 결심했었다. 결심하자마자 이런 문장을 보니 내면에 단단함과 평화로움이 동시에 찾아왔다. 나도 작가님처럼 내 생각을 나만의 언어로 풀어내고 싶다. 작가님의 언어의 온도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글의 온도이다.


저녁으로 Y 님과 함께 닭볶음탕을 요리하기로 했다. Y 님을 맞이하기 위해 1층 기숙사로 내려갔는데 꽃을 들고 계셨다. 나를 위한 선물이라며 준비하신 것이다. 꽃 선물은 언제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선물이다. 붉은 장미꽃을 보니 내 마음도 같이 화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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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으로 요리해 보는 닭볶음탕이었다. 이곳에 오면서 만든 대부분이 처음 시도해 보는 요리들이었지만, 닭볶음탕 같은 거대한 메뉴는 더더욱 처음이었다. 레시피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최근에 사서 생각한 메뉴였는데 생각보다 과정이 어렵지 않았다. 닭과 감자가 익는 데 시간이 걸려 애를 먹은 것 빼고는 먹음직스럽게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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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이러한 특별한 요리를 만들 때마다 요리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는 다소 거만한 생각을 한다. Y 님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뿌듯했다. 동시에 앞으로도 다양한 요리를 도전해 보고 싶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닭볶음탕이 매워서 혀가 살짝 아렸는데 Y 님께서 아이스크림을 갖고 오셨다. 꽃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센스 넘치는 선물들을 갖고 오시다니, 이런 게 바로 사회인이 가질 수 있는 어른의 여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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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 님과는 6살 차이 정도가 나지만, 나이 차이에 대한 벽이 느껴지지 않는다. 불과 1주일 전에 처음 알게 된 사이인데도 어색하지 않다. 삶에서 때로 계속 마주쳐도 어색한 사람이 있는 반면, 처음 만나자마자 코드가 들어맞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사귈 때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기에, Y 님과 있는 자연스러운 순간들에 부담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후식까지 먹고 Y 님 기숙사도 구경할 겸 같이 밖으로 나갔다. 다음에도 맛있는 한식 요리를 하기로 약속한 뒤, 우리는 헤어졌다.


바로 기숙사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완벽했던 하루를 여운 있게 끝내고 싶어 밤거리를 발걸음이 이끌리는 대로 누볐다. 음악을 들으면서 밤 산책을 하니, 술에 살짝 취했을 때처럼 신나는 기분이 올라왔다. 하루가 유독 길었던 이날은 신기하게도 행복으로 채우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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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8. 화요일


아침 9시 수업을 처음으로 듣는 날이었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임을 체감했다. Lecture 강의를 듣고 곧바로 세미나를 들어야 해서 비몽사몽 다음 강의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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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누군가 내 뒤를 툭툭 건드렸다. 누구지 하고 뒤돌아보니, 지난주 Korean Society에서 봤던 동갑내기 J였다. 당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J와 내가 같은 과임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수업까지 겹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알고 보니 서로 시간표 변동이 생겨 이 수업을 듣게 된 거였다. 예상하지 못한 시간표 변동으로 한국인 친구와 같은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어 기분이 좋아졌다. 수업이 끝난 후, J에게 이번 주 K-pop 파티에 갈 거냐고 물었다. J는 티켓을 끊었는데 주위 친구들이 다 안 간다고 해서 나는 같이 가는 건 어떠나고 물었다. J는 좋다고 말했다. 나도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혼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음속 자리 잡혔던 고민이 없어져 홀가분했다. 앞으로 같이 수업을 들을 친구이기도 하고, J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자연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음 주에 수업 끝나고 밥 같이 먹을래?"


