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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l 01. 2022

대학가 여자

아침에 이미 의무 산책을 했지만 또 집을 나섰다. 오늘처럼 조금 더 우울하고 조금 더 겁이 나면 가까운 대학 근처로 간다. 젊은이들의 생동감과 열정, 밝은 표정과 웃음이 내게도 전염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매일 걷는 길에는 인적이 드물다. 그나마 중간중간 벤치에는 내 또래 혹은 나보다 더 늙은 노인들이 시체처럼 앉아있다. 할 일도 갈 곳도 없이 그저 남아있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 늙은이에게서 무슨 웃음과 열정을 찾겠는가. 적어도 집에 있는 것보다는 숨쉬기가 더 편할 뿐이다.


오늘도 대학가에서 여자를 봤다. 그러고 보니 갈 때마다 보는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대학가를 찾는데 그 여자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것 같으니, 그녀는 늘 거기 있는 것이다. 한 동안은 여자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는데, 언젠가부터 매우 낯익은 얼굴과 몸짓이 눈에 들어왔다.


40대 즈음일까. 작고 까만 안경을 쓰고 외모도 옷차림도 보잘것없다. 그곳의 주인공들인 젊은이들 대부분은 그 여자에게 아무 관심도 갖지 않을 것이고, 몇몇은 나처럼 힐끗 쳐다볼지도 모른다. 그리곤, 조금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가 정도 생각하면 그게 끝이다.


여자는 항상 분주하다. 끈 있는 작은 가방을 어깨에 메었고, 한 손에는 늘 차가운 음료가 있다. 한 곳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분주히 몸을 움직이니 뜨거운 음료는 불가할 것 같다. 벤치에 앉아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과 달리 그 여인은 쉬지 않고 걸으면서 뭔가 생각하거나 어딘가를 찾는 척하거나 혹은 누구하고 전화를 한다. 그러고 보니 전화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여자의 주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아니, 봤다. 오늘은 음료 대신 무슨 과자봉지를 들고 있다. 그리곤 또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누구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다가, 어쩌면 전화기는 꺼진 채 혼자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여자다. 그런 생각을 하려니 그녀가 전화를 하면서 웃는다. 그러나 그것도 혼자 하는 연극일 수도 있다.


여자가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이들이 사는 곳에 찾아와서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고독과 두려움을 잊으려는 것일까. 그리고 여자는 나보다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초라함과 괴기함을 맘껏 드러낸다. 난 가끔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에 들어가고 싶어도 그 안에 가득한 젊은이들이 나의 등장에 얼마나 놀랄지를 예상하곤 그 어색함과 미안함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포기한다. 그녀라면 어떻게 했을까.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나도 뭔가 핸드폰을 보는 척하며 그녀가 무슨 통화를 하는지 엿들어보려 했다. 계속 말을 한다. 일본말 같기도 하고 사투리 같기도 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더 접근하고 더 오래 버티면 여자가 나를 의식해버릴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대학로에서 그녀를 만나는 게 서로 어색해질 수 있다.


대학가를 방황하는 두 사람. 여자는 멀쩡한 나와는 다르게 정신이 이상하고 불쌍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우리는 똑같다. 대학생들이 볼 때 나도 그녀처럼 초라할 뿐이고 그 어떤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어쩌면 더 늙었으니 더 초라한 존재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젊음은 얼마나 늙었는가로 늙음을 평가절하하곤 하는 법이니까.


여자가 궁금하다. 그녀도 내가 궁금할까. 대학가에서의 이방인들이니 분명 그녀의 눈에 내가 구분되었을 것이다. 초라하고 불쌍한 남자라고 여겼을까. 아니, 그냥 나를 인지하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모든 사람들은 배경에서 희미하게 지나가고 있고, 단지 그녀와 나만 초점 속에 서 있는 영화의 흔한 장면이다. 그런데, 사실 그곳에서 배제된 사람은 그 여자와 나, 단 둘뿐이다. 그곳에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들. 그녀와 나는 각자 대학가에서 만나는 그 누구보다 더 아프고 더 슬픈 사연들을 많이 가지고 있건만, 젊음이 가득한 세상은 그 따위 것들에 아무 관심이 없다.


다음 날 또다시 대학가로 갔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여자를 보기 위함이다. 오늘도 거기 있을까 확인하기 위함이다. 조금 이른 게 아닐까. 어쩌면 매일 나와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을 하며 여자가 주로 머무는 곳을 향해 걸어가자니 뭔가 설레기도 하고 걱정도 생긴다. 여자의 모습을 발견하면 어떤 작은 확률의 일이 일어났을 때의 전율을 느낄까. 만일 여자가 없으면, 그냥 허무할 것 같다.


여자의 장소가 가까워지자 그녀가 거기에 있다. Subway 앞 버스 정류장이 그녀의 장소다. 그곳에서, 반경 십여 미터나 될까, 벗어나지 않는다. 오늘은 오로지 그녀를 보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니 관찰을 해 보련다. 키는 150 정도나 될까. 여전히 그 특유의 검은테 안경을 썼고, 일회용 컵의 음료를 다 마셨는지 정류장 옆 쓰레기 더미에 던져 버린다. 거침없이 씩씩하다. 팔자걸음이었구나. 잠시 버스를 기다리는 척하면서 여자를 관찰했다. 변함없이 핸드폰에 이어폰을 연결해서 한쪽 귀에 꽂고 있다. 데이트 중인 젊은 남녀를 향해 돌진하다 갑자기 돌아선다. 그 청년들은 조금 놀란 듯도 하고 그냥 관찰대상으로 여기는 듯도 했다. 여자가 갑자기 나에게 돌진하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금 더 걸어가다 뒤돌아 다시 여자를 향해 걸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만 느끼는 벽이 있는 것처럼 그 작은 공간 안에서만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여전히 무슨 말을 한다. 갑자기 와우! 작은 소리를 지르면 손을 들어 올린다. 뭔가 재밌는 걸 듣고 있었던 건가. 감동적인 노래를 듣는 건가. 아니면 그냥 행복한 건가.


여자는 나보다 용감하고 행복하다.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불쌍하다고 여겨도 즐겁고 행복하다. 나를 잘 모르는 가까운 사람들이 부족한 게 없다고 여기는 나는 사실 아주 많이 외롭고 슬프다. 웃어본 적이 언제던가. 들떠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없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법이 없고, 잠들어 삶을 잊는 게 기다려진다. 그런데, 그 여자는 웃는다. 소리 내어 떠들기도 한다.


오늘 여자를 보러 다시 대학가를 찾았다. 시간이 늦었고 더웠으므로 그녀를 못 볼까 걱정도 되었으나, 그 여자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못생겼고, 촌스럽게도 초록색 원피스를 입었고, 똒같은 까만 핸드백을 어깨에 멨고, 까만 양말에 군청색 운동화, 오른손에는 역시 무슨 음료수, 그리고 왼손으로는 이어폰이 연결된 핸드폰을 보고 있다. 그런데, 늘 멈추지 않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던 그녀인데, 오늘은 상가 앞 계단에 앉아있다. 더워서 힘든 건가. 사는 게 힘든 건가. 아픈가. 평소 같지 않은 너무나도 조용한 모습에 걱정이 들었지만,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는 정든 그 여자를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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