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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l 06. 2022

아버지

멈추지 않은 슬픔과 그리움  1929-1988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60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아직도 눈물이 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서른한 살 때도 그랬고, 살아 계시던 아버지보다 더 늙은 지금도 그렇다. 아버지는 내 평생을 함께 할 그리움이고 아쉬움이고 슬픔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러니까 정말 농담처럼 말하던 육이오 직후였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보니 정말 가난했다. 난 서울 동대문 바로 옆 창신동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그곳은 거지와 문둥이가 살던 빈민촌이었다. 그곳에서, 역시 거지였던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해서 첫 가정을 꾸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작은 방 두 개, 그 사이에 더 작은 마루, 그리고 그보다 더 작은 마당. 물론 남의 집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가정을 만들곤 미국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훌쩍 유학을 떠났다.


지극히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때는 열심히 돈을 벌어 저축하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학강사였던 아버지와 중학교 선생이었던 엄마는 열심히 일하고 알뜰하게 저축해서 결국 집을 마련했다. 방은 셋이었다. 방 하나는 누나와 식모 (그 당시엔 식모를 두는 집이 많았다. 인건비가 쌌으니까. 그리고 내 부모처럼 맞벌이를 해야 하는 집에서는 식모가 필요했다), 또 하나는 나와 할머니, 그리고 제일 큰 방에는 아버지와 엄마. 마당을 막아  작은 방을 하나 더 만들어 아버지 서재가 생겼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버지는 대학강사를 거쳐 결국 대학교수가 되셨고 온종일 책을 읽으셨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던 해, 내 부모는 제법 그럴싸한 집을 지었다. 마당이 있는 이층 집이었고 그곳은 내 아버지의 마지막 집이 되었다. 난 그곳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고 군대를 갔고 결혼을 했고, 그리고 내 아버지는 그 집에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영문학 교수였다. 새 집에는 반지하방이 있었는데 그곳은 아버지의 서재였다. 온 벽이 책으로 가득했고 그 가운데 있는 커다란 책상에서 아버지는 종일 책을 읽었다. 인터폰을 설치해서 커피가 필요할 때마다 엄마를 불렀다. 서재엔 늘 파이프 담배연기가 가득했고 책상엔 커피잔들이 가득했지만, 내 아버지는 몇 시간이고, 어쩌면 종일, 그 서재를 떠나지 않았다. 가난하던 시절, 쥐꼬리만 한 월급을 책사는데 다 써버리자 엄마는 화가 났고 내 부모는 싸웠는데, 난 다 기억이 난다, 내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학자가 책 사는데 돈을 아끼면 그건 학자가 아니지. 또 한 번 내가 책 사는 거 가지고 화내면 그땐 이혼이야.”


가끔 외식을 했던 기억도 있다. 음식이 마음에 들면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했다. “성공사례.” 아버지는 고등학교 야구부 출신이다. 내가 처음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것을 배운 것도 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수영도 잘했고 테니스도 잘 쳤고 술도 잘 마셨다. 대학에 들어가자 아버지와 육사 교관 동기셨던 나의 대학교 은사 한 분을 집으로 초대하셨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술과 진수성찬을 준비했으나, 왜냐하면 아들이 들어간 대학의 교수님을 초대했으니, 술 꾼인 두 분은 밤새 음식에 손도 안 대고 술만 드시다 맨 마지막에 국물을 한 숟가락 뜨셨다. 그것이 진정한 술꾼의 상징이었다.


대학생이 되면 양복을 한 벌 해 입는 시절이었으나 난 그럴 필요를 몰라 사양했다. 그때는 개강파티, 종강파티가 유행이었고, 그건 전부 쌍쌍파티였다.  봄가을 열리는 대학 축제도 역시 쌍쌍파티였다. 그러니까 주최하는 쪽에서 파트너를 구해서 파티에 참가하고 댄스를 추는 낭만이 있었다. 축제 즈음엔, 여대 앞에 가면 파트너를 만드는 미팅에 아직 짝을 구하지 못한 친구들이 가득했다. 내 여자 친구는 간호학과였고 개강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초대받은 파티에 양복을 입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였다. 내일이 축제였으니 고민하다 어쩔 수 없이 난 수업을 빼먹고는 아버지한테 도움을 청하러 갔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 연구실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내 아버지는 어디론가 전화를 해서는 오늘 수업 다 휴강이란다. 조교였겠구나. 그리곤 날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양복을 사서 입히셨다. "파트너한테 잘하고 축제 재밌게 즐기거라."  내가 좋아하고 자랑하는 내 아버지는 이런 분이셨다.


