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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국수 한 그릇에는

by 진주


우리 집 앞에는 제법 큰 감나무 밭이 있었다. 가을에 감을 수확하고 난 뒤에는 제 몫을 다한 감나무 잎이 이내 떨어지고 높은 곳에 매달린 홍시만 까치들이 찾아와 쪼아 먹다 날아갔다. 앙상한 나목으로 봄을 기다리다가 4월이 되면 감잎은 새 주둥이처럼 쭈뼛쭈뼛 올라오다 이내 잎이 너불거리기 시작했다.


일손이 바빠지기 시작한 윤 씨 아저씨가 먼저 감 밭에 고랑을 만들기 시작했고 부드러워진 흙속에 강낭콩을 심었다. 겨우내 땅속에서 웅크리던 부추도 올라와서 점심 나절에 한 움큼 베어다가 고추장, 간장, 참기름 넣고 대충 버물려놓자 식구들의 젓가락이 바빠지며 향긋한 봄을 맘껏 먹었다.

겨우내 누렇게 누워있던 딸기도 잎이 푸릇푸릇 나불거리고. 포도나무도 움이 트더니 벌써 가지도 뻗어가기 시작했다.


감 밭에는 사계절이 주는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먹거리를 열심히 만들어 주고 있었다. 강낭콩도 쌍 잎이 나오더니 어느새 자라 꽃이 피고 꼬투리가 맺었다.

유월에 수확한다고 해서 유월 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붉은 강낭콩은 풋콩일 때부터 밥에 넣어 먹으면 팥물이 들어 찰밥 같고 푸근푸근 맛있었다. 꼬투리가 삐득 삐득 말라 갈 때쯤 뿌리 채 뽑아온 강낭콩을 할머니는 덕석에 앉아서 꼬투리를 땄다. 몇 칠 동안 잘 마른 콩 껍질에서는 호랑이 강낭콩과 붉은 강낭콩이 줄지어 또르르 미끄러져 나왔다.

뜨겁게 내려쬐인 마당 한구석에

메리가 혀를 빼고 헉헉 거리고 있었다.

따가운 햇볕에 반짝이는 콩을 손으로 저어 줄 때마다 따글 따글 구슬소리가 났다.



우리 식구들은 팥 국수를 좋아했다. 여름만 되면 햇볕에 바싹 말린 강낭콩과 팥을 섞어 푹 삶아 으깬 후 체에 걸려서 팥물을 만들었다. 방학이 되면 할머니께서는 "니그 에미 보다 니가 훨씬 밀가루 반죽이랑 국시도 난들 난들하게 잘 밀어놓더라" 칭찬을 하신 후에 양푼에다 하나 가득 밀가루를 퍼 오셨다. 물을 조금씩 밀가루에 부어가며 반죽 한 다음 덩어리로 떼어서 반들반들하게 치고 방망이로 얇게 밀어서 칼로 가늘게 썰어놓으면 국수가닥이 되었다.

여름 한철 샘가 옆에 걸어 놓은 솥단지는 햇볕에 달구어져 불을 때지 않았는데도 뜨근뜨근 했다.

팥물을 솥에 붓고 팥 앙금 타지 않도록 휘휘 주걱으로 저어주었다.

팔팔 끓어오르는 팥물에 국수 가닥 훌훌 털어서 넣고 큰 주걱으로 저어주다 한소끔 끓인 후에 간을 맞추었다.



마당 한쪽에서는 마른풀을 거둬다 크게 모깃불을 피워 밤늦게까지 왱 왱거린 모기떼를 쫓았다.

매운 연기로 눈물이 가끔 나기도 했지만 쑥 타는 냄새가 좋았다. 앞 집 경호네 집에서도 저녁을 차렸는지 아이들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팥 국수 한 그릇씩 퍼 담고, 갓 담은 열무김치 곁들이고 후후 불어가며 다들 맛있게 드셨다. 아이들은 한쪽에서 뜨거운 팥죽을 빨리 먹고 싶어 양푼에 물 담아 동동 띄워 놓았다. 밤하늘에는 별 빛이 쏟아지고 저 멀리서 별똥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팥국수 한 그릇 먹기까지

강낭콩 두세 알 땅속에 묻었다

어느 날 따뜻한 물방울이 스며들어

강낭콩을 간지럽혔다.

봄비가 촉촉이 내린 것이다.

며칠 뒤 누가 손으로 끌어당기기라도 한 듯

쌍떡 잎이 쑥 올라왔다.

봄 볕에 하루하루 쑥! 쑥! 자라났다.


굵은 소낙비가 내리치고 태풍 맞아도

연한 강낭콩은 꽃 피고 열매 맺었다.

단단하게 야물어진 강낭콩

쑥쑥 뽑아서 마당에 펼쳐 놓자

누렇게 잎이 마르고 꼬투리도 말라 입을

벌리고 붉은빛, 호랑이 무늬로 줄지어 쏟아진다.

다글 다글 말라간 강낭콩 햇볕에서

유리알처럼 빛난다.



"강낭콩이 썩지 않고 다시 싹을 내고 열매 맺듯이 예수님도 사망권세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이번 주가 "부활주일"이다.



# 부활절 # 강낭콩 # 팥국수 .#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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