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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l 04. 2022

우리 집 길고양이 얼룩이

우리 집 마당에는 길고양이가 살고 있다. 아니 살고 있었다. 일 년 전쯤인가. 갑자기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마당과 주차장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이, 길고양이가 우리 집에서 출산을 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해가 간다. 마당에 작은 창고가 있고 문은 늘 열려있고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으니 이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다. 그때는 그저 그런가 하고 가끔 고양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서 마당에 놔주곤 하는 정도. 시간이 흘러, 어미와 다른 새끼 고양이들은 어디론가 떠났는데, 유독 새끼 한 놈은 계속 우리 집에 머물렀다. 일 년쯤 지나 다 큰 고양이가 되었고, 나는 그 아이를 위해 매일 사료와 깨끗한 물을 채워 놓았다.


최근에 그 아이가 우리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그리고 아마도 남자 친구 거나 남편인 회색 고양이도 늘 같이 있다. 내가 차려준 밥을 먹고 그냥 가는 게 아니라 마당에서, 바비큐 테이블 위에서, 볕을 쬐고 늘어지게 잠을 잔다. 난 그 아이들을 얼룩이와 덜룩이라고 불렀다. 노란 점이 있는 여자애는 얼룩이, 그리고 회색 점이 있는 남자애는 덜룩이. 비가 오는 날이면 얼룩이와 덜룩이는 종일 창고에서 지낸다.


얼마 전에 보니 얼룩이 몸이 꽤 통통하다. 아, 아기를 가졌구나. 고양이들은 주로 봄에 출산을 한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집 밖으로 돌아다니는 시간이 줄어들고 마당에서 테이블 위에 누워있는 시간이 늘었다. 아직도 날 경계하여 밥을 주러 나가면 잠시 쳐다보다 마당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타고 오른다. 그리곤 담벼락에 누워 날 쳐다보지만 멀리 도망가진 않는다. 밥과 물을 주는 좋은 사람인 것을 알긴 아는가 보다.


창고에 고양이 집을 마련해주었다. 고양이가 좋아하는 종이박스도 놓아주고 이글루 같은 푹신한 작은 집을 사놓기도 했지만 정작 그 아이가 어디서 잠을 자는지는 알 수가 없다. 며칠 전부터는 거의 온종일 바비큐 테이블에 누워있다. 몸이 무거워서 그렇겠지. 언제쯤 새끼를 낳을까. 우리 집에서 출산을 할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할지 알 수가 없지만, 안전한 우리 집에서 새끼를 낳고 키웠으면 바랬다.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까. 단말마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집에 있던 세 마리의 강아지들이 죄다 짖어대고, 그 순간, 얼룩이가 아기를 낳았다는 걸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종일 마당에서 얼룩이가 보이질 않았다. 내려가 보니 밥이 그대로 있다. 조심스레 창고로 들어가 보니, 고양이 집이 닫혀있다. 집 바닥에 깔려있던 방석이 입구를 딱 막고 있는 거다. 아. 얼룩이가 집을 닫았구나. 놀라웠다. 어미의 본능이 이런 건가. 새끼를 보호하려는 것이었겠지. 이틀 동안 아무 변화가 없어 걱정이 됐다. 새끼를 낳은 건가. 낳다가 죽은 건가. 다시 조심스레 창고에 가보니 고양이 집의 위치가 조금 달라졌다. 아. 그럼 죽은 건 아니구나. 닭가슴살을 삶아 다시 내려가 보았다. 밥그릇이 비어있었음을 발견한 순간 그 안도와 기쁨이란. 잘 살아 있구나. 닭가슴살을 놓아주고 돌아서니, 얼룩이가 마당에서 날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산모가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사람하고 짐승이 이렇게 다른 건가. 그 틈에 고양이 집을 들여다보니, 너무나도 귀여운 새끼들이 다섯 마리다. 검은 놈, 하얀 놈, 엄마 닮은 얼룩이, 그리고 아빠 닮은 덜룩이까지. 생명이다. 기쁨이고 감사이고 행복이었다.


갑자기 다 사라졌다. 얼룩이가 새끼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다. 내가 들여다본 게 잘 못이었다. 내 호기심 탓에 얼룩이는 여기가 안전한 곳이 아니라 생각했을까 새끼들을 죄다 옮겨버렸다. 미안하고 후회되고 허전했다. 인간의 호기심이 짐승의 본능을 위반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얼룩이는 계속 집에 와서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마당에서 쉬다 가곤 했다. 새끼들을 젖먹이고 키우느라 힘들 것이니 여기서 잠시 먹고 마시고 휴식을 취하는 거겠지. 출산 전후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덜룩이도 다시 나타나 둘이 사이좋게 지낸다. 서로 기대어 잠도 자고, 서로 그루밍도 해주고. 그 아이들을 보는 것이 어느새 내 인생의 즐거움이 되었다. 기쁜 일이 없는 내게 얼룩이는 스며드는 행복을 준다.


얼룩이가 죽었다.


며칠 전부터 사료가 줄지 않으니 얼룩이가 오지 않았단 뜻이다. 마당에 늘 보이던 얼룩이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게 이틀 사흘이 지나니 걱정이 됐다. 본능적으로 얼룩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밥 먹으러 오지 않은 건 올 수 없는 상황이란 거다. 그럼 다쳤거나 죽었다는 말이다.