그렇게 점심 약속도 잡은 채, 각자의 일정을 위해 헤어졌다. 나는 살짝 들뜬 마음으로 Western Bank Library에 들어갔다. 점심 약속이 2시에 있어서 배가 고팠지만 조금 참기로 했다. 대신, 가벼운 간식이라도 먹고 싶어 도서관 자판기에서 긴 고민 끝에 Pop Chip이라는 과자를 샀다. 기대를 안 하고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영국에는 비건 제품, 글루텐 프리 간식이 많은데, 건강한 맛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양하게 시도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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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dem 파트너인 Franchesca와의 2번째 만남이었다. 한식당이 궁금한 Franchesca를 위해 우리는 셰필드에 있는 유명한 한식당 Pocha에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했다. 식당까지 가는 길이 어색했다. 매일 보는 사이도 아니고, 이제 2번째이기에 자연스러운 어색함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 않고, 어떤 성격인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일까. 무엇보다 외국인 친구와 소통하고 'hang out'하는 게 어색했다. 그렇게 식당에 도착해 떡볶이와 치즈 계란말이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보는 밑반찬 세팅이었다. Franchesca는 이때 처음으로 김치를 먹었다. 첫 한국 음식을 한국인인 나와 같이 먹어본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서툴게 젓가락질을 하며 떡볶이와 김치를 먹고 매워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처음은 항상 낯설어서 긴장되지만 동시에 긴장되는 순간이다. 두 개의 감정이 Franchesca의 얼굴에서 보여 흐뭇하게 바라봤다. 식사를 하면서 Franchesca가 한국을 좋아하게 된 순간을 들었다. 한국 웹툰으로 처음 한국 미디어 매체를 접하게 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케이팝과 K-드라마에 빠졌다고 한다. 그 나라의 언어로 미디어 내용을 이해하고 싶어 한국학과를 전공하게 되었다는 Franchesca의 여정을 쭉 들었다. 우리나라 콘텐츠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면서도 멋있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일에 파고들다 보면 자신만의 길이 개척되는 것 같다. 나 역시 케이팝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Franchesca와 통하는 점이 많았다. 밥을 다 먹고 나서도 1시간 동안 떠들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어색함은 사라지고 편안함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Franchesca는 근처에 있는 쿠키 집에서 쿠키를 먹는 건 어떠냐고 물었고 우리는 디저트로 쿠키 가게에 들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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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영업해서 가게 이름이 'Insomnia Cookies'였다. 따뜻하고 쫀득한 츄러스 쿠키를 먹었다. 오랜만에 달달한 음식을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셰필드에 와서 제대로 외식을 한 적이 없었는데 이날 본식부터 디저트까지 완벽했다. Tandem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친구로서 놀았던 하루였다. 쿠키를 먹고 Weston Park 벤치에서 잠시 푸른 날씨를 만끽했다. 벤치에서 나눴던 대화 중 Franchesca가 공원에 돌아다니는 다람쥐들이 사실은 생태계 교란 생물이라며 작은 'red squirrles'들이 줄어든 원인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Franky의 언어로 그들은 'evil squirrles'였다. 그 이후로 공원에서 다람쥐들을 보면 속으로 나도 'evil squirrles!'라고 외치는 습관이 생겼다. Franky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아갔다. Franky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친구이다. 얼굴에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대화하다 보면 귀여워서 피식 웃게 된다. '순수하다', 그리고 '진솔하다'는 수식어가 떠오른다. 앞으로 Franky와의 만남이 더욱 기대된다. 어색함이 지나고 나면 인간관계 사이에는 편안함이 찾아온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찾게 될 때. 그때 나는 상대에 대한 애정이 급속도로 생긴다. 먼저 무언가를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하게 되고, 빈도는 적더라도 지속적인 만남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진다. 이번에 Franky와 친해지면서 다시 한번 내가 사람을 사귀는 방식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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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불렀지만 Emily의 음식 솜씨 덕분에 든든하게 저녁 배도 채울 수 있었다. 쌀 식감의 로제 파스타였다. Shared night 때마다 플랫 메이트들이 무슨 음식을 할지 기대하면서 주방으로 들어선다. 밥을 먹으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 앞으로 가고 싶은 여행지, 각자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한다. 이전까지 내 인간관계는 한국인과 한국 문화까지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면, 이곳에 오면서 다른 나라 친구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함께 볼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자극들이 머릿속에 들어온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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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9. 수요일


