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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숙 Nov 12. 2024

새벽 마을버스에서 만난 사람들

베이비 붐 세대들 살아낸 날  살아갈 날


오늘 손녀 돌보는 날이다.

새벽 알람소리가 우렁차다. 그도 그럴 것이 핸드폰 두 대와  탁상시계까지 울린다

아침 형 인간이 아닌 나를 잘 아는 남편이 깨우기 위한 조치이다.     


옛날에는 장 닭이 우는 소리에 잠을 깼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부스럭부스럭

엄마 옷 입은 소리, 할머니 담배통 찾는 소리가 들린다.

윤 씨 아저씨는 벌써 왔는지 뒤 안 정제에서  구정물 붓는 소리가 들린다.

간밤에 깎아먹은 무, 고구마 껍질이랑  짚, 쌀겨 등 함께 버물려서 쇠죽을 끓인 모양이다.

가끔 할머니는 아침 드시기 전  다 끓인 쇠죽 맛을 볼 때가 있다.

맛이 싱거울 때는 무도 더 삐지고 보리쌀도 넣었다.

할머니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시래깃국을 맛보시며 옆 집 소는 살이 쪄서 등짝이

번들 번들 하더라만.

우리 소는 먹여도 살이 오르지 않는다고 걱정하셨다.

이른 봄 독새풀이 언 땅을 겨우 밀어내고 연두 잎을 드러냈다.

겨우 내내 푸른 잎을 먹지 못한 소를 먹이려고 윤 씨 아저씨는 망태를 들고 집을 나섰다.

아직도 앞 산 꼭대기에는 하얗게 눈이 쌓였다.

농사짓는데 소가 가장 큰 일꾼이다 보니 할머니는 우리들보다 소 살찌는 것에 신경을 썼다.

나이가 많이 들었나 보다. 현재보다 옛날 고향집 새벽풍경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베이비 붐 세대인 우리들은 세끼 밥만 먹으면 부자였다.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 친구들을 위해 교실 뒤뜰에 가마솥을 걸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옥수수 죽 끓이는 냄새가 온 교실을 뒤집어 놓았다.

수업 마치는 종이 울리자마자 빈 도시락을 챙겨 들고 우르르 몰려 나가자

선생님이 교탁을 회초리로 쳤다. 그러나 친구들은 아량곳하지 않고

숟가락으로 빈 도시락을 두들기며 뒤뜰로 달려갔다.

육 학년 오빠들이 다시 줄을 세웠다.

노란 옥수수 죽을 소사 아저씨께서 차례차례 도시락에 퍼주었다.

옥수수 죽 대신 밀가루로 빵을 쪄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그때는 서로 조금이라도 큰 것을 차지하려고 짝꿍과 싸우기도 했다.




쌀이 부족했던 1960년대 정부에서 분식을 장려했다.

동네 반장님이 집집마다 다니며 수요일은 “분식의 날”이라고 알려주었다.

굳이 분식의 날이 아니어도 봄이 되면 양식이 없어 밀가루로 끼니를 때우는 가구가  

허다했다. 도시락도 혼식을 권장을 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일제히 도시락 뚜껑을 열고 선생님이 분단별로 도시락 검사를 했다.

그러나  쌀밥만 싸 온 학생은 몇몇 되지 않았다.  

         



아들, 며느리가 월요일, 화요일은 일찍 출근한다.

아직 잠들어 있는 손녀딸을 보기 위해 여섯 시쯤 집을 나섰다.

이른 새벽인데도 마을버스에는 나와 비슷한 연배들이 많다.

궁금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아는 집사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대부분 청소나 요양 보호사, 아파트 경비원으로

근무하시는 분들이란다. 우리 세대들은 어린 시절부터 열심히 살았다.

몸에 밴 부지런함으로 형편이 넉넉해도 일하는 이웃들이 많다.

그 반면에 부모님 섬기고, 자녀들 키우느라 정작 노후 준비를 못한 탓에 아직도 일하는

우리 세대들도 많다.




얼마 전 임플란트 하느라 한동안 치과를 다녔다.

점심시간보다 좀 이른 시간에 치과와  가까운 김밥 집을 찾았다.

한참 직원들이 김밥을 싸느라 분주했다.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연세 드신 할머니께서

밥 푸는 것을 보았다. 밥 푸는 것도 기술이다. 밥알이 뭉치지 않도록 주걱으로 사알살

퍼서 한 김 나가도록 퍼 담는 모습이 예술이었다.

주인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김밥 집에서 밥 푸는 것만 벌써 몇 년째란다.

써주는 사장님도 대단했고 그 연세에 일하시는 할머님도 대단했다.

몇십 년 동안 가정에서도 식구들 위해서 밥을 푸셨을 것이다.

지금도 밥을 푸고 계시니 '장이'가 분명하다.

     



새벽 마을버스에서 만난 칠십 대 언니도 아파트 청소하러 간단다.

젊은 시절 돈도 많이 벌었는데 남편이 사업하다 망했단다.

딸은 시집가서 잘 사는데 귀하게 키운 아들이 아직 취직이 안 돼서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단다.

이십 분 정도 되는 거리에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금방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다.

근디 집이는 어디 가요? 하고 물었다.

새벽에 아들, 며느리가 직장 나가서 손녀 돌보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내 자식 키울 때는 멋모르고 키우다가 손자, 손녀들은 참말로 이쁩디다.

이뻐도 애기 보는 것이 힘든디. 내리는 순간까지 말을 이어갔다.     




아파트, 요양보호사, 청소 등 궂은일이지만 꼭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인력이다.

노후 설계 전문가 "강창희 대표님"께서는 가장 확실한 노후대비는 "평생현역"이라고 부르짖는다.

퇴직 후 재 취업 월 오십만 원의 근로소득은 이억 원의 정기예금과 같은 효과라고 한다.

부부가 체면을 버리고 허드렛일이라도 하겠다는 마음 가짐도 노후 대비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실현 취미 활동을 하라고 권면한다.




한 가지 더 노후대비를 위해 '우리들 교회"를

소개한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고난을 서로 나누며

그 주 말씀으로 삶을 해석하며 간다.

나이 들어가도 외로울 틈이 없다. 

부부목장, 여자 목장으로 한주

두 번씩 모여 요즘에는 시래깃국 끓이고  무생채 버물려서 집밥 먹는 즐거움도 크다.

매일 들려주는 말씀이 성경 속 이야기가 아닌

빚지고, 원통하고, 환란당 한자들이 모여

자기 삶을 말씀으로 해석하며 살아내고 있다.

큰 사업체를 운영하다 부도가 난 회장님도

가장역할하기 위해 경비 제 이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내들도 명문대를 나왔어도 현실을 인정하고 그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온

실력으로 요양보호사나 파출부 일도 당당히 하고 있다.

평범한 삶이  오늘 하루 잘 사는 것이

가장 비범한 삶이라는 걸 나이 들어

말씀 통해  깨닫고 간다.

“진정한 경제적 자립이란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자기 자신을 맞추어 넣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가슴에 콕 박히는  명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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