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칠순 잔치 때는 마당에서 친인척들과 함께 행사를 치렀다.
할머니께서 돌아가 시 전 유언을 남기셨다. 우리 공떡은 시집와서 생일상 한번 제대로 차려 준 적이 없다. 나 죽거든 꼭 니 에미 생일 잘 챙겨 줘라 하셨다. 그 후 어머니 칠순이 돌아오자 멀리 흩어진 친인척들까지 다 한자리에 모였다. 90년 초 비디오 문화가 유행하던 때라 칠순 때 찍어두었던 비디오를 몇 년 전 다시 유에스비에 담아두었다.
지금도 형제들이 모이면 순간을 잡았던 그날 하루의 모습을 티브이로 연결해서 볼 때가 있다. 젊은 시절 춤추고 노래하며 마당을 휘젓고 나오는 자기 모습들이 나오면 쑥스러워 자리를 슬그머니 피한다.
형제들은 똑같이 분홍색 저고리 연두색 치마를 입었다. 친인척들도 점잖게 한복을 입고 오셨다. 고향 친인척, 이웃, 마을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을 한가운데 흐르던 냇가 빨래터도 그날은 텅 비어있고 대신 음악에 맞추어 냇물도 신이 난 듯 흘러가고 있었다.
옛날에는 놀이문화가 별로 없었던 때라 연세 드신 시어머니, 시아버지를 섬기고 계신 가정에서는 명절 다음으로 생신이 가장 큰 행사였다. 동네 분들을 초청해서 아침 식사 대접하는 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어느 집 누가 생신이 돌아왔는지 그날 냇가 빨래터 풍경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각가지 푸성귀도 씻고 객지에서 살고 있는 자녀들이 사들고 온 생선도 손질하느라 비린내가 풍겼다. 들 일 마치고 들어서는 어르신들에게 내일 아침 우리 집에 오셔서 차린 것은 없지만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드십시다” 인사하느라 빨래터가 시끌벅적했다.
일 년 세 번 아버지, 어머니 기일, 여름휴가. 공식적으로 고향을 찾아간다.
이 나이 되도록 고향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은 막내오빠 덕분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감나무 심어 과수원을 했던 우리 집이 이제 막내오빠가 사과를 심어 사과농장을 하고 있다. 올여름 많은 비가 전국적으로 쏟아졌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우리 동네는 항상 장마철이 되면 늘 상 아찔한 상황이 벌어진지라 걱정이 앞선다. 삼 년 전에도 많은 비가 쏟아져서 집 앞에 흐르는 냇물과 강물이 합쳐진 곳에 둑이 터져 동네까지 물이 들어왔다. 가운데 골목까지 물이 들어와 마당에서 손을 씻었다고 한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농작물 피해가 컸고 지금도 그때 무너졌던 둑을 공사하고 있다. 올해도 역시나 칠 월 달 내내 하늘이 구멍 난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집 앞에 놓인 다리 위로 거 센 물살이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하고 있는 영상이 동네 카톡방에 올라왔다. 오빠에게 전화드렸더니 다행히 비가 멈춰서 다리 발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옛날에도 비만 멈추면 순식간에 물이 빠지는 것을 보았던 터라 안심이 되었다.
산골짝이 동네였어도 옛날에는 백 여가구가 넘게 살았던 마을이었다. 지금은 군데군데 빈집도 많고 사십여 명 정도 살고 계신데 새로 집을 지어서 옛날 풍경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같이 살고 계시는 분들이 자기 식구들 생일처럼 동네 사람들 생일도 다 기억하고 있다.
올해 막내 오빠 칠순인데 다 같이 모여 언제 밥을 먹는지 마을 회관만 가면 화제라고 한다.
우리 고향 마을은 현재 육십 대 중반 가장 젊은 층이고 칠십 대도 젊은 층에 속하는데 올해 세분이 칠순이라고 한다. 오빠는 칠월 마지막 주 토요일 동네 분들 모시고 조촐하게 점심 대접하기로 했다. 그래서 여름휴가차 막내 오빠 칠순잔치(?)로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앞으로 얼마나 우리 형제들이 모일 수 있을까? 벌써 칠 형제 중 두 분이 떠나고 나니 남은 형제는 다섯 명뿐이다. 그런데 불가에 뜻을 두고 있는 형제는 행사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 각자 사는 가치관이 다르니 존중할 수밖에 없지만 모이는 자리에 같이 하지 못하니 섭섭하기 그지없다.
