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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씨 Oct 14. 2022

내게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던가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다가 불행이 밀려오면 인생이 고해라는 말이 사실적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몰아친 불행들은 내 인생에 과연 행복한 순간이 있었냐고 비웃는다. 있었던가. 어린 시절은 행복했던 것 같다. 아니 불행이 뭔지 몰랐을 뿐이리라. 친구들과 놀며 지내는 일상이었지만, 지금이라면 행복이라고 여길 것이다.


행복과 불행을 알게 되는 나이가 되니, 행복이라 여겼던 시간들이 있었나 회상해본다. 순수했던 소년과 청년의 시절, 풋사랑과 첫사랑의 날들은 행복했으니 이제부터 그 행복의 날들을 회상하며 지금의 불행을 희석시켜보려 한다.


# 풋첫사랑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호랑이가 담배를 피웠고 대학입시가 있었다. 예비고사에 합격하면 지원한 대학에서 소위 말하는 본고사를 치르게 된다. 국어, 영어, 수학이 기본이었고, 내가 지원한 대학에선 과학, 그러니까 생물, 물, 화학에다가, 제2 외국어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남학생의 필수인 독일어를 선택했으니 요즘 젊은이들이 보면 정말 그때가 육이오 때인지 조선시대인지 구분되지 않는 그저 오래전이리라.


대학에 붙기 위해 4당 5 락을 넘어 3당 4 락이었던 시절인지라 고3 때 결국 입시과외를 하게 되었다. 개인과외가 아니라 소규모 학원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같은 고등학교 친구들 4명과 여고생 4명. 소년 소녀가 숫자까지 맞췄으니 스토리가 생기는 건 당연했다.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한 친구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주선했고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소녀를 초대했다. 입시공부를 하느라 피곤했던 학원이 설레는 파티로 변신한 거다. 내가 택한 소녀는 문예반이었다. 문학을 하는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소년이 어디 있겠는가. 그 후 우리는 꽤나 가까워졌지만 그렇다고 요즘 소년소녀들처럼 데이트를 한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축제에 그 아이가 왔고 축제 후엔 종로 2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가는 곳이었지만 고등학생들도 쉽게 드나들던 곳. 음악시험에 필요하다 클래식 LP가 있냐는 말에 나는 모아둔 돈을 모조리 써가며 레코드판을 사서 마치 내가 가지고 있던 것처럼 빌려주기도 했던 것 같다.


문득 그 아이가 보고 싶은 날이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종로 2가에서 그 아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올라타는 일뿐이었다. 그 아이가 없으면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다음 버스를 타고, 또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은 그 아이를 만났다. 운명이 소년의 순수함에 굴복한 거다. 종점까지 같이 가면서 별 말도  하곤 겨우 잘 가라고 인사하고 다시 그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일을 몇 번이나 반복했던가. 순수하고 용기 없고 아무런 요령도 없던 시절. 버스에 올랐을 때 그 아이가 거기 있었을 때 얼마나 가슴 벅차도록 행복했는지.


그렇게 끝이 났다. 대학입시가 중요했던 시절 소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은 아직은 감히 선택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대학생이 된 어느 봄날, 친구가 말한다. 자기가 사귀는 소녀가 내 첫사랑과 고등학교 동창이며 자신의 남자 친구가 나와 같은 고등학교이니 혹시 하며 내 안부를 물었단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으나, 그 소녀는 몸이 아파 대학 입학과 동시에 휴학을 했고, 아픈 소녀는 내 가슴을 더 절절하게 만들었으니 그때 나의 첫 풋사랑이 시작되었다.


가난한 시절이니 같이 걷는 시간이 많았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이러면 헤어진다고 웃으며 말했는데 그렇게 되고 말았다. 너무 어린 시절, 감정을 감당할 힘이 없었다. 사랑이 깊어지면서 우리는 그 감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게 되어, 어느 날 아무런 정당성없이 그냥 헤어지자고 약속을 했다. 이별은 도피였다.


