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씨 Oct 14. 2022

죽자니 청춘이요, 살자니 고생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내가 노인이 될 거란 건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노인이 되고 말았으니 당황스럽고 겁이 나고 어색하다.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노인들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과 애정, 아니 연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할까. 노인, 늙은이. 그것은 약해지고 병들고 소외당하고, 무기력하고 서럽고 외롭고, 그리고 곧 죽을 거란 말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왜 노인들이 이렇게 많이 사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다.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들, 빈병을 모으는 할머니들,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허리 굽은 할머니들, 한쪽 팔과 다리를 흔들며 겨우 걷는 할아버지들, 개천가 벤치에 앉아 실없는 얘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그리고 멀찍이 떨어져 그냥 말없이 혼자 앉아 있는 할아버지들. 노인들은 죽어감이고 추함이고 연민일 뿐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이렇게 아무런 즐거움도 기대도 없이 그저 죽지 않으니 살고 있는 노인들이 많다. 그리고, 나는 우리 동네에선 어린 노인이다.


내 엄마는 아흔두 살이다. 혼자 살다가 아파 죽을 뻔했고 누나가 모시다가 누나도 아파서 죽을 고비를 넘기니 이젠 내가 엄마를 돌본다. 크게 힘든 건 없다. 아침 겸 점심은 아내가 만든 샌드위치를 드신다. 저녁에는 소고기 뭇국이나 도가니탕이 기본이다. 그리고 큰 접시에 밥, 샐러드, 무채, 그리고 스팸이나 아내가 만든 어묵조림을 조금씩 잘 배치해 드리면 된다. 엄마는 잘 먹는다. 어떨 때는 너무 잘 먹는 게 얄미울 정도다. 이게 다가 아니다. 과일과 떡은 늘 식탁에 준비해 놓아야 한다. 그리고 삶은 달걀을 하루 한 개씩 먹고, 믹스 커피를 하루 두 잔 마신다. 어쩌다 식탁에 과일이나 떡이 떨어지면 엄마는 화를 낸다. ‘아무리 뒤져도 먹을 게 없어.’ 누나는 그게 치매란다. 그럼 어쩌랴. 늙으면 안 먹고 못 먹어 걱정인데 내 엄마는 너무 잘 먹으니 다행이다. ‘엄마, 변비는 없어? 있음 말해 약 사다 줄테니까.' 엄마가 싫어하는 말이다. 변비라는 말자존심이 상한 거다.


하루 한 번씩 엄마를 산책시켜 드린다. 종일 침대에서 잠만 자니 다리 힘이 빠질 게 아닌가. 처음엔 산책을 좋아했다. 작년에 아픈 다음부터 병원과 집에만 있었으니 답답했으리라. 여름 동안 너무 더워 산책을 못하다가 가을이 되면서 다시 걷기 훈련을 했다. 그런데, 엄마가 꾀를 피운다. ‘일어난 지 얼마 안돼서 어지럽다. 오늘은 날씨가 안 좋다. 바람이 많이 분다.’ 그리고 핑곗거리를 찾지 못하면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나가고 싶지 않네.’


며칠 전 엄마와 산책을 나갔다가 동네 대장이신 할머니를 만났다. 동네 할머니들이 잘 모이는 개천가 벤치에 앉아계신다.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누구? 어머가? 네 제 어머니입니다. 같이 사나? 네 제가 모시고 삽니다. 효자다. 엄마와 할머니가 인사를 한다. 어머니는 나이가 얼마나 됐나? 올해 구십 둘입니다. 대장 할머니가 말씀하신다. 난 백 살이다 백 살. 귀가 어두운 엄마한테 통역을 했다. 엄마, 이 할머니는 백 살이야. 엄마는 눈이 커지면서 놀란다. 그리곤 어른 앞에 선 어린애처럼 공손해진다. 백 살 앞에선 구십 둘은 어린 애인가 보다.


‘죽자니 청춘이고 살자니 고생이다.’ 백 살 할머니는 그런 노래가 있다며 말씀하신다. 안 죽어 안 죽어. 아픈 데가 없으니 안 죽어. 내 엄마가 조용하다. 엄마의 신파 십팔번을 할 수가 없는 거다.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냐. 죽어야 되는데 왜 이렇게 오래 사냐. 이게 엄마의 십팔번인데 백 살 할머니가 같은 말을 하시니 어린 내 엄마는 조용하다.