장마가 끝나가고 폭염이 이어지자 아침마다 마을회관에서 이장님께서 마이크로 잠잠한 동네를 깨운다. 햇볕이 강한 시간에는 들에 나가지 말고 집안에서 휴식하라는 안내 방송을 자주 하고 있다. 방송이 아니어도 대부분 무더운 여름철에는 이른 새벽에 나가서 농작물을 보살핀다. 그래서 시골 점심시간은 빠른 11시 30분이다. 삼 년 전 어머니 백세 생신 때도 동네분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런데 그때 뵙 던 분들 중에 안보이신 분들이 계셨다. 한 분 한 분 인사드릴 때마다 젊었던 시절이 필름처럼 돌아갔다.
새 각시 시절 항상 머리에 수건을 쓰고 얼굴 반쯤 가리고 들이나 빨래터를 나왔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낯을 가리던 수건이 올라갈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수건 속에 감추인 얼굴을 보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새롭다. 빨강치마에 파란색 저고리 입고 하얀색 앞치마 두르고 부끄러운 듯 고개 숙이고 다녔던 새 각시 언니들이 지금은 팔십이 넘었다. 시부모님 모시고 농사지으며 자녀들도 훌륭하게 성장해서 각자 삶의 터전에서 한몫을 톡톡히 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산골짝이 동네에 용감하게 시집와서 고향 마을을 굳건하게 지켜낸 이 언니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편 존경심과 함께 한쪽에서는 가슴이 아려온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더니 무쇠처럼 단단했던 언니들이 이제 지팡이를 의지하고, 핸드카를 밀고 다니신다.
다리 수술 하셨어도 여전히 힘든 일도 척척 해내신 우리 새 돔 당숙모님도 계신다. 반갑다는 표현이 늘 "얼릉 밥 묵어" 하시곤 자리를 만들어주시는 속 깊은 분이시다
옛날에는 농번기만 돌아오면 바빠서 머리 손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파마머리는 축 쳐지고 머리끝은 햇볕에 갈라졌다. 어느 정도 바쁜 농번기가 끝나 갈 때쯤 읍내에서 미용사가 출장 왔다.
순서를 정해놓고 머리 커트하고 난 후 파마가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다들 구르프를 머리에 감은 채 수건을 쓰고 막간을 이용해서 집안일과 다 끝내지 못한 들일을 하러 나갔다. 다음날 동네 새 각시 언니들 머리는 하나 같이 뽀글뽀글했다. 서로 마주칠 때마다 파마머리가 잘 나왔느니 내 머리는 벌써 풀어진 것 같다느니 하며 머릿결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나하고 동갑인 막내 올케는 몸짓도 적은데 겁 없이 과수원 하는 오빠에게 시집을 왔다. 종갓집이라 제사, 행사도 많았다. 그때마다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며 음식 장만했다.
친정어머니 칠순 잔치 때도 일가친척들 오실 때마다 상차림 하느라 그때 찍은 비디오테이프에는 언니 얼굴이 별로 없다.
요즘에는 시골에서도 행사가 돌아와도 옛날처럼 일손도 없거니와 시대 변천에 따라 집에서 음식은 하지 않고 동네 전용 음식점 섬진식당에서 치른다. 옛날에는 밴드도 부르고 한창때 불렀던 이미자, 남진, 나훈아 노래도 한 곡조씩 부르고 잘 돌아가지 않은 몸으로 음정, 박자 놓쳐가며 춤추며 놀았다. 항상 바쁘고 힘든 농사일이지만 틈새를 이용해서 유흥도 즐기고 서로 응어리진 마음도 풀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다리가 성치 못하니 식사하시고 담소를 나눈 뒤 자리를 뜨셨다.
우리 형제들은 학교 다닐 때 소풍을 자주 갔던 도림사 골짜기를 찾았다. 많은 차들이 차박도 하고, 군데군데 가족들이 골짜기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길도 잘 다듬어진 도림사 골짜기는 카페도 있고 옛날 우리가 학교 다닐 때와 전혀 다르게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높이 솟은 나무 가지 사이에 햇빛 담아서 보내준 작은 창문이 그림처럼 하늘에 펼쳐져 있다. 나이 들수록 오늘이 제일 젊은 날이라고 사진을 찍어댔다. 고향을 지켜준 막내 오빠, 올케 덕분에 찾아갈 고향이 있어서 감사하다. 그런데 이번 막내 오빠 칠순 때 올케 언니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린다.
"나는 이제 저분들이 돌아가시면 누구랑 놀까".? 텅 빈 고향 마을을 생각하니 마음이 울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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