그 아이와 헤어지고 난 후 난 잠을 잘 수 없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니 어떤 연결도 할 수 없었고 그 사실이 나를 숨 막히게 했다. 물속에서 숨 쉴 수 없는 것 같은 답답함과 두려움. 그 아이와 단절되어 있다는 공포.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밤새 심장이 조이고 숨이 막혀 한 잠도 못 자고 새벽 4시가 되어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첫 버스였겠지. 새벽 버스를 타고 그 아이 집 앞에 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담에 기대어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조금씩 세상이 밝아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 그 아이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마치 내가 있는 것을 알고 나를 만나고자 한 것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기쁨에 그 아이 앞에 섰고 우리는 서로 부둥켜 고 한없이 울었다. 왜 헤어졌냐고, 이젠 헤어지지 말자고 다짐하고 울고 또 후회하고 다짐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이별했다. 그건 어린 시절 첫사랑의 운명이었으리라. 설레고 행복했고 슬펐고 아팠고 또 행복했으나, 그것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감정의 전부였다. 그 후, 오래 사랑하고, 싸우고, 무뎌지고, 결혼하고, 배신하고. 그런 감정들을 감내하기엔 너무 어렸으니, 헤어질 순간에 헤어진 것이리라.


시간이 흘러 우연히 버스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는 새 남차친구와 함께였고, 나도 새 여자 친구가 있었고, 우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잘 지내라고 또 한 번의 이별인사를 했지만,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다 끝난 첫사랑이었다. 행복했던 나의 소년과 청년의 첫 즈음. 내게 첫사랑을 물어보면 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아이를 말할 거다. 나의 순수하고 행복하고 가슴 아팠던 어린 시절의 첫사랑.



# 첫사랑


대학 본고사를 치르고 합격자 발표가 나면 그때부터가 인생의 황금기였다. 아마 1월쯤 합격자 발표가 있었던가. 그럼 3월 입학까지는 세상이 내 것이었다. 용돈도 궁하지 않았고 아무리 놀아도 부모의 잔소리도 없다. 놀고 또 놀고 또 노는 일이 내가 할 전부였으니까.


친한 중학교 동창 놈과 명동을 거닐고 있었다. 그때는 그저 거니는 것뿐이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그게 우리에겐 최고의 일탈과 방탕이었다. 명동 한 복판에서 소녀 세명을 만났는데 그중 한 아이가 내 친구와 같은 교회에 다녔다. 그렇게 우리는 어떤 커피숍에 들어갔고 순수하고 철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세상이 좁다. 그중 한 소녀는 내가 잘 알던 아이였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자면 종로 2가나 광화문으로 가야 했다. 종로 쪽이 조금 더 가까웠지만, 난 늘 광화문으로 간다. 거긴 경기여고, 이화여고, 그리고 또 다른 여고생들이 많았으니까. 가끔 버스 정류장에서 국민학교 동창을 만나게 되면 교복 입은 남고생이 교복 입은 여고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행운도 생기곤 했다. 광화문으로 가는 길에 반대로 광화문에서 걸어오는 소녀를 만났다. 작고 여리고 그래서 소년의 마음을 쓰게 만드는 여고생. 우리는 한 번도 말을 하거나 눈인사를 한적은 없지만, 이미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명동에서 비로소, 그러니까 한 일 년 만에, 첫인사를 했다. 난 너 아는데. 나도 너 잘 알고 있어. 그렇게 오랜 인연을 확인했다. 또 한 명의 소녀가 내게 묻는다. 어느 대학에 들어갔냐고. 그리고 자기는 떨어져서 재수를 한다고 말했다. 명동에서의 어설픈 만남은 그게 다였다.


봄이 되었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설레는 신입생의 어느 봄날, 같은 대학 교정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대학에 떨어져 재수를 한다던 그 아이는 나와 같은 대학에 붙었던 거다. 거짓말쟁이지만 그렇게 우리는 그저 친구가 되었다. 가끔 지나치다 만나면 인사할 뿐이었다.


그때는 대학이 낭만이 많았던 것 같다. 봄과 가을엔 대학 축제가 있었고, 단과대학별로 개강파티와 종강파티가 있었는데 그것은 죄다 쌍쌍파티였다. 파트너를 데려와 게임도 하고 춤을 추는 파티였다. 그 아이는 개강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아니 내 친한 친구에게 나하고 같이 가고 싶은데 말을 해달라고 했다. 먼저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이었으리라.


파티는 취소되었다. 고 육영수 여사의 서거 일주기가 되어 나라에서 모든 음주가무를 금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종로의 한 경양식집에서 댄스파티 대신 어색한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데이트는 아니었다. 그 아이가 게 이렇게 물었으니까. 네 인생관이 뭐야? 데이트에서 이런 질문을 하는 건 너무 어이없고 잘 못된 거다. 그 아이는 여전히 자존심이 강했고 그렇게 첫 데이트가 될 뻔했던 축제는 끝이 났다.


