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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l 05. 2022

이별의 쾌감

인감 감정의 이기적 모순

마음에 드는 옷이나 신발을 사게 되면 기분 좋게 설렌다. 좋아해서, 그 옷만 너무 입어 낡아져 버려야 할 때는 아쉽다. 헤어짐이 아쉬운 게 아니라 똑같은 옷을 여러 벌 사두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거다. 그런가 하면, 몇 번 입지도 않아 계륵이 되어버린, 꽤 비싸게 샀던 새 옷을 밤 도둑처럼 슬쩍 버리고 나면, 뭔가 다행이고 홀가분하다. 사실 다 계륵이다. 망설이다가 결국 무언가를 버리고는, 내 삶에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음이 확인되면 기분이 가볍고 상쾌해진다. 넓어진 공간들을 보는 것이 좋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버리고 나면 뭔가 개운하고 상쾌해짐은 많은 사람들의 경험일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이 삶과 죽음일 경우엔 감정의 모순이 더 복잡하다. 갓 태어난 귀여운 강아지를 입양할 때의 즐거움과 행복이란. 삶이 밝아지고 나도 천방지축 새끼 강아지처럼 덩달아 활력이 넘친다. 시간이 흘러, 강아지의 시간은 사람의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빠르니까, 그 힘차고 어렸던 강아지가 늙고 병들어 죽는다. 슬프다. 그런데 그 슬픔과 함께 후련함과 해방감이 내 마음에 있어 당황한다. 힘든 시간들이 끝났다는 안도감. 


지난 몇 년 동안 선천성 콩팥 장애로, 노화로 인한 심장병으로, 사랑하던 강아지 둘을 떠나보냈다. 며칠을 울고 지금도 남은 사진을 볼 때마다 슬프지만, 아이들이 죽었을 때, 그 아이들을 마당 나무 밑에 묻었을 때, 이미 결정되어버린 죽음이 올 때까지 힘들게  버텨야 했던 시간들이 끝이 나 홀가분했다. 억지로 변명하자면, 그런 이기적인 감정은 사랑하는 존재가 죽어가며 겪은 고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평안과 해방감일 것이다. 살아있지 않음을 슬퍼만 해야 하건만, 이제는 죽었으니 홀가분하다면, 나 자신도 용서할 수 없는 이 감정의 모순을 그 누가 욕하지 않겠는가.


내 아버지의 죽음도 그랬다. 평생 너무 사랑했던 단 한 사람. 나를 온통 사랑만 해주었던 단 한 사람. 그런데 너무 일찍 나를 이별하셨다. 마지막 몇 달은 고통뿐이었다. 의사의 사형선고와 의미 없는 치료와 구차함의 여섯 달. 병실에서 여섯 달을 지내는 동안 잠시라도 아버지를 못 보는, 그래서 증폭되는 불안에서는 해방될 수 있으나,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너무 연약해져 버린 아버지를, 그리고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는 고통에서는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타지에 있었다. 상주를 기다리는 발인. 누나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겠냐고 묻는다. 내가 오기까지 관을 덮지 않았다. 나는 싫다고 했다. 내 유일한 사랑 아버지의 주검을 보는 그 고통을, 그 그리움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와의 이별은 내 생의 남은 시간 동안, 이제는 내가 아버지 나이를 훨씬 넘었음에도, 생각할 때마다 눈물과 숨 막힘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홀가분했다. 하루하루가 죽어가는 과정일 뿐,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의사들은 피를 뽑고 무슨 검사를 하고 무슨 약을 투여하고. 목사와 교인들이 미친 것처럼 기도하고 하나님의 기적을 예언했다. 그럼 내 엄마와 힘없는 아버지는 아멘을 말하고. 난 이미 그들이 죄다 사기꾼임을 알았지만, 혹여 내 의심 때문에 아버지가 살아나는 기적이 망가질까 봐 의심하는 나를 막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기도했다. 


결국 아버지는 죽었고 나는 홀가분해졌다. 뼈만 남은 아버지를 더 안 봐도 되니까. 온통 멍들어 더 바늘을 꽂을 수도 없는 몸에서 피를 뽑아가는 악한 간호사들을 안 봐도 되니까. 사기꾼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살려 주셨다고 거짓말할 때마다 아멘과 감사합니다를 외치는 바보 같은 아버지와 엄마를 더 안 봐도 되니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건 죽어가는 과정이다. 죽음은 이미 받아들였지만 그 남은 과정은 오롯이 고통으로 당하고 버텨야 했다. 그 괴로운 과정이 끝이 났으니 다행이고 홀가분했다.


아침에 친구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연명치료 거부 서류 작성해요. 코로나 때문에, 가족들이 같이 있을 수 있는 호스피스나 그런데 좀 알아보려고요." 전화기 넘어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친구의 장례를 마치고 허망함으로 혼자 걷다가, 이제 다 끝났구나, 이별과 고통을 마무리하는 홀가분함을 미리 떠올린다.


만남은, 좋은 만남은, 설레고 신나고 행복하다. 이별은, 슬픈 이별은, 고통스럽고 아쉽고 원망스럽다. 그 슬픈 이별을 겪으면서 다행이다, 후련하다, 이제 끝났구나 따위의 긍정을 느끼게 되는 감정의 모순, 섭리의 잔인함, 그리고 인간의 연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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