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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숙 Oct 29. 2024

월남치마가 유행하던 시절

1970년대  월남치마 유행하자 도시로 나간 언니 오빠들


도시로 간 언니들은 설이 돌아오자 무늬가 얼룩달룩한 치마를 입고 왔다.  

잔잔한 꽃무에 마름모로 누빈 '월남치마"였다.

이름도 생소한 '월남치마'는 베트남 전쟁 때 파병 나간 우리 오빠들이 아내를 위해 선물로 가져와 유행되었다.

도시로 나간 언니들이 월남치마를 입고 오자 가사와 농사일 돕던 언니들도

하나 둘 앞서 나간 언니들 따라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명절이 되면 밀가루로 분칠 한 것보다 더 희고 고운 얼굴로 고향을 찾아왔다.

겨울인데도 아랫다리 윗다리에는 꽃이 핀 것처럼 화사했다.       


        



올케 언니는 결혼하고 종갓집 가풍을 익히기 위해 한 달 시집살이를 왔다.

시집 가풍이 별게 아니었다.

한 동네 살고 있는 웃어른들과 형제, 가까운 대 소간의 얼굴 익히기 위해서이다.

언니 짐 속에는 시골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혼자 자기 무섭다고 저녁마다 나를 데리고 잤다.

하루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면 엄마에게는 특유의  냄새가 났다.

찬 바람 냄새, 솔갱이 냄새 어쩔 땐 가리불에 구운 갈치냄새도 났다.

그래도 그 냄새가  좋았다. 그런데 언니에게는 화장품 냄새가 났다.

작은엄마, 당숙모 집에서 나는 냄새보다 더 좋은 향이 났다.

그보다 더 기이한 것은 분홍색으로 누빈 잠옷이었다.

가장자리에는 공주 드레스처럼 레이스 달려서 더 예뻐 보였다.

외출할 때도 얼마든지 입을 수 있는 옷을 밤에만 입고 자는.

분홍색 곱창 머리띠에 같은 색 잠옷을 입은 언니가 저녁마다 화장을 다시 하고 잠을 자는 것도 신기했다.

저녁마다 부러워서 만져보았다.

이듬해  설날 분홍색 잠옷을 사 왔다.

속으로 겉옷이면 좋았을 텐데 잠옷이라 외출할 때 입을 수 없어서 아쉬워했다.


          



추운 겨울 햇살이 퍼진 개울가에 짐이 모락모락 나는 빨랫감이 가득 담김 함지박이  

하나 둘 모인다. 동네 한가운데로 가로지르는 냇가에는 얼음이 얼었다.  

설이 가까워오자 마음이 급한 엄마들은 밀린 빨랫감을 빨기 위해 방망이로 얼음을 깼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가 밤새 오줌. 똥을 싼 고쟁이와 이불 홑청이  온갖 그림으로 어지럽다.

얼룩진 홑청은 애벌빨래로 빨아 양잿물을 조금 넣고 가마솥에서 푹푹  삶았다.

양잿물에 삶은 빨래를  손으로 조물거릴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빨래터에서 방망이질을 하고 있는 엄마들 모습이 어쩔 땐 공격적으로 보일 때가 있었다.

빨래를 내려치며 입에서는 쉬 쉬 하는 소리가 입김과 함께 하얗게 퍼졌다.  

방망이 소리가 차닥 차닥 때로는 난타 장처럼 흥겹게 들리기도 했다.    


       



새언니도 작은 꽃이 새겨진 빨간색 월남치마를 입고 그 위에 하얀색 앞치마를 입었다.

우리 집은 기억자로 된 나무 마루여서 한 번씩 닦을 때마다 시간이 걸렸다.

새언니는 아침밥을 먹고 난 후 저녁 준비하기 전 기억자로 된 마루를 쓸고 닦았다.

그리고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냇가로 갔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겨울철 빨랫감을 들고 나올 때는 뜨끈뜨끈한 물 한 바가지 씩 데워서 나왔다.  

얼음 깨고 빨래하다 손이 시러우면 뜨거운 물에 잠시 담갔다.

그때마다  온도차로 손이 근질근질했다.

