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씨 Jul 03. 2022

유한 게임 Finite Game

끝이 어떨지 아는 인생은 얼마나 슬픈지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양귀자님의 ‘모순’이란 소설에서 주인공이, 그러니까 양귀자님이, 우연히 발견한 구절인데 자신에게 훌륭한 충고가 되어준 말이란다.  


내가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내 인생의 볼륨(volume)이 부끄럽게도 빈약함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얕은 삶은 결코 깊은 글을 쓸 수 없다. 흉내 내고 거짓 부릴 수는 있어도 글에 삶의 진정성이 없음을 누구나 알 수 있는데 어찌 감히 아닌 척하겠는가.


글을 읽다 보면 좌절할 때가 너무 많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어떻게 이런 표현을, 어떻게 이런 삶을. 하여 난 글을 쓸 자격이, 아니 자신이 없다. 양귀자님의 문장은 담담하면서도 양감(量感)이 있으되 난 가볍고 얇다. 게다가, 아마도 늙어 모든 자신감을 잃은 탓이겠지만, 타인의 불행만큼 내 불행도 자연스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니, 오히려 내 불행을 더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지 말라고 한 것임에도, 그렇다.


해야 할 의무가 없을 때 삶을 주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감탄하며 패배자로 지내다가 갑자기 숙제가 생겼다.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게으른 자가 딱 한번 실수로 책을 번역한 적이 있는데 느닷없이 개정판이 나왔으니 추가 번역을 하라는 숙제. 내가 맡은 파트는 책의 후반, 그러니까 게임이론부터인데, 무한반복 게임은 유한 게임과는 전혀 다르다는 상식적인 내용을 보다가 갑자기 내 삶이 슬퍼졌다. 내 아버지는 59세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미 간, 위, 췌장으로 전이되어 그저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끝이 정해져 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유한 게임이라면 남은 삶은 정말 슬프고 허무하고 두렵다. 계속되는 검사와 주사, 의미 없는 기도와 위로, 밥을 먹고 배설을 하고, 사람들은 사랑 없이 의무적으로 찾아오고, 나을 것이라는 사기꾼 예언자들. 힘내라는 엄마의 억지이거나 위선이거나. 모든 것은 마지막 단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유한 게임(finite game)에서는 다 거짓이다. 난 그때도 역진 귀납(backward induction)을 알았고, 아버지가 곧 죽을 것임을 알았고, 살 것이란 예언자들의 거짓도 다 알았다. 삶의 끝을, 결과를 아는 자의 고통. 


나의 사랑 두리는 머지않아 죽는다. 소형견들의 평균적 숙명에 따라, 심장이 망가졌고 그로 인해 폐에 물이 차는 폐수종이다. 이뇨제를 써서 억지로 물을 짜내니 곧 콩팥이 망가질 것이니, 결국 심장 때문에 죽든지 신장 때문에 죽든지 어쨌든 곧 끝이 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심장 약을, 그러니까 이뇨제가 들어간 약을 먹이면서 내가 두리의 콩팥을 망가트리고 있음을 안다. 두리의 삶이 곧 끝이 날 것을 아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든 삶은 끝이 있으되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젊은 인간이거나 무지하게도 순진한 짐승에게는 역진 귀납 인지의 슬픔은 없다. 두리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모른다. 그래서 매일 밥을 먹는 일에 흥분하고, 꿀에 타 준 약을 잘 먹고, 산책을 하면 좋아한다. 자신의 삶을 무한반복 게임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행복이겠지만 슬픔은 진실을 알아버린 내 몫이다. 난 두리의 삶의 끝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 매일 반복되는 약 먹기, 산책하기, 밥 먹기, 종종 배와 딸기를 먹는 일 등이 이미 정해진 삶의 끝을 향해 가는 연극일 뿐임을 알아 차라리 몰랐으면 겪지 않을 고통을 감내한다.


내 삶도 곧 끝난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인생이 무한반복 게임이라 여기겠지만, 그것은 지극히 그럴싸한 인식인데, 나는 늙고 병들어 내 남은 삶이 유한 반복 게임임을 극도로 실감 나게 인지한다. 끝을 아는, 그리고 그것이 죽음임을 아는, 삶의 현재는 불행이다. 그래서 난 내 삶의 불행이 납득할 수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과도하게 납득된다.  유한 게임임을 알고, 끝이 그리 멀지 않음도 알고, 그 과정이 혼자 가야 하는 고독임을 알고, 싫어도 뭘 어쩔 수 없음을 아는 고통. 위장된 평안. 그리고 거짓 해탈.

작가의 이전글 행복에 대한 반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