대학시절 내 용돈은 한 달에 3만 원이었던가 아니면 그 보다 적었던가. 그 당시 기준으로 많았을 수도 있고 적었을 수도 있다. 다 가난하던 시절이니 용돈을 받으면 친구들에게 술 사고 한 달 용돈은 그렇게 첫날 다 사라진다. 나머지 29일은 내가 과외비를 받거나, 다른 친구들이 용돈이나 과외비를 받아서 충당하는 거다. 그렇게 돌려막기를 하다가 더 이상 불가능한 날이 온다. “저, 아버지 만원만 주세요.” 내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유를 묻거나 잔소리를 한 적이 없다. 엄마한테 말했으면 용돈을 벌써 더 썼냐고 또 왜 돈이 필요하냐고 아껴 쓰라고 온갖 잔소리를  들었겠지만 내 아버지는 그저 만원을 주시는 것 외엔 아무 말도 없으셨다. 아들이 필요한 데가 있겠지.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된 소위 불알친구가 둘 있다. 동갑이지만 학벌과 재력에 따라 난 큰 형, 둘째는 중학교 때 막일하시던 부모가 다 돌아가셔 졸지에 가장이 되어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대학교 급사부터 안 해본 일이 없이 고생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대학원을 다녔고, 결국 그 대학교 사무차장까지 하고 은퇴한 놈. 그리고 상고를 다니곤 술상무, 나이트클럽 웨이터, 무역회사 직원 등을 하다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막내. 늘 막내가 술 먹고 사고 치면 난 돈 내고 뒤치다꺼리하고 둘째는 “야 이 놈들아 정신 좀 차리자” 하면서 훈계를 하는 것이 정해진 패턴이었다. 그 당시에는 인심이 좋았던 것 같다. 포장마차에서도, 여관에서도, 싸구려 시계를 받아주었다. 시계를 차고 있던 건 나뿐이었으니, 내 시계는 종로 뒷골목 어떤 포장마차에, 그리고 셋이 고성방가를 하다 지쳐 잠든 어떤 여관에 있고, 그리고 막내가 군에 있을 때 대천까지 위문 가서는 해변가 무슨 천막 치고 노는 나이트클럽에도 있다. 그 많은 시계들은 다 아버지가 사 준 것이었다. 당연히 싼 것이었겠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없어지는 시계를 보시곤 아무 잔소리 없이 또 없어질 시계를 사주는 일을 반복하신 것이 내 아버지의 방식이다.


대학교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던 어느 날,  그 당시는 호랑이가 담배를 피웠고 대학교 본고사가 있었다, 아버지가 근무하시던 대학교로 날 데리고 가셔서 테니스를 가르쳐주셨다. 그러던 중, 누군가 아버지를 찾아와 뭐라 말을 했고, 아버지는 네트로 다가와 내게 악수를 청하셨다. “아들, 합격 축하한다.” 아는 교수님께 미리 결과를 알아달라고 부탁하셨던 거였다. 내가 불안할까 테니스를 쳐주신 분, 아니 그보다 본인이 더 초조해야 셨으리라. 그런 분이었다.


내 아버지는 암이 확인되었고 개복을 한 의사는 그냥 덮었다. 이미 간, 위, 췌장에 전이되어 죽음을 선고받았다. 아버지의 죽음 전날 나는 일 때문에 타지에 있었다. 그러나 불안하니 수시로 집에 전화를 했는데 엄마도 누나도 아닌 이모가 전화를 받자 난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구나. 서둘러 집으로 와서 뭇사람들을 뚫고 아버지에게 향했다. 누이가 날 보고 껴안고 통곡하곤 말한다. ”아버지 볼래?” 아직 관 뚜껑을 닫지 않았다. 아들이 안 왔으니까. “아니, 안 볼래.” 난 아버지의 주검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무너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참았던 슬픔이 폭발할 것을 알았으니까. 내 평생 하나뿐인 사랑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하면 난 죽는 거니까.


