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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n 29. 2022

요즘 뭐하고 지내십니까?

갑자기 눈이 떠져 시계를 보니 여섯 시 반이다. 순간적으로 살펴보니 정신은 맑고 몸도 개운하다. 긴 겨울잠을 잔 것처럼 모처럼 충전된 아침이다. 당장 일어나도 전혀 피곤할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일어나서는 뭘 한단 말인가. 출근할 직장도 없고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도 없다. 그저 반복된 루틴에 따라 늘 걸려있는 김광석 시디를 틀고, 진하게 탄 커피를 마시고, 그리곤 책을 읽거나 혹은 동네를 산책하는 일을 하게 되겠지. 그러니 굳이 새벽부터 서두를 필요는 없다. 지금 일어나 긴 오전을 보내면, 더 긴 오후는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막막하지 않겠는가. 순간적인 결론은 다시 잠드는 것이다. 억지로 자는 잠은 온갖 복잡한 꿈으로 힘들고, 두 시간쯤 후에는 매우 피곤한 두 번째 아침을 맞게 된다.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지만 시간을 벌었다. 아니, 시간을 소모했다. 종종 과도한 자유가 부담스러운 것처럼, 그저 동네 김 씨인 나에겐 주어진 잉여 시간들이 짐이 되어 버렸다.


“요즘 뭐 하고 지내십니까?” 은퇴하고 난 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그냥 식사하셨느냐 정도의 인사말이겠지만, 어쨌든 질문이니 답이 궁하다. “뭐 그냥 빈둥거립니다. 백수가 뭘 하겠어요.” 스스로도 만족스럽지 않지만 어려운 상황을 농으로 벗어나려는 자조적 대답. 좀 더 모범적으로 “책 읽고 음악 듣고 운동하고 그렇게 지냅니다.” 역시 만족스럽지 않다. 이런 대답을 듣는 사람은 “아 그러세요. 부럽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빠르게 나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은퇴하고 나서 거의 매일 아침에 집 근처 헬스장으로 출근했다. 시에서 운영해서 그런지 등록비가 저렴했고 나 같은 늙은이가 운동하기엔 충분한 시설이었다. 러닝머신과 근력운동 몇 가지면 충분했으니까. 게다가 운동 후 샤워를 할 수 있어 하루가 개운해지는 즐거움이 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가다 보니 늘 만나는 사람들이 생겼다. 안 보이면 궁금하고 걱정되고 서운할 정도로 이미 가까운 사이가 된 것이지만, 서로 인사도 없고 말을 건네거나 눈을 마주치는 일도 없다. 샤워장에서도 늘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 헬스장의 터줏대감인 듯한, 내 나이 또래인지 위인지 아래인지 그 정도 될 것 같은, 운동으로 다져진 다부진 몸매의 사내가 있다. “이 시간에 운동하시는 걸 보면 사업하시나 봅니다.” “ 네?” 그러니까, 자기처럼 한량한 사장이냐는 질문이다. 오전에 운동하고 오후에 일터를 한 번 둘러보는 사장들이 많다. “아, 아닙니다.” “아, 네.” 여유로운 사장도 아닌데 매일 오전에 운동하러 오는 사람은 뭐냐는 듯한, 나의 공연한 자격지심으로 예단한 그 남자의 실망감이 느껴진다. “얼마 전에 은퇴해서 지금은 그냥 쉬고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는데 궁색하다. 종종 제자들이 전화를 해서는 요즘 뭐 하고 지내시냐고 묻는다. 매번 궁색하고 똑같은 답변을 한다. “뭐 그냥 백수지.”


늙었음을 인정하게 되면서 매일 반복되는 고민은 내 인생의 마지막 챕터를 어떻게 의미 있게 살아야 하는가였다. 연극의 1막 1장이라면 괜찮다. 좀 실수하고 재미없어도 클라이맥스에서 보란 듯이 반전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까. 아니 연극의 중반이라도 괜찮다. 멋있게 감동적으로 끝낼 가능성이 남아있다. 그런데, 연극의 마지막 챕터라면,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마지막 챕터가 재미없다면 그 연극은 망한 거다.


평생 버릇인지라 요즘도 새벽 두세 시가 넘어야 잠을 청한다. 가장 정신이 맑은 시간인지라 젊었을 때는 이 짧은 시간에 공부하고 숙제들 처리하고 책 읽고 정말 열심히 새벽을 살았다. 지금은 공부도 안 하고 해야 할 숙제들도 없는데, 이 아름다운 새벽 시간에 잔다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라 우기면서 버티다가 결국 두세 시를 넘기면 비로소 안도감으로 잠을 청한다. 하루의 대부분을 낭비하는 것엔 무심하면서, 마지막 몇 시간에 이리도 집착하고 죄책감을 느끼다니, 모순이며 일관성 부재라는 것도 잘 안다.