새로운 자극들을 마주하느라 쓴 에너지를 이날 오전과 낮에 다시 충전했다. 내일에서 금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는 K-Pop party도 있고 곧바로 금요일에 맨체스터 여행을 떠나야 했기에 이때부터 에너지를 충전해야 했다. 오후에는 H와 맨체스터 여행 그리고 12월에 떠날 유럽 여행을 위해 잠깐 만났다. H가 차에 우유를 타 먹으면 맛있다고 하며 차를 타줬는데 번쩍 눈이 뜨였다. 차만 마셨을 때는 씁쓸한 풀 맛을 먹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는데 우유를 타니 씁쓸한 맛이 부드러워지면서 내가 음료를 마실 때 좋아하는 고소한 맛이 났다. 이날을 기점으로 나도 차를 사서 우유에 타먹어야겠다는, 차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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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리셉션에서 무료로 과자를 나눔 하길래 별생각 없이 가져가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슬그머니 리셉션에서 2개를 더 집어왔다. 방에 차곡차곡 쌓아둔 간식 꾸러미들을 보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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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으로는 냉장고 털이를 했다. 가족들이랑 함께 살면 냉장고 털이를 할 동기가 없는데, 혼자 살다 보니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을 얼른 처리해 버려야겠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이런 게 자취생인 걸까. 뭐든지 맛있기만 하면 되는 나는 냉장고 털이 음식도 기분 좋게 먹었다. 흑백 요리사 새로운 에피소드를 보며 매일 찾아오는 식사 소확행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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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0. 목요일


일주일에 4번 아니면 5번 정도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는데, 이날은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슬쩍 거울 앞에서 오운완 인증샷을 남겨봤다. 사실은 운동 완료가 아닌 운동 시작을 담은 모습이지만. 아침에 운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하루의 시작을 운동으로 시작하면 몸이 더 가벼워지고 생기가 가득 돈다. 근력 운동 후 유산소로 마무리하는 어느 때와 다름없는 루틴을 끝낸 후 등굣길을 나섰다.


Family 과목 첫 세미나 수업이었다. 세미나 수업은 'The Wave' 건물에서 들었는데, 건물 모양이 특이하고 예뻐서 괜히 마음에 들었다. 카페테리아도 공부하기 좋아 보이던데, 나중에 한 번 카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미나 수업은 확실히 토론 위주 수업이라 Lecture에 비해서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조별로 가족 형태의 변화를 타임라인으로 표현해야 했다. 읽기 자료를 꼼꼼히 읽은 덕분에 조에서 가만히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의견과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었다. 완벽한 성적을 받기 위해 수업을 들어야겠다는 마음가짐은 없지만, 수업 시간에 배우는 내용과 참여하는 활동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은 의지는 강했다. 읽기 자료를 읽는 이유는 수업에 대한 대비이자, 영어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1시간 세미나는 금방 끝났고, 나는 다시 기숙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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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하는 길에 처음 교환학생 OT를 진행했던 Firth Court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에 딱 알맞게 단풍잎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순간 여행객이 된 것 마냥 길에 멈춰 서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겨울이 되면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건물을 할퀴고 있으려나. 짧은 상상을 마친 뒤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밤에 있을 파티와 바로 다음 날 아침 맨체스터로 여행 갈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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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shared cooking을 해야 해서 점심까지 요리를 제대로 해 먹기가 귀찮았다. 대충 냉장고에 있는 베이글과 야채, 햄, 치즈를 접시에 담고 샐러드 소스를 뿌렸다. 그래도 든든하게 먹고 싶어 뮤즐리도 옆에 추가했다. 영원한 나의 밥 친구인 강식당을 틀어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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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오후 5시 반이 되었고, 공동 주방으로 가서 요리를 시작했다. 지난번에 닭볶음탕을 요리하기 위해 당근이랑 양파, 닭다리가 남았는데, 이 재료들을 활용하고 싶어 볶음밥을 선보이기로 했다. 3인분은 처음 만들어봐서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볶는 시간보다 재료 손질하는 시간이 더 오래 결렸던 것 같다. 이때 닭다리 살을 손질하는 데 애를 먹었다. 영상 보면 슥슥 칼로 잘 썰어지는 것 같았는데 직접 해보니깐 너무 질기고 미끈거리는 것이다. 머릿속에는 뼈만 남은 닭다리를 생각했는데 어느새 눈앞에 살이 아직 덕지덕지 붙어 있는 닭다리뼈만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또 요리의 현실을 배운다.


