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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숙 Oct 13. 2024

키오스크와 쌀, 밀가루  한 됫박

고흥댁 열네 번째 이야기 종손 장가가는 날

가을이 되니 모바일 청첩장이 자주 날아든다.

요즘 뉴스에서도 심심찮게 결혼식 축의금으로  고민하는 글들이 올라온다.

결혼식장에 키오스크까지 등장해서 여론이 갈리고 있다.

키오스크는 하객들이  신랑 측, 신부 측 중 하나 선택하고 축의금 입력하고 결제하면 식권과 주차권이 자동으로 발급된다.

축의금 절도와 같은 문제를 예방하고 바쁜 결혼식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축하와 감사를 서로 나누는 결혼식이 고지서 납부하는 것처럼  정이 없어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더구나 기계에 익숙지 않은 어르신들의 불편도 많을 것 같다.

키오스크 여론이 뜨거운데 우리 집 종손 오빠 결혼하는 날이 어제일처럼 새롭다.




오랜만에 엄마는 검은색 몸배 아버지 와이셔츠로 만들어 입은 블라우스를  벗었다. 곱슬머리에 가르마 타고 동백기름을 랐다. 그리고 일곱 살짜리 주먹만 한 낭자에 비녀를 꽂았다.

반짝이황금색 한복을 차려입고 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을 신었다. 우리 엄마 멋 낸 모습 처음이다.

아버지 열여섯 살 어머니는 열일곱 살 결혼해서  얻은 첫 장손이다.

엄마! 나도 서울 구경하고 싶은디?

하룻밤만 자고 내려올 것인데 뭐드게 따라오냐 글고 우등상은 못 받아도 개근상이라도 받아야제.

아픈 곳을 콕 찌르니 입만 내밀고 말았다.

하룻밤이지만 처음으로 엄마랑 떨어지게 되어 섬진강까지 따라나섰다.

사공 아저씨가 매어있는 줄을 가슴까지 당기자 나룻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살을 가르 천천히 나룻배는 엄마를 싣고 건너편으로 갔다.

강둑으로 올라서자 펄럭이는 한복 자락을 한 손으로 잡아당기며 모래사장에 서있는 나를 보고  어서  돌아가라고 손짓을 했다.




그때가 1968년 늦가을이다.

큰오빠 장가가는 날이 정해지자 집안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한옥으로 된 지붕에 빗물받이 양철도 새로 달았다.

마루 벽마다 한글을 깨친 형제들이 자랑삼아 낙서를 줄줄이 해댔다.

다시 하얀 석회를 칠하자 틈틈이 낙서했던

우리 형제들  작품? 도  사라졌다.

마루도 묶은 때를 벗겨내느라 늦가을인데도 땀이 났다.

바쁜 철 미처 치우지 못해 말라붙은 닭똥도 물을 붓고 닦느라 막내 당숙모가 애를 썼다.

나이가 같은 고모랑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다니자 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더러워진 걸레와 방망이가 담긴 세숫대야를  

건네주었다.

아이! 또랑에 가서 방망이로 탕탕 두들겨서  맑은 물이 나도록  짤짤 흔들어서 빨아 오니라. 냇가에서 방망이로 두들겨서 걸레를 빨아 올 때마다 할머니는 “개보다 낫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깨끗이 닦은 마루에 니스까지 칠하고 나니 새집이 되었다.




엄마는 결혼식만 참석하고 집에 오자마자 다시 검은색 몸배를 입었다.

1960년대 우리나라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가구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집안  애경사에  부조가 밀가루 한 바가지가 대부분이었다.

가끔 쌀 한 됫박도 눈에 띄었다.

얼개에 쌀을 붓고 양손 팔을 이리저리 흔들면 밑으로 싸라기나 쌀겨가 얼개 밑으로 내려앉자 작은 봉우리를 만들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또글 또글한 쌀만 바가지에 담아서 가져왔다. 밀가루도 박 바가지에 다독다독 가득 눌러서 상보 덥힌 채 왔다. 짚으로 엮은 달걀 꾸러미간혹 있었

마당 한가운데  무쇠솥뚜껑을 거꾸로 뒤집어 걸고 전을 부치자 동네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도막 낸 무로 깍쟁이에 담긴 식용유에 살짝 담가 솥뚜껑 위에 그림 그리듯 칠했다. 미리 고구마 전 부쳐서 아이들부터 입막음했다. 안방에서는 할머니들이 일찌감치 새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진을 치고 앉자 계셨다.

