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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l 07. 2022

나의 장례식

죽음은 산 자들만의 잔치

가까운 친구가 죽었다. 림프종이라는 혈액암이란 걸 안지 대략 5년. 처음 3년은 암이라는 불안 속에서도 더 잘 먹고 더 많이 운동하고, 그래서 마음은 불안하고 몸은 건강했다. 그리곤 결국 목에 붙은 혹이 커져서 밥 먹기 힘들고 말하기가 힘들어져 할 수 없이 1차 항암을 했다. 의술이 발달해서 내가 알던 머리카락 빠지고 구토하는 그런 항암이 아니었다. 아무런 부작용도 없었고 예전의 건강한 목소리와 왕성한 식욕이 돌아왔다. 나도 그놈도 기분이 좋았고 전화하면서 같이 웃었다.


림프종이란 몹쓸 병은 1차 항암의 효과는 매우 높지만 재발률이 너무 높았는데, 내 친구는 1차 항암 후 6개월이 채 안되어 재발한 것 같다. 그때부터는 치료가 쉽지 않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 각본 그대로였다. 재발한 후 무슨 알약 항암제로 버텨보려 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결국 주치의는 본격적으로 항암치료를 시도했다. “좀 힘들 겁니다.”  일주일간 너무 멀쩡해서 “넌 마누라가 너무 잘 먹여서 항암도 너무 쉽게 버티는 거 아니냐”라고. “네가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님이 분명한데 마누라 복은 뭐 그렇게도 많냐”라고. 전화하면서 농담으로 포장한 진심을 전하던 것이 불과 두 달 전이었다. 진심이었다. 내가 아프면 내 아내는 결코 그렇게 지극정성 나를 간호할 리가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2차 항암의 부작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는 끝이었다. 폐에 물이 차서 이뇨제를 써서 빼내니 콩팥이 망가졌고, 독한 항암으로 혈소판 수치는 바닥이었고, 높은 염증 수치, 너무 낮은 산소포화도, 그리고 끝이 없는 검사와 약물 투여와 그리고 끝을 향한 고통. 결국 모든 장기가 망가진 거다. 폐, 간, 신장, 혈액은 너무 탁해졌고, 종양은 너무 커졌고 결국 모든 세포들이 병들어 죽어갔다. 


코로나로 두 딸도 아빠를 볼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 면회조차 불가한 나는 었으니 그저 친구의 부인에게 매일 전화해서 상태를 묻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를 할 때마다 너무 불안했다. 오늘은 좀 어떻냐는 매일 똑같은 질문에 오늘은 전혀 다른 대답을 들을까 봐. 새벽이든지 언제든지 갑자기 전화가 올까 봐 더 겁이 났다. 그럼 죽었다는 거니까. 목의 혹이 너무 커져서 통증이 심했고 식도를 막아 물도 먹을 수 없게 되었고 말은 물론 못 했다. 통증이 심해져 모르핀을 과도하게 쓰는 바람에 친구는 정신을 잃어 친구 아내가 말을 해도 알아듣는 것인지조차 모르게 되었다고 했다.


“오늘 이 사람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어요. 여보! 미안해!”  오랜만에 말을 했다고 좋아했건만, 그다음 날 친구는 죽었다. 그놈이 내게 그렇게 가까운 친구인지 몰랐다. 고등학교 동창이나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어 몰랐고, 대학은, 그 아이가 재수를 하는 바람에 또 잘 몰랐다. 군대에 다녀와 복학한 후, 그놈은 무슨 재주인지 군대도 안 가고 대학원생이었을 때, 비로소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 몇 남지 않은 고등학교 동창생이었으니 그때부터 친하게 되었나 보다. 대학 졸업 후 6년 정도 서로 연락도 없었다. 그러다 그놈은 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왔고, 내가 다니는 직장까지 따라왔다. 지금 생각하니 그놈이 날 좋아했거나 의지했거나 그런 거였다.


선생질하면서 사는 게 너무 싫던 차에 내 직장에도 명예퇴직 제도가 생겼다.  동료들은 모두 내가 1호일 거라 여겼고 난 그 기대에 부응하여 아무 고민 없이 정년보다 훨씬 일찍 은퇴를 했다. 퇴임식날, 그놈이 송사를 읽으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내 은퇴보다 그놈의 통곡을 더 기억했다.


친구의 아내로부터 마지막 전화를 받고 정신없이 차를 몰아 빈소로 향했다. 영정사진을 보는 순간 막을 수 없는 통곡이 쏟아졌다. 난 그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고 우겼지만, 오랜 시간의 동고동락이 결국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거였다.


장례식은 늘 산 자들의 잔치일 뿐이다. 죽은 이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 그리고 칭송과 눈물은 다 유족들과 고인의 지인들을 위한 작은 축제일뿐이다. 위로하고 위로받고 도리를 다했다는 자기만족, 그리고 유족들을 정신없이 만들어 미처 상실감이 얼마나 큰지 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이런 눈물과 추도와 잔치는 죽은 자의 것이 아니다. 진정 죽은 자를 위함이라면 죽음 전에 이런 장례식을 했어야 한다. 그래야 누가 나를 정말 좋아했고, 누가 내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누가 내 죽음에 무심하거나 자기를 위한 형식적인 예만을 갖추는지 알았을 것이 아닌가. 내 친구의 죽음에 가장 슬퍼했던 사람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던 한 졸업생이었다. 제주에서 살고 있는데 부고를 듣고 날아와서는 영정 사진을 보는 순간부터 통곡을 했더란다. 죽은 후 죽은 자의 영혼이 자신의 장례식을 본다는 따위의 위로는 진위와 상관없겠지만, 그 아이의 슬퍼하는 모습을 본 내 친구는 어땠을까. 감동했을까, 놀랬을까, 당황했을까, 아니면 행복했을까. 그 아이가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모두에게서 박해받고 힘들었을 때, 내 친구가 그랬단다. "이번 일로 네가 교장실로 끌려가면 내가 너하고 같이 가서 끝까지 싸울 거다."  


내 장례식을 보고 싶다. 내 죽음을 누가, 얼마나 슬퍼해주는지 알고 싶다. 나를 좋아해 줬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고 싶다. 장례식에 온 자들은 그래도 내 편일 가능성이 크니 그들의 슬퍼함은 죽은 내게 감동과 위로, 그리고 만족이 될 것 같다. 아내가 별로 슬퍼하지 않아도, 당연히 와서 슬퍼했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거나, 겨우 와서는 히득거리든지, 그런 건 상관없다. 내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해 주는 몇 명의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 족하다. 장례식에서의 모습이 죽은 자에 대한 가장 진실한 증거일 테니, 내가 잘 산 건지 못 산 건지 확인하고 싶다. 설사 너무나도 진실한 증거 때문에 당황스럽고 죽음의 억울함이 더해질지라도. 


다 불가능한 기대. 날 사랑했던 사람들은 내가 죽어야만 비로소 그들의 사랑을 여과 없이 쏟아낼 것이다. 그러니 누가 얼마나 나를 사랑했는지는, 죽지 않은 나는 결코 알 수 없는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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