Emily와 Nicholas 모두 이날 저녁에 시간이 안 돼서 락앤락 통에 담아줬다. 엄마의 마음이 이런 기분일까. 잘 먹었으면 좋겠다는 얕은 소망과 뿌듯함이 함께 밀려왔다. 나는 밤에 파티에 가기 전 J와 얼마 전에 안 동생 N과 맥주를 마시기로 해서 평소보다 가볍게 저녁을 먹었다. 굴 소스와 간장만 있으면 맛은 보장된다. 실제로 2시간 뒤쯤, Emily가 왓츠앱으로 맛있다고 메신저를 남겼는데, K 볶음밥 맛을 잘 전한 것 같아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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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화장하고 준비하다 보니 벌써 10시가 되었다. 부랴부랴 과자를 챙기고 5층으로 올라갔다. J와 N이 반겼다. 텔레파시라도 보낸 듯, 각자 과자를 들고 왔다. 원래 미리 만난 목적은 파티에 가기 전 조금이라도 술기운을 얻기 위함이었지만, J와 N과 3주 동안의 교환 생활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한국인과 교환학생이라는 공통점만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불과 2주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이였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친해질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J와 N뿐 아니라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인연들이 그렇다. 낯선 타지에 '살아가면서' 겪는 공통된 감정들을 서로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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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쯤 밖으로 나섰다. 학생회관 지하에 있는 클럽 Foundary에 들어갔고, 고도로 흥분되어 있는 파티장에 합류했다. 의외로 외국인이 훨씬 많았다. 외국인들이 한국 노래를 떼창하고 무대 앞에서 안무를 격렬하게 추는데, 나만큼 케이팝 노래에 진심인 게 느껴졌다. 나의 탠덤 파트너 Franky도 만났는데, 평소 수줍음이 많은 성격과 정반대로 친구들과 춤을 추며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Franky랑 지난번에 대화하면서 케이팝 안무와 노래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는데, 실제로 춤추는 모습을 보니 이 친구의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악이 있는 광란의 현장에는 떼창을 할 수 있을 때 즐거움이 배가 된다. 아는 노래가 대부분이었기에 떼창을 하며 파티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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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어느덧 새벽 2시가 되었고, 내일을 위해 나가야 했다. J와 N도 이 정도면 충분히 즐긴 것 같다며 함께 나왔다.


기숙사 방에 오자마자 모든 허물을 스르륵 벗었다. 편한 잠옷으로 입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3시간밖에 자지 못하지만 여행 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한국에서는 절대로 시도하지 않을 스케줄이다. 이곳에 와서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접하고 말겠다는 욕망이 나의 유유자적한 성향을 잠깐 바꾼 게 아닐까 싶다.



2024.10.11. 목요일


이 날은 H와 맨체스터로 훌쩍 여행을 떠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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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2. 토요일


목요일 밤부터 시작해서 금요일까지 달린 여파로 에너지가 모두 방전되었다. 이제는 주기적인 루틴이 된 빨래를 해준 후, 방에 콕 박혀서 침대와 한 몸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H와의 하이킹 여정이 또 있었기에 혼자만의 공간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2024.10.13.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주섬주섬 운동복과 바람막이 잠바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후 밖을 나섰다. H와 Peak District Park에서 등산 겸 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지난주에 내가 제안한 여정이었다. 공원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했는데 버스 시간표가 정확하지 않아서 우리는 정류장 앞에서 어리둥절한 채로 서 있었다. 다행히 시간표에 적힌 시간에서 10분 뒤쯤 버스가 왔고, 머리를 긁적이며 버스를 탔다.


공원에 도착하니 날씨가 급격하게 추워진 것을 몸소 느꼈다. 너무 얇게 입고 왔나 걱정이 됐지만, 일단 알아둔 하이킹 코스 입구까지 씩씩하게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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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초반에는 한국 등산길을 연상하게 하는 울창한 숲들이 우리를 반겼다. 숲만 봤을 뿐인데도 우리는 신나서 땅 위를 방방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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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등산길을 오르면서 H와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우리가 이상한 길로 빠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무리 유럽 하이킹이라지만, 길 같지 않은 길만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꿋꿋이 쓰러진 나무를 건너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다가 도저히 이 길은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 아님을 깨달았다. 옆을 보니 멀쩡히 걸어갈 수 있는 길이 보였다. 다만 꼬불꼬불한 철장으로 담을 쌓아놔서 넘어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결국 지났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며 지도를 다시 살폈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하산하고 있는 두 여자 등산객과 마주쳤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며 핸드폰으로 가야 할 하이킹 코스를 보여주며 길을 물어봤다. 알고 보니 두 여자가 서 있는 쪽으로 넘어가서 올라가야 했던 것이다. 낮은 담장이 있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낮은 담장을 넘어가는 게 코스의 일부분이었다.