한쪽에서는 막걸리와 전으로 흥이 난 듯 오동추야 날이 밝아 오동동이냐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기름 냄새를 맡은 메리도 혀를 빼고 꼬리를 살랑거리며 아이들 손에 든 전을 덥석 채갔다. 전을 뺏긴 아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시골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애경사 동네잔치였다.

어머니는 주황색으로 드문드문 물든 감 잎 서 너 개 뜯고 뒤에 쳐진 거미줄은 대강 손으로 걷어냈다.

무시 전, 배추 전, 고구마 전, 골고루 싸서 자녀들이 많은 옆집 돌담 너머로 네주었다.

어지간히 배가 부르자 상차림 할 산적, 동태 전, 육전을 부쳐서 널따란 채반에 보기 좋게 줄을 세웠다.

고모할머니는 찹쌀로 동글동글 새알시미를 빚더니 팔팔 끓는 물에 넣었다. 매초롬하게 익은 새알시미가 물 위에 떠오르자 건져내서 고물을 입혔다. 노란색, 분홍색, 파란색으로 고물 입힌 경단은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갔다. 팥이나 동부 앙금으로 켜켜이 쌓은 시루떡은 제사나 명절에 흔하게 먹던 떡이다. 처음 보는 모양도 예쁜 경단을 먹고 싶어 고모할머니 곁을 얼쩡거리자 색색깔로 하나씩 손에 쥐여 주었다.




안채 옆에 기역 자로 된 허름한 기와지붕 밑에는 토끼장, 닭장, 돼지막, 소 외양간이 차지하고 있었다.

얼기설기 엮은 문으로 하얀 토끼

뛰어왔다. 토끼장 바로 밑이 닭장이다.

시계도 흔하지 않던 시절 장 닭이 새벽녘만 되면 오빠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울었다.

닭 울음소리와 함께 우리 집 일과는 시작이 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식구들 세숫물부터 데우고 아침밥을 지었다.

닭장 바로 옆에는 두 마리 돼지가 사이좋게 지냈다.

가끔 변소 가는 길에 보면 꿀꿀 거리며 툭 튀어나온 주둥이로 짚더미를 뒤집고 놀았다.

돼지 막 옆에는 누렁이 소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귀에 달린 핑갱소리가 났다.

까끄막 아재가 돼지를 잡아 리어카에 싣고 대문을 들어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돼지 막으로 달려갔더니 텅 비어 있었다.

밥 먹을 때마다 돼지 잡는다는 소리를 들은 터였다.

큰오빠 결혼 잔치 제물이 된 돼지 얼굴이 눈에 선했다.

돼지 내장을 끓여서 한쪽에서는 동네 아저씨들 막걸리 잔치가 열렸다.

친, 인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밤늦도록 음식 준비하느라 여기저기 촛불이 켜졌다.

문 만 세게 닫아도 호롱 불이 흔들리며 가끔 꺼지는 바람에 할머니께 혼이 났다.

가물 가물가물한 호롱 불만 보다가 촛불이 여기저기 켜지니 대낮처럼 밝아서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수업만 하고 종례 하러 온 담임 선생님을 보자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오빠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책을 싼 보자기 허리에 묶고 요란하게 울린 필통 소리 발맞추고 단숨에 달려서 집으로 왔다. 잔치 때마다 마당에  두꺼운 광목으로 만든 차일이 작은 집처럼 우뚝  서 있었다. 덕석 위에는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들이 상위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에 경찰서, 학교 선생님, 군청 직원 등 넥타이를 맨 손님들이 들어섰다.

종손 결혼식은 격이 달랐다.

오 학년 때  담임이었던 진양호 선생님께서 사회를 보았다.

가마 대신 사다리에 부모님을 태우고 마당 한 바퀴를 돌았다. 기어이 “사공에 뱃노래” 엄마 십팔번을 듣고 높이 올린 사다리에서 아버지를 내려주다.

오십 세에 큰 며느리를 맞이한 부모님의 환한 웃음과  함께 늦가을 햇살이 마당 가득히 채워졌다.




그때 쌀, 밀가루 한 됫박의 가치는 얼마였을까?

1970년대 쌀 한가 마 값이 12,000원

이었다.

1960년대 끝자락이니 비슷하지 않았을까

결혼식이나 초상이 나도 이웃 동네 걸인들까지 와서 음식을 나누었던

그 시절은 못살아도 정이 있었다.


세월이 가면 키오스크 등장이  

당연하게 여겨질 때가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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