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예술가였지
(양주 선물 보자기로 만든 쿠션)
(자투리 천으로 튤립을 접다가 천국
가신 어머니!)
우리 집 안방 문 앞에는 항상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는 재봉틀이 있었다.
겨울 내내 어머니는 바느질 감으로 바쁜 농사철 일군을 샀다.
저고리 하루 품삯은 하루 밭매 주고 두루마기와 한복은 하루 모내기를 해주었다.
많은 바느질 감을 재단한 후 재봉틀에 앉아서 손과 발을 돌리고 움직이면 원하는 옷들이 만들어져 나왔다.
평문이 밭, 새 정제, 고란, 애똥밭 흩어진 논과 밭을 짓느라, 시집올 때 가져온 싱거 재봉틀 소리가 드르륵드르륵 겨울철 내내 집안에서 울러 퍼졌다.
굴 바위라는 산촌에 살았던 아주머니는
항상 겨울이 되면 가족들 옷을 지어 갔다. 천을 접어서 틀로 박은 이음새를 늘 칭찬하셨다. 특히 옷이 해어질 때까지 박음질이 터지지 않아 좋아하셨다.
그리고 봄 되면 깊은 산에서 채취한 고사리와 취나물, 버섯을 가져오셨다.
갓 채취한 취나물은 보따리를 풀지 않아도 그 향기가 퍼져나왔다. 일 년 제사음식이 될 고사리나 능이버섯은 고이 간직했다.
옷감을 맡기러 오신 몰골댁이 한마디 하셨다. 공떡(고흥댁) 옷감이 쌓였는디 누구 것인지 다 알 수 있소? 당연하지라이 제일 밑에 있는 보드라운 천은 당산떡 (댁) 아들 장개가서 입을 첫날밤 잠옷이요.
날 받았다요? 언제다요? 곧 돌아오요
바느질감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 환갑, 아들, 딸 결혼식 등 제각기 옷감 속에 이름표를 붙이고 어머니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쁘게 가져온 바느질 감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도 많았다. 일꾼들 배고픈데 밥이 늦으면 할머니께서 역정을 내실 때도 많았다.
당장 내일 시누이 환갑잔치에 입고 갈 옷인디 공떡! 재봉틀에 들들들! 박아주면 안 돼요? 하시며 터진 저고리를 가져오신 이웃들도 있었다.
무조건 박는다고 옷이 되지 않는데 내성적인 어머니는 말도 못 하고 속앓이를 많이 하셨다. 몸 베만 입고 일만 했던 어머니는 시집올 때 가져온 천들이 장롱 속에서 잠을 잤다.
학교 행사가 돌아올 때마다 장롱 속 천으로 그해 우리들이 필요한 옷으로 만들었다.
한복, 주름치마, 블라우스, 바지. 원피스 등 안방은 우리들의 옷가게가 되어 패션 장이 한바탕 열리기도 했다.
70년대 농경사회가 산업화 시대로 이어지기까지 백중이라는 절기가 큰 명절처럼 보냈다. 모내기를 끝내고 여름 철 한가한 시기라 호미 씻는 날이라고 했다. 이날은 머슴들도 하루 휴가가 주어졌다. 그동안 지어놓은 새 옷 입고 푸짐하게
장만한 음식과 막걸리 챙겨서 섬진강변으로 놀러 갔다. 우리들도 덩달아 이날은 새 옷을 얻어 입은 날이기도 했다. 다우다, 뽀 뿌리, 대대 롱 천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다 우다는 땀이 흡수가 안돼 몸에 착 감겨서 입기 불편한 옷이었다. 그래도 우리 세대들은 색깔 곱고 빨아 입기 편한 옷이라 더운 줄도 모르고 즐겨 입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형제들이 입던 옷이 차례로 내려왔다. 무릎은 해지고 늘어졌다.
어머니는 다른 천을 예쁘게 오려서 덧대고 재봉틀 돌려서 새 옷처럼 만들어 놓았다.
대식구라 양말만 빨아도 광주리로 가득 찼다. 말린 후에는 짝 맞추고 버릴 양말은 해진 곳은 베어 내고 구멍 난 양말 위에 덧 대어 누볐다. 새 양말보다 훨씬 따뜻하고 푹신해서 형제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자녀들을 출가시키고 난 후 일흔 살이 되던 해였다. 따로 살림 사셨던 아버지께서 어이! 나 밥 좀 인자해줄랑가? 하고 부르셨다.
어머니는 몇십 년 시어머니 모시고 큰 살림 이루며 사셨다. 아버지의 부름에 당연하듯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칠십이 되던 해 아버지랑 같이 살게 된 엄마는 본가 안방에 있던 재봉틀 읍내 집으로 가져왔다. 비단에 쌓인 양주 선물이 들어오면 천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
시간 날 때마다 색깔별로 재단해서 붓글씨 쓸 때 팔꿈치 밑에 괴이던 쿠션과 허리 등받이도 만들었다.
시장 다녀오던 길에 한복집에서 자투리 천을 부탁하자 모아 주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모시천을 오리고 누벼서 조각조각 이은 재봉질이 정교하게 이뻤다 조각보 모시 홑이불로 작품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한복 자투리 천으로 상보나 방석을 만들어서
고이 쌓아 두었다. 자식들이 가면 색깔별로 꺼내주었다. 버릴 천도 엄마 손을 거치면 예술품이 되었다. 아쉽게도 언니와 나는 엄마 솜씨를 닮지 않았다.
올 겨울까지 천을 베고 다듬어서 복주머니도 만들었다. 자투리 천으로 잠 안 오는 밤에는 튤립 꽃도 접어 놓았다.
올여름부터 코로나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많이 위축되었다. 엄마도 여름부터 소화가 안 돼서 인근 대학병원에 모셨다.
돌이 차서 쓸개 떼어낸 지 십 년이 넘었다. 그런데 쓸개관에 또다시 돌이 찼다.
구십구 세 어르신이 돌을 빼느라 다시 입원하셨다.
퇴원하신 후 그때부터 입맛이 회복되지 않았다. 병어 찌개와 계장을 특히 좋아하셔서 형부가 자주 사다 주셨다.
매끼마다 병어 한 마리는 족히 드셨던 엄마가 그마저도 잘 드시지 않았다. 양배추 물김치만 속이 시원하다며 자주 드셨다.
그 몸으로 다시 주간보호 센터를 다니셨다.
틈만 나면 천을 만지고 오리고 접으며 놀았다. 그런데 올여름에는 센터에서 오시기만 하면 소파에 바로 누웠다.
그리고 재봉틀 소리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 옷감이 많아도 가위로 자르고 접고 꿰매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
오려놓은 천을 색깔로 맞추시다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자리에 눕는다.
주간보호 센터에 다녀오기만 해도 오늘 하루 최고로 사시는 우리 엄마!
이 세상 삶이 언제까지일지?
알 수 없지만 오늘 '하루'가 최고의
선물임을 깨닫게 하신다.
재봉틀 안녕!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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