할머니가 또 묻는다. 어머니 모시고 사나? 네. 그럼 됐다. 아들하고 사니까 안 죽어도 된다. 엄마한테 할머니 말씀을 전하나 엄마는 무덤덤하다. 아들하고 사니까 좋재? 귀가 어두운 엄마한테 또 통역을 하면 엄마가 대답한다. 네 좋죠. 진심일까? 아들이 효자다. 그렇재? 엄마는 또 대답한다. 네 그럼요.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더 잘하지 못함이 불만일까. 당연한 것을 뭐 그렇게 효자라고 하느냐 의아해할까. 아님 아무 생각이 없을까.


할머니한테 묻는다. 따님 있죠? 없어. 없어요? 있어. 어디 살아요? 저기 먼데 산다. 그런데 나한테 올 딸은 없다. 아들은요? 없어. 나한테 올 아들은 없다. 아들과 딸이 있지만, 올 자식들이 없다신다. 백 살 할머니는 개천가 빌라에서 혼자 사신다. 도우미가 와서 빨래하고 청소해주고 먹을 것을 차려주고 간단다. 그래도 백 살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가. 대단하다고 칭찬해야 하는 건가, 자식들을 욕해야 하는 건가, 할머니가 짊어진 외로움과 슬픔을 헤아릴 수나 있는 건가.


할머니 한 분이 더 오셨다. 두 분은 잘 아는 사이다. 내 엄마를 소개하고 나도 인사를 드렸다. 그 할머니는 85살이니 막내다. 우리 동내에선 어린 노인이다. 그래도 당뇨에 허리도 아파서 잘 못 나온단다. 그리곤 나를 보고 말씀하신다. 젊은 인 줄 알았는데 나이가 많네. 늘 집에서 날 보셨단다. 매일 강아지들 산책시키고, 할머니 유모차 뒤에서 따라다녀, 젊은이가 기특하다고 여겼단다. 우리 동네에선 나는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다 나를 안다. 노인들도, 젊은이들도, 모두 나를 안다. 하루도 안 빠지고 강아지를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시키는 남자. 늙은 어머니 모시고 산책시키는 역시 늙은 남자.


백 살, 팔십다섯 살 할머니가 엄마한테 말한다. 아들이 효자다. 이렇게 엄마 잘 모시는 아들 없다. 효자 아들하고 사니 안 죽어도 된다. 내가 할머니들의 말씀을 귀에 대고 전하면, 엄마는 무덤덤하다. 엄마한테 난 효자이고, 불효자이고, 그저 당연한 일을 하는 자식이고, 어쩌면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저 기억하고 있는 아들일 뿐이리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런 영화에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겠다. 노인에 관한 영화가 아니니까. 노인이 주인공인 소설, 영화, 드라마, 그리고 노래는 거의 없다. 주인공은 늘 젊은이들이다. 자식은 있지만 찾아오는 자식이 없어 혼자 사는 백 살 할머니와, 온종일 먹기만 하고 자기 생각만 하는 얄미운 아기 같은 구십 둘의 내 엄마 할머니, 그리고 팔과 다리를 떨면서 기를 쓰고 걸어 다니는 할아버지, 허리에 복대를 차고 먹는 약이 수십 알이라고 안 아픈 데가 없다는 할머니, 동네 폐지와 빈병을 주워 몇 푼이라도 만들려는 노인들. 숫자도 많고 아직도 살아있고 나라의 모든 통계에 잡히는 사람들이지만, 주인공은 커녕 자식들과 사회의 짐이 되어버렸고,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아무 의미 없고 그저 외롭고 아프고 슬픔이지만, 죽지 않으니 아직 살아있는 노인들의 인생은, 인생인가.