아버지보다 더 늙은 나이가 되었어도 늘 아버지가 그립고 생각할 때마다 슬프다. 내 평생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준 단 한 사람, 내가 사랑했던 단 한 사람. 그 멋있고 당당한 분이 병들고 나약해지고 불쌍해졌던 마지막 모습들은 지금까지도 아프게 슬프다. 사람이 죽는다면 무수한 사기꾼들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살려주셨으니 감사하세요.” 그럼 내 엄마는 할렐루야를 외치고 죽어가는 내 아버지에게 “당신도 아멘 하세요”라고 명령한다. 그럼 내 우상은 힘없이 아멘 했고 난 화가 났다. 난 그 놈들의 거짓과 내 엄마의 신파를 이미 알았지만, 행여 내 의심 때문에 기적이 막힐까 봐 기를 쓰고 덩달아 거짓으로 아멘이라 외치며 기도했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예정대로 죽었다.


난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아들이니까. 아버지는 180 장신이었고 엄마는 157인데 누나는 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난 엄마를 닮아 작다. 그러나 난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윗사람에게 아부하지 못하고 바른 말하는 버릇.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것. 사람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여기는 것. 꼬장꼬장한 것. 아버지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게 된 한 의사가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다. 상투적인 케이크, 그리고 그 밑에 돈 봉투. 그때는 이런 일이 흔했겠지만, 아버지는 그 의사 학생을 불러 노발대발 눈물 날 정도로 야단치고는, 그리곤 학위를 주셨다. 그리곤 나한테 말했다. “아들아, 사람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알았지?”


다니던 직장마다 윗사람이 권력으로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어 들이받고 사표 내고 직장을 옮겨 다녔다. 그때마다 내 엄마는 “넌 네 아버지하고 똑같구나”라고 하셨다. 제자들을 눈물 나게 야단치고 그 아이들을 위해 여기저기 전화해 부탁하고 학비도 대주고 하는 모습을 보곤 또 말씀하신다. “네 아버지 하고 똑같구나. 난 네가 아버지를 닮아서 좋다.” 내가 아버지를 배신한 단 하나는, 내가 아버지를 너무 좋아하고 너무 닮아서 나도 아버지처럼 59살에 죽을 거라 여겼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59살이 되던 해, 난 준비했고 기뻐했고 절망했다. 난 내 아버지와 똑같아야 한다면서. 그러나, 난 지금 60이 훌쩍 넘기도록 살아있어 내가 아버지를 닮지 못했음에 허망하다.


내 시절엔 이런저런 빽으로 다들 군대를 안 가던 시절이었다. 내 아버지는 대학교수였으므로 당연히 충분한 빽이 있었으나, 난 스스로 지원병으로 군에 입대했다. 아버지는 빽쓰실 분이 아니었고, 그 시대의 빽들 때문에 소위 사회지도층의 자녀는 죄다 전방으로 보내졌다. 나는 할 수 없이 학원에 다녀 육군 전산병으로 입대를 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니 친구들은 이미 유학을 가거나 대학원에 진학했다. 난 초조했던 것 같다. 늦었다는 불안. 그때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아들아, 일주일 여행을 가도 삼사일을 준비하잖아. 네 평생을 준비하는 것이니 일이 년 늦었다고 초조해할 필요 없어. 잘 준비해서 여행을 재밌게 만들면 되는 거야.”


아버지. 난 아버지를 억지로 부르지 않고 억지로 생각하려 않는다. 그럼, 난 무너지고 울고 너무 슬프고 미안하고 너무 억울하니까. 왜 내가 효도할 기회를 주시지 않고 그렇게 일찍 가셨냐고 그저 혼자 소리 죽여 소리칠 뿐이다. 오늘도 난 내 생의 단 하나뿐인 사랑 내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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