그 아이는 간호학과였는데 1학년이 끝나자 의대가 있는 캠퍼스로 떠났다. 그리고 그 아이가 없는 캠퍼스에서 비로소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보고 싶었다. 무작정 의대 캠퍼스로 찾아가 간호학과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 직원에게 그 아이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고 거절을 당했다. 얼마나 웃음이 나왔던지. 거절당하고 나오려는 순간 학과 사무실 벽에 모든 학생들의 주소록이 붙여있던 게 아닌가. 난 그 아이에게 편지를 썼다. 언제 몇 시까지 대학로에 있는 학림다방에서 기다릴 테니 나와달라고. 그러나 난 이미 알았다. 자존심이 센 그 아이가 내 말대로 할리가 없다. 7시쯤부터 책을 읽으며 기다리니, 9시가 되자 카운터에서 방송을 한다. 손님 중에 내가 있으면 전화를 받으라고. 그때는 그렇게 연락하던 시절이다. 전화를 받았고, 그 아이는 내가 아직도 기다리고 있음을 확인하여 기뻐했으리라. 그리고 결국 그 아이는 나를 만나러 왔으니 그때부터 우리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행복한 기억들이 있다. 수업하다 갑자기 그 아이가 보고 싶을 땐 수업을 다 빼먹고 의대 캠퍼스로 갔다. 그럼 무엇하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연락할 방법도 없다. 학교를 돌아다니고 도서관을 뒤지고 의대 건물을 층층이 헤매다 보면, 결국 꼭 그 아이를 만난다. 아마도 실습인가. 간호복을 입고 교수님 뒤를 따라다니다 멀리 서있는 나를 발견하곤 그 아이는 미소를 짓고 얼굴이 빨개진다. 그렇게 힘들게 만나면 우리의 행복과 사랑은 너무 컸다.


겨울엔 우리만의 약속이 있었다. 눈이 오면 장충단 공원에서 만나자. 내가 먼저 갈 때도 있었고, 그 아이가 나를 기다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눈 오는 날 우리가 만나지 못한 적은 없었다. 만나면 거기서부터 남산으로 올라가 눈 때문에 차가 다니지 못하는 남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눈싸움을 하고, 미끄럼을 타고, 넘어지고, 웃고, 손잡고 걷고. 그런 행복은 내 삶에 다시는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면 옷이 다 젖는다. 그럼 우린 다시 장충단 공원으로 내려와 100원짜리 커피를 나누어 마시고 또 행복해한다. 그리곤 식당에 들어가 추운 몸을 녹이느라 김치찌개를 한 개만 시킨다.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뜨거운 김치찌개를 둘이 나눠 먹으며 가난하다, 구차하다 따위의 감정을 상상한 적도 없다. 행복한 감정뿐이었다.


대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갔다. 입대 전날 친한 친구들과 그 아이가 같이 했다. 입대한 날 그 아이는 군부대까지 따라왔고 마지막 사진을 찍었고 부대 앞에서 잘라낸 내 머리카락을 가져갔다. 논산훈련소. 그땐 구타가 심했고 비인격적 모욕이 심했고 그래서 힘든 날들이었다. 그래도 난 제일 잘 나가는 훈련병이었다. 그 아이가 40일 동안 40통의 편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내 평생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건만 왜 난 그 아이를 떠나보냈던가. 후회가 크지만 돌이킬 순 없으니.


그때의 군대는 힘들었고 졸병은 더 힘든 때였다. 난 서울에 배치되었고 그 아이는 매주 면회를 왔다. 통닭 한 마리와 뉴스위크. 그 아이의 자존심은 여전했다. 졸병 군바리에게 뉴스위크라니. 면회를 다녀오면 겪어야 할 일들이 있었다. PX에서 담배를 사서 내무반에 있는 선임들에게 일일이 상납해야 했고, 여자 친구에 대해 고얀 질문들을 해대도 다 대답해야 했다. 언제부터 같이 잤느냐. 예쁘냐. 친구들 언제 소개팅해 줄 거냐 등등. 군 생활이 힘드니 면회 오는 것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외박이나 외출을 나가면 부대를 떠나는 순간부터 불안하다. 다시 복귀해야 하는 시간이 벌써부터 괴롭다. 그런 마음으로 그 아이를 만나면, 괜히 심술을 부린다. 내 삶의 괴로움을 내 사랑하는 아이에게 몇 배로 복수했다. 부대 앞에서 기다린 그 아이를 보자마자 집으로 보내기도 했고, 데이트하던 중에 느닷없이 집으로 가버리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지금 내 아내의 말처럼, 난 성격이 너무 못된 거다. 그러나, 그땐 군 생활이, 졸병의 삶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라 변명하리라. 그리고 또 부질없이 후회한다.