사실 요즘 하는 일이 많다. 아침에 일어나면, 키우는 세 마리 강아지들 밥 주고, 아이들이 밤 새 저질러 놓은  똥과 오줌 치우고, 아이들 마시는 물 새것으로 갈아주고, 실내 배변을 안 하는 큰 놈 산책시키고, 그다음에 작은놈 둘 같이 산책시키고, 그 후에 커피 한잔으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번엔 혼자 동네를 걷는다. 한 40분 정도. 점심에는 갑자기 모시게 된 늙은 노모의 밥을 차려주고, 다리 힘이 너무 빠지지 않도록 산책을 시켜드린다. 그럼 오후가 되는데 그저 김 씨이므로 갑자기 할 일들이 없으니 나른해져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한다. 음악을 틀어놓고 책을 읽기도 하고, 되지도 않는 피아노 연습을 해보고, 일본어 공부도 해본다. 목표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러나 너무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자책감을 갖지는 않으려는 형식적인 행위들이다. 저녁이 가까우면 다시 첫째를 산책시켜 배변을 해결해주고, 노모의 저녁을 차려주고, 설거지를 한다. 아들과 며느리는 다르다. 일하느라 바쁜 아내가 자신도 늙었는데 갑자기 더 늙고 병든 시어머니가 집에 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 것인지 충분히 이해되어 아내의 눈치가 보인다. 나에겐 엄마지만 아내에겐 시어머니 아닌가. 가부장적 사내로 살아 평생 하지 않던 설거지를 하고 나면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눈치가 조금은 줄어든다. 


저녁을 먹고 나면 비로소 여유로운 내 시간이다. 그렇지만 뾰족이 하는 일은 없다. 읽던 책을 읽고, 하던 일본어 공부와 여전히 되지도 않는 피아노 연습을 하고, TV를 보면서 하루의 남은 시간들이 소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실내 배변을 안 하는 첫째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나면 오늘의 할 일들은 정말 끝이다. 그리고 너무 일찍 잠들어 밤의 시간을 낭비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그저 버티다가 새벽 두 시가 되면 안도하며 침대로  기어든다. 그리고 내일도 차별 없는 또 하루가 반복될 것이다. 모레도, 그다음 날도.


어린아이를 키우면서 집안일을 하는 엄마들이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온종일 쉴 틈도 없이 뭔가를 계속했는데, 자랑도 보람도 없이 도대체 내 인생이 뭔가 하는 좌절과 우울. 내 인생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묻는 자괴감. 그나마 자식이니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기쁨과 의미를 느끼기도 하겠지. 게다가 자식은 성장하면서 독립하나 병든 노모와 짐승들은 죽을 때까지 돌봐야 한다. 그러나 종일 바쁘고 자신만의 시간을 고대하다 막상 그런 시간이 주어지면 무엇을 할지 몰라 당황하며 그저 나만의 시간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잠시 버티다가 결국 잠드는 삶.


노모와 강아지들을 돌보는 일은, 어린 자식들을 키우고 집안일 하는 것처럼, 아무리 바쁘고 힘들고 열심을 다해도 의미 있는 삶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요즘 뭐 하세요?” “아, 네 강아지 셋 기우고 늙은 어머니 돌보며 지냅니다.” “네, 아기 둘 키우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하고 그렇게 지냅니다.” 이런 일들은 그 어떤 일들보다 더 큰 노력과 인내와 성실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대답하는 사람도 물었던 사람도 아무 감동이 없고 오히려 자괴감과 무관심이 더 자연스럽다. 할 일 없는 은퇴자, 온종일 집안일하는 주부, 매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빈 병과 폐지를 줍는 가난한 사람들, 종일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들, 그냥 집에서 방 안에서 하루를 보내는 많은 사람들. 이들에게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는다면 도대체 뭘 어떻게 대답하라는 말인가.


내가 아니면 삶의 질이 바닥이 되어버릴, 아니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운, 절대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들을 먹이고 돌보고 사랑하는 일이, 정말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돈 되는 사업을 하고, 선생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혹은 인기 있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되는 것보다 의미 없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건 삶의 의미는 타인에게 얼마나 인정받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그 외에도 수많은 일들을 하는 주부를 칭찬하고 인정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간혹 착한 남편과 간혹 조숙한 자식들 정도. 유기견을 키우면 칭찬받지만 그저 자기가 산 강아지들과 그리고 그저 자신의 늙고 병든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의미 있는 삶이라 손뼉 쳐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역시 타인이 알아주는 삶이어야 의미 있는 삶인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아무리 힘들게 열심히 살아도 내 삶은 아무 의미 없는 삶이다.


그렇다. 인정하기 싫더라 현실에서 의미 있는 삶이란 결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삶을 알아주고 인정해주고 부러워하는가에 달려있다. 내 삶의 의미는 타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 있는 삶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은 사실은 진실되지 못하다. 온종일 어린애들 키우느라 고생하고, 온종일 강아지들 키우느라 고생하고, 온종일 병든 노모나 혹은 남편 병간호하느라 고생하고,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어야 해서 종일 몇 개의 알바를 하느라 고생하고, 끝없는 노동의 연속인 농사일 하느라 피부는 상하고 허리는 굽고, 그냥 음악이 좋은 건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배 곪는 무명가수로 살아가는 고통. 스스로 의미 없는 삶임을 알아 힘들고 괴롭다. 슬프다. 그건 아무도 알아주지도 칭찬해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내 삶의 의미를 타인이 결정한다는 슬픔이다. 그래서 삶의 진정한 의미는 인정받고 위로 받음이다.  


“요즘 뭐 하고 지내십니까?” 이런 상투적인 질문에 김 씨는 뭐라 자신 있게 대답하기 힘들고 우리 주위엔 김 씨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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