그런데 언니는 면장갑에 고무장갑을 끼고 빨래도 빨고 설거지도 했다.

처음 보는 고무장갑이 신기했다.

태화고무에서 1972년 가정용 라텍스장갑을 처음으로 생산해서 보급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아직도  농촌에는 고무장갑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명절이 되면 목까지 올라온 폴라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오빠들은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친구 따라 또 도시를 떠나는 오빠들이 해년마다 많아졌다.

상 두 개 펴서 식구들이 빙 둘러서 밥을 먹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랑 엄마는 보리가실이나 모내기할 때 일손 도울 오빠들이 떠나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청년들만 떠나는 게 아니었다. 우리 윗집에 살았던 애숙이 엄마를 우리보다 항렬이 높아서 아짐이라고 불렀다. 겨울철이 되면 바느질감을 가져와 본인이 직접 아이들 옷을 지어 입혔다.

아이들도 엄마 따라와서 친해지자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

바쁜 농사철이 닥치면 열일 제치고 우리 집 일손을 도와주었다.

건너편에 살았던 권택이 오빠네도 큰 대사 치를 때나 바쁜 일이 있으면 친형제처럼 달려와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분들이 이사를 갔다. 엄마는 그때마다 자식들이 떠나는 것만큼이나 아쉬워했다.


내 기억으로는 월남치마가 유행하던 시기부터 점점 농촌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겨울에도 고무장갑이 없어 뜨거운 물 한 바가지 들고 나와 빨래하던 아낙들이 위아래 냇가에 즐비했다.

새마을 노래가 울러 퍼질 때마다 빨래터도 청소하고 마을길도 넓혔다.

그러나 젊은 청년들은 계속 도시로 떠났다.  

처음에는 아저씨만 떠나더니  나중에는 가족들을 데려갔다.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자 냇가내려가는 계단도 만들고 빨랫줄도 만들어서 .

무거운 이불 빨래는 걸쳐서 물기뺐다.

응달쪽으로 가려면 동네를 가로지르는 냇가를 건너야 했다.

다리까지 올라가기 귀찮으면 중간에 놓인 징검다리 겅중겅중 뛰어서 갔다.



지금은 집집마다 세탁기가 빨래 빨고 고무장갑도 용도가 다양해서 구색대로 갖추고 산다.

징검다리도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냇가에 흐르는 물은 누구도 건드리는 사람 없이 자기들끼리 흐른다.

얼마 전 윗다리 아랫 다리을 다시 놓았다. 높다란 다리가 동네 가운데 위엄을 갖추고 서 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때는 흙다리였다.

비만 오면 떠내려 갔다.

그래도 겨울이 되면 어른들은 산에서 솔갱이 쳐서 형태를 이어 만들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다시 다리를 만들었다. 여름이 되면 또다시 흙다리는 떠내려가겠지만

1970년 초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시멘트로 된 다리가 동네 중간에 하나 놓았다,

그리고 편리하게 섬진강 쪽으로 나가기 좋은 동네 어귀에 하나 놓았다.

여름이 되면 초저녁에 가운데 다리는 할머니들이 비료 포대로 자리를 깔았다.

아랫다리는 동네 아저씨들이 차지했다.

군대 다녀온 이야기 도깨비, 귀신 이야기 듣다가 귀신이 다리 붙잡을까 무서워 숨이 헐덕거리도록 뛰어서 집으로 왔다.

돌계단 몇 개만 내려가면 내려갈 수 있는 냇가였다. 이제는 그 다리도 동네 길보다 훨씬 높아져서 사다리를 타고 겨우 내려갈 수 있다. 해가지면 내려가서 돌 몇 개만 들춰내도 대사리를 잡던 때가 엊그제 다. 이제는 내려갈 수 없는 성역이 되었고 그저 흘러가는 냇물만 고개 숙이고  바라볼 뿐이다.


섬진강이 가까워서 동네가 물난리가 자주 났다.

동네주민들을 위한 배려지만 옛날 모습 조금 살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사다리 타고 냇가를 내려가기보다  돌계단을 만들징검다리도 놓았으면 좋았으련만

 욕심일까? 


                                                

# 월남치마 # 폴라티# 청바지 #언니 #오빠

# 고무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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