제대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이별을 겪었다. 아니 나는 일방적인 이별을 저질렀다. 군인을 핑계했던 내 못된 짓들을 그 아이는 다 참아냈지만, 결국 내가 버티지 못했다. 이제 면회 오지 말아 다오. 이젠 휴가를 얻어도 널 만나지 않겠다. 그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 채, 그리고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 채 내게서 밀려났다.


제대 후, 난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고, 그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모든 것을 빌고 용서받고 다시 그 아이와의 사랑을 지속하고 싶었다. 운명은 그런 거다. 그 아이의 여동생이 전화를 받는다. 오빠, 어떻게 이제 와서 전화를 해요. 언니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나 해요? 이제 겨우 마음을 추슬렀는데 지금 다시 전화해서 언니 마음을 어떻게 하려고요. 운명인가 아니면 내 잘못인가. 난 변명하지도, 우기지도 못하고, 그저 전화를 끊었고 그렇게 내 삶의 가장 진실했고 행복했고 그리웠고 아쉬웠던 사랑은 끝이 났다.


이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나야. 그 아이였다. 대학 신입생 때 만난 사랑을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난다. 아니 목소리를 듣는다. 그 아이가 묻는다. 너 그때 왜 날 버렸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단다. 왜 이별해야 했는지 이유를 찾지 못했단다. 그땐 내가 정상이 아니었어. 군대가 너무 힘들어서 사랑을 버텨낼 힘이 없었어. 매일 구타당하고 모욕당하고 그러다 널 만나서 갑자기 웃고 행복해 할 수 없었다면 넌 이해할까. 제대하고,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니 모든 게 후회되더구나. 그런데, 우린 헤어질 운명이었나 봐. 널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내 전화를 받은 건 네가 아니라 동생이었지. 그때 네가 전화를 받았다면, 우린 지금도 같이 있었을까. 내 잘못을 꾸짖고 너를 다시 흔들지 말라는 네 동생의 말에 난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었어. 내 잘못을, 네게 준 고통을, 나도 너무 잘 알아 후회하고 나를 욕하고 있었으니까. 운명이었나 봐. 한참을 듣고 있던 그 아이가 말한다. 이제 됐어. 이십 년 동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젠 알겠네. 다행이다. 네가 날 버린 게 아니라, 운명이 우리를 갈라놓은 거니, 널 미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그리고 또 이십 년이 지나갔다. 웃을 일도, 심장 뛰는 설렘도, 행복도 없이 그저 죽지 않으니 하루를 또 살아가는 지금, 내게도 행복한 시간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분명히 있었으니, 그것은 내 어린 시절, 순수했던 시절의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경험과 기억이 없었다면, 난 너무 불쌍했을 것인데, 고맙다. 내 어린 시절이 고맙고, 그때의 사랑이 고맙고,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해주었던 소녀가 고맙다. 내게도 행복한 날들이 있었다. 천만다행이나, 기억해내니 다시 가슴이 먹먹하다. 마치 그때의 안절부절 못했던 소년으로 돌아가, 그 아이를 보고 싶어, 그런데 다시 못 볼까 가슴 조리며 잠들지 못했던, 그때의 순수했던 나로 돌아가, 또 숨이 막힌다. 사랑하는 아이와의 단절. 숨 막히는 고통인데 행복한 추억이다. 그러나, 지금 내 삶은 한 때 행복했으나 다시 얻을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사랑과의 단절이니 역시 익사할 듯한 두려움일 뿐이다.


늙어 죽을 순간이 멀지 않은 나는 억지로 지난날 행복을 기억해내야 했고, 잠시 행복했고, 그 후 더 가슴이 답답해졌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다시 그 소녀를 더 많이 사랑하고 싶지만, 이미 불가능하니 절망이다. 절망. 그것이 지금의 내 삶인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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