막내아들 결혼식 때문에 서울 다녀오느라 하루 집을 비웠고 오늘 마당에 나가보니 여전히 밥은 그대로다. 그리고, 갑자기 그래야 될 것 같아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 얼룩이가 누워있다. 내가 만들어 준 박스집 앞에 옆으로 누워있었다. 막연히 예상했지만 이렇게 진짜 주검으로 되돌아올 줄이야. 아마 내가 없던 어제쯤 집으로 들어와 죽은 것 같다. 이미 죽어갔을 터인데 집이라 여겨 이곳까지 힘들게 와서 쓰러졌을 거다. 매일 얼룩이 밥과 물을 챙겨주고, 얼룩이 친구 덜룩이와 또 다른 길고양이가 오는 걸 반가워하고, 마당을 내려다보면서 얼룩이가 있으면 반갑고 없으면 언제 오는지 기다렸는데. 이제 얼룩이는 없다. 밥은 그대로 있고, 얼룩이가 없으니 마당이 텅 비었다.


또 마음 한 조각이 무너진다. 고양이는 목숨이 아홉이라던데 왜 내가 사랑한 고양이들은 이리도 쉽게 죽느냔 말이다. 생명이 하나도 못되다니. 지난 일 년 동안 너무 많은 죽음들이 내게 일어났다. 키우던 강아지, 키우던 고양이, 친한 친구 둘, 그리고 죽을 뻔한 엄마와 죽기 직전까지 가서 기적적으로 간이식을 받은 내 누나. 죽음이 가까이 나를 둘러싸서는 서서히 조여 온다. 얼룩이가 그립다. 그 아이의 죽음에 또 가슴이 돌이 된다.


길고양이가 죽을 확률이 집고양이보다 높은 건 당연하다. 예방접종도 못 받으니 감염되기 쉽고, 아파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도 없다. 다른 짐승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고 날카로운 것들에 베일 수도 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아스팔트에 죽어 누워있는 고양이를 본 적도 많다. 그렇다면 얼룩이의 죽음도 그냥 그런 통계의 하나일 뿐인데 왜 이렇게 슬픈 건지. 왜 내 집 마당으로 찾아와 죽은 거냔 말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럼 난 이렇게 가슴 아프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밥 주고 물주는 내가 자신의 보호자이고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 여겨 죽을 때 집을 찾은 것이 고마운 일인가, 감사한 일인가, 다행한 건가. 결코 아니다. 나의 슬픔이 더 커졌을 뿐인걸. 내가 모르는 슬픔은 내 슬픔이 아니니까. 내가 아는 비극만이 내 슬픔이니까. 오랫동안 먹을 줄 알고 잔뜩 사놓은 얼룩이 사료는 슬픔이 오래갈 것을 알려준다.


길고양이는 본시 나와 분리된 존재이니 사랑과 이별, 그리움 따위의 감정은 없어야 했다. 그런데, 한 생명이 나의 의지나 선택을 무시하고 내 삶으로 들어와, 내게 관심과 연민과 반가움과 사랑의 감정을 갖게 한 후, 그저 사라진 것도 아니라 주검을 남겼다.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만드는 거야.  마지막 순간, 얼룩이는 나에게 오면, 그리고 집으로 오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그저 곧 죽을 것을 알아 본향 집으로 향한 건지.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내 선택이 아니었다. 얼룩이는 자기 마음대로 내 집을 선택했고, 나는 순응했고, 그놈은 지속적으로 내 감정을 연단시켜 결국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는, 그 아이도 결코 원치 않았을 마지막 죽음을 주고 갈 대상으로 다시 나를 선택했다. 내 생각과 감정은 무시되었고 그저 그동안 얼룩이가 내게 얼마나 깊이 소중해졌는지만 확인하여 슬픔의 깊이를 바닥까지 팠을 뿐이다. 지난 일 년 동안 너무 많은 죽음들을 겪으니 상처가 깊고 모든 게 두렵고 마음 밑바닥엔 늘 눈물이 고여있다.


얼룩이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 며칠 후, 외출하다 보니 집 앞에 작은 고양이가 죽어있다. 보는 순간 얼룩이의 새끼임을 알 수 있었다. 엄마가 사라지자 무서움에 새끼도 자기의 집,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오려고 했음일까. 집을 찾아오다 변을 당한 건가. 알 수 없다. 슬픔은 끝이 없다. 창고에 들어가면 냄새가 났다. 창고니까. 그런데, 갑자기 또 주검이 있음을 알았다. 얼룩이가 새끼를 낳고 키우던 고양이집 바로 옆에 또 한 마리의 새끼가 죽어있었다. 너무 작은 아이. 그 몸에 구더기가 가득하다. 죽은 지 오래 지났구나. 이 아이는 어찌하여 자기가 태어난 집 옆에서 죽었을까. 혼자 왔을 수도 있겠으나 얼룩이가 물어다 놓았을지 모른다. 얼룩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더냐 말이다. 얼룩이는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새끼들을 밥과 물이 있는, 그리고 돌봐주는 내가 있는, 안전한 집으로 옮기려 했던 건가. When it rains, it pours. 정말 그지같이 슬픈 일만 일어나는 내 인생.


매일 마당을 넋 놓고 쳐다보고 어쩌다 창고에 들어갈 때마다 또 다른 얼룩이 새끼의 주검이 있을까 겁이 났다. 알 수 없다. 왜 엄마도 새끼도 죽었는지. 그러나 그것이 길고양이의 슬픈 숙명임은 안다. 늘 죽음을 피해 위태롭게 살아가야 하는 운명. 내 욕심에 얼룩이 새끼들을 들여다보지 않았으면, 지금도 내 마당에는 얼룩이와 다섯 마리 새끼들과 아빠일 것 같은 덜룩이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얼룩이와 그 새끼들의 죽음은 내 탓이다. 그래서 내 슬픔도 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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