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미션

by 고우니

딸이 홍콩 자유여행을 가자고 했다. 언제든 어디든 딸이 가자면 나야 무조건 오케이지만 한더위에 왜 하필 홍콩을? 쇼핑하러 가는 게 아니라면 볼거리나 먹을거리는 별로라던데. 딸은 짧은 일정, 적은 비용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비수기라 대폭 인하된 2박 3일 일정의 홍콩을 골랐다고 했다. 더울 때 아예 화끈하게 더 더운 나라를 가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 수 있겠다. 이번 여행의 미션이 정해졌다. ‘화려한 도시, 소박하게 즐기기.’


예약하고 사나흘 뒤 여행안내 책자와 호텔 숙박권, 비행기표가 든 봉투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딸 덕에 하는 자유여행이다. 둘이서 이국의 거리를 거닐면서 먹을 것 볼 것을 맘대로 찾아다닐 수 있다. 벌써 해방감이 느껴진다. 책을 펴고 갈 곳을 짚어보고 숙박권과 비행기표를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출발할 날을 기다렸다. 쇼핑에는 그닥 관심이 없는 우리였기에 교통비와 식사비 등을 고려한 최소 경비만 환전했다. 쇼핑은 안 한다 해도 살인적인 물가로 이름 날리는 곳이라는데 이 적은 돈으로 가능할까 싶었지만 외려 그 빠듯함이 긴장을 고조시켰다. 겁 없는 젊음, 딸 덕에 젊은이의 모험 같은 한 발짝을 내딛을 수 있으니 그 또한 감사한 일이다.


새벽에 집을 나선 우리는 점심 무렵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곧바로 여행이 시작되었다. 옹핑마을의 청동 좌불상도 보고 리펄스베이 해변에 가서 물장구도 치고 멋진 티 카페에도 가고…. 계획했던 유명지와 맛집을 이틀 동안 욕심스럽게 찾아다녔다. 발가락에는 커다란 물집이 두 개나 잡히고 몸은 녹초가 되었다.


일정의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체크아웃한 뒤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소호로 향했다. 안내책자를 보며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홍콩의 소호는 영화 <중경삼림>의 촬영지로 유명해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지나가는 지역 전체를 일컫는데 이국적 향취가 물씬 풍긴다고 한다. 무려 800m나 되는 세계 최장의 옥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마을 곳곳을 구경하다가 아무 데나 내려 산책하고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테라스에 앉아 차나 맥주를 마실 수 있다는 소개말은 매혹적이었다.

소호엔 독특한 디자인의 다양한 소품들을 파는 가게들과 레스토랑, 카페, 패션숍들이 즐비했다. 서울의 인사동보다 규모는 크지만 비슷한 느낌이다. 모퉁이를 돌자 느슨한 오르막에 기다랗게 이어지는 3층짜리 낡은 슬래브 건물 벽을 따라 알록달록 예쁘게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알렉 크라우프트의 <구룡채성>이라는 작품이다. 화가는 1993년 철거된 구룡채성의 주택형태와 스카이라인을 이곳에 재현해 놓았다. 일명 덩라우 벽화라고 불리는데, 덩라우는 다닥다닥 붙은 이주민들의 독특한 주거형태를 일컫는 고유명사라고 한다. 구룡채성에 있었던 덩라우 주택은 최초엔 2,3층 높이였으나 무허가 증축을 거듭하여 15층까지 올라갔고 결국에는 거대한 슬럼가로 변하여 철거되었다. 기다랗게 연결된 건물은 낡았고 벽화도 색이 바랬다. 벽화 앞에서 우린 서로 방향을 바꿔가며 여러 번 휴대폰 셔터를 눌렀다.

“엄마, 여기서 사진 찍자.”

“그래. 예쁘다. 이쪽 방향으로 서 봐.”

나의 어설픈 어휘력으론 ‘예쁘다’가 최대의 찬사였지만, 예쁘다고 하면 할수록 벽화의 본질과는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덩라우는 지금도 서울 곳곳에 남아있는 우리네 달동네처럼 질퍽한 삶의 현장이면서 동시에 아늑한 보금자리였던 것. 우리네 달동네에는 높은 건물은 아예 없는데 홍콩은 높이만 높을 뿐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된 낡은 건물에서 빈민촌을 이루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작가는 이곳에 구룡채성의 높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허름한 풍경을 그려 넣었을 뿐인데 왜 그곳에서 사람의 체취가 풍겨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밥 냄새, 땀 냄새, 지린내, 고린내, 화장품 냄새, 싸구려 향수 냄새, 담배 냄새, 술 냄새, 등등 모든 냄새가 뒤섞이고 발효되어 그립고 그리운 사람 냄새를 풍기는 것만 같았다.


다시 조금 걸었다. 드디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가 나타났다. 세계 최장이라는 말에 기대를 너무 거창하게 했나? 뭔가 번쩍거리고 특별한 디자인을 상상했는데 의외로 낡고 평범한 모양새다. 지붕이 있어도 비바람이 들이쳐서 그런지 벽면 곳곳에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고 바닥에는 흙먼지가 쌓여있다. 에스컬레이터 양옆으로는 현대식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어 그대로 도시의 풍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리면 2차선 도