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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Jul 02. 2022

행복에 대한 반감

오늘이 장애인의 날인가 보다. 가끔 TV에서 슬픈 방송을 본다. 이런저런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선천성 장애인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오늘은 치료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엄마와 자폐증인 어린 아들, 그리고 아들을 닮아가는 더 어린 딸의 사연이다. 엄마는 갑자기 찾아온 병으로 인해 더 이상 두 아이를 모두 키울 수 없어 딸을 보육원에 맡기고 자폐인 아들과 산다. 엄마가 보육원에 찾아가자 딸이 달려와 엄마 품에 안긴다. 엄마와 오빠가 함께 놀아주어도 어린 딸은 그저 즐거워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시간이 흘러 엄마와 오빠가 옷을 챙겨 입자 어린 딸은 자기 옷을 가져와 입혀달라고 한다. 엄마가 떠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엄마는 딸에게 옷을 입혀주지만 결국은 딸을 떼어놓고 떠나야 했고, 딸은 하염없이 엄마를 붙잡고 운다. 또다시 엄마와 이별해야 하는 가혹한 운명에 좌절하는 그 어린것의 울음에 늙은 나도 소리 없이 운다. 다섯 살도 안된 나이에 이별을 배우고 눈치 보는 법을 배우고 슬픔을 버텨내는 법을 배운다. 그런 건 배울 필요도 없고 배우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아빠는 없는가 보다. 떠난 건지 죽은 건지. 엄마는 자신의 치료비도 감당할 수 없어 진료를 포기하고 겨우 약만 사서 먹을 뿐이다. 고통을 그저 버텨내야만 하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젊은 엄마. 세상이 두려운 어린 자폐 아들. 그리고 이미 가슴에 슬픔의 돌덩이가 생겨버린 아직은 어린 아기인 딸.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전화를 걸어 후원을 시작했다. 겨우 월 3만 원. 그럼 나의 사랑 없음이 면죄되는 것인가. 그럼 슬픈 자가 웃게 되는 것일까.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칭찬하는 금슬 좋은 부부. 나를 본받으라고 가르침을 주는 성공한 사람. 세상의 좋은 곳들을 찾아가 산해진미를 즐기면서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이런저런 웃음과 행복을 보여주는 많은 프로그램들. 이런 것들이 싫다. 그들이 싫은 게 아니라 그런 삶이 성공이고 모범이고 행복이라고 자랑하는 게 싫은 것이다. 아프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이 그런 방송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꿈? 희망? 결코 아니다. 그저 자신의 불행과 희망 없음과 괴로움이 더 억울하고 슬플 것 같다.  


불행한 사람에게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는 일체의 간증을 혐오한다. 아픈 자에게 건강을 자랑하고, 배고픈 자들에게 맛있는 식도락을 자랑하고, 이혼과 싸움의 고통을 겪는 부부들에게 자신의 행복한 가정을 뽐내고, 찢어질 듯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공과 재력을 뽐내고, 늙어 죽어가는 노인들에게 자신의 싱싱한 젊음을 자랑하는 것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간증하는 것은 잔인한 폭력이다. 지난날의 내 오만한 삶이, 천박한 과신의 본성이 부끄럽다. 행복한 자들아. 어느 영화 속 대사가 옳다. 너희의 행복이 너희가 잘 남 때문이 아니다. 저들의 불행이 저들의 잘 못 때문이 아니다. TV 속의 웃음과 행복이 안타깝다. 오늘은 슬픈 장애인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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