"아니, 우리 둘 다 길이 아닌 곳을 올라가면서 유럽 하이킹은 원래 이런 거겠지? 하고 합리화한 게 너무 웃겨!"


"그니까, 막 쓰러진 나무 넘어가고 철장 담장 넘으려고 하고."


길을 헤매도 이 또한 추억이라 생각하는 나와 H다.


몸을 움직이다 보니 하이킹 입구에서 느꼈던 추위는 어느새 사라졌다. 모든 등산이 그렇듯, 가파른 오르막길 끝에는 항상 눈부신 전경이 수고를 달래준다. 정상에 다다를 때쯤 뒤를 돌아봤는데, 영국의 들판과 호수가 아름답게 수놓아진 풍경이 눈에 꽉 찼다. 우리는 연신 감탄을 했다. 자연 풍경을 바라보는 게 너무나도 좋다. 세상이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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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까지 오르니 세상이 더 작게 보였다. 세상은 작게 보였지만, 나라는 존재도 작게 느껴졌다.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다. 내가 세상의 쌀알과도 같은 존재임을 체감할 때, 평소에 가지는 고민들이나 불안함이 모두 별것이 아니라는 대담함을 가지게 된다. 하이킹이나 등산은 삶을 당당히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


피크 디스트릭트 하이킹도 식후경이라고, H와 약속했던 대로 각자 도시락을 싸와서 정상에서 먹었다. 그 어떤 식당이나 카페가 부럽지 않은 최고의 뷰 맛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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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 먹는 도시락의 묘미는 서로 갖고 온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H에게 계란을, H는 자신의 사워도우 샌드위치를 한 입 나눠줬다. 풍경을 보면서 멍 때리는 순간, H와 나눴던 이야기들, 음식의 맛까지 모두 기억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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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조금 더 올라가니 거대한 평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평지 옆으로 보이는 풍경은 저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정상이라 그런지 아까보다 훨씬 추워졌다. H에게 내색은 안 했지만 이때 너무 추워서 몰래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난다. 크롭 긴팔 티에 고작 바람막이 잠바 하나 걸쳐온 내 손 때문이다. 괜히 꾸민 듯 안 꾸민 패션을 고집하다가 추위로부터 매섭게 혼났다.


H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등산하고 하산했다. '이런저런'은 정말 이런저런을 의미한다.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 주제가 흘러가는 얘기들. 산을 보면서 한국에서 등산했던 이야기, 하산하고 막걸리에 파전 먹는 게 로망이라는 이야기, 자연스럽게 학교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대학생 친구들과의 추억도 이야기하고, 가족 이야기도 하면서 서로가 지닌 짙은 색깔을 공유한다.


하산하면서 우리가 중간에 길을 헤매서 넘으려고 했던 담을 다시 목격했다. 이것 또한 추억이니 사진을 남기자고, H는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나중에 한국에서 교환 생활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볼 때 꼭 나올 이야기 조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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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을 완료했지만, 버스 도착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주위를 둘러봤다. 긴 다리를 건너면서 호수를 볼 수 있는 길이 있어 즉흥적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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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구글 지도가 하라는 대로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을 따라서 갔더니 정류장이 안 보이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펍에 들어가서 직원에게 물어봤다. 직원은 덤덤하게 왼쪽으로 가면 나올 거라고, 몇 분 안 걸린다며 다시 자기 일을 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나왔다. 밖이 너무 추워서 얼른 버스를 타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갔던 길을 다시 가보기로 다짐하며 하염없이 걸었다. 다행히 정말 버스 정류장이 나왔고, 10분 정도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했다. 따뜻할 거라고 기대했던 버스 안이 제법 쌀쌀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방 안 전기장판을 상상하며 창문 밖 풍경을 멍 때렸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히터를 켜고 전기장판 전원을 켰다. 씻고 나왔을 때 곧바로 뜨끈한 침대 속으로 다이빙하기 위한 예열이다. 하이킹할 때는 무조건 방패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단단한 겉옷을 챙겨 입고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도 얼린 몸이 녹는 기분은 짜릿하다. 나른한 기분으로 사진첩을 정리했고,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렸다. 금요일과 일요일, H와 기분 전환을 제대로 했다. 여행에 대한 열정이 재정비되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더 많은 곳을 탐험하고 싶다. 적응에 대한 불안감은 모두 사라진 채, 순도 백 퍼센트의 즐거움과 기대감이 내 교환학생 생활을 채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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