내 엄마는, 그리고 혼자 사는 백 살 할머니는 정말 죽고 싶을까. 내 엄마는 늘 어서 죽고 싶다고 말하나 조금만 아프면 온갖 약을 찾아 먹고 꿀물과 홍삼물을 먹으면서 난리를 친다. 죽고 싶지 않은 거다. 그러다 아프지 않고 살만 하면 삶이 너무 외롭고 무의미해서 죽고 싶다고 말하니 그건 진실일 수 있다. 백 살 할머니도 그렇겠지. 아픈 데가 없단다. 아프면 병원에 있을 텐데 안 아프니까 이렇게 혼자 외롭게 사는 거란다. 아이러니. 살만큼 아프지 않으니 병원에 있지 않고 혼자 산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안 죽느냐고 투덜댄다. 아프면 요양병원이든 어디든지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살 것이며 그땐 지금 죽고 싶지 않다고, 더 살고 싶다고 소리칠 거다. 연약한 인간의 모순.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


노인의 삶의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아니 의미가 있기는 한 걸까. 젊음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공부를 하고 직장을 다니니, 오늘도 내일도 할 일이 있고, 목표도 꿈도 성취감도 있을 것이니 삶의 의미를 따질 이유가 없다. 사랑하고 자식을 낳고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하고, 승진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다음 단계가 있는 삶은 암담하지 않다. 그러나 노인은, 아무것도 없다. 젊음도 직장도 건강도 없지만, 무엇보다 다음 단계가 없다. 아니 있다. 죽음. 정해진 죽음을 향해 그저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단계의 삶에서 무슨 즐거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야생에서 다친 짐승은 그저 죽거나 잡혀먹을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아직 살아있으나,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노인이 그렇다.


남자의 평균수명이 80대 초반이며, 소위 말하는 건강 수명은 70대 중반 즈음이겠으니, 나의 삶은 이제 10년 남은셈이다. 어차피 죽을 인생이니 다 포기하는 건가. 어차피 곧 죽을 것이니 하고 싶은 것들만 실컷 할 것인가. 이것이 정답이고 저것이 옳다고 말들 하나, 현실이 허락하지 않는다. 더 늙은 부모를 돌봐야 하고, 자식들을 도와야 하고, 아직도 활기찬 아내를 떠날 수 없다. 몸이 아프고, 자신이 없고, 아무도 날 원하지 않으며, 세상이 나를 이미 죽은 자로 취급하지만, 그래도 죽지 않으니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강아지 세 마리를 키운다. 다섯 살, 두 살, 그리고 한 살. 갑자기 걱정이 된다. 이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죽을 수 있구나. 그럼 이 아이들은 어떡하나. 마지막으로 땅을 밟고 싶어 집을 짓고 있다. 생각보다 늦어진다. 아마 내년 봄이면 이사 갈 수 있겠지. 그러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이사 가고 내가 아프면 어떡할까. 암에 걸려 입원을 하거나, 걷지 못하게 되거나, 그럼 그 집에서 더 살지 못할 텐데. 마음이 분주하다. 유언장을 써야 하는 건가. 은행 통장과 집문서, 그리고 들어놓은 몇 개의 보험을 잘 정리해 놓아야겠다. 그래야 내가 갑자기 죽어도 아내와 자식들이 힘들지 않을 테니까.


노인은 종일 잠을 자거나 티브이를 본다. 그리고 걸을 수 있다면 집 근처 벤치에 마냥 앉아있다.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랑도, 신나는 일도 전혀 없다. 죽지 못하니 사는 것처럼, 사는 게 신나지 않지만 아직도 살아 있으니 시간을 보내야 할 뿐이다.


노인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고립이다. Disconnected. 모든 외로움과 슬픔은 고립에서 비롯된다. 자식이 있으되 찾아올 자식이 없는 고립이다. 의지하고 정을 나눌 남편이나 아내가 없는 고립이다. 할 일이 없는 고립이며, 갈 곳도 찾아오는 이도 없는 고립이다. 신나는 일도, 설레는 일도 없는 감정의 고립이다. 그리고, 이런 고독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절망적 고립이다. 노인은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되 세상은 노인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러니 노인은 고립되고 외롭다. 그게 노인의 말 뜻이다. 아, 다정한 늙은 부부, 자식들의 효도를 받는 늙은 노인들, 친구들과 재밌게 지내는 노인들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들은, 외로운 노인들이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내게도 행복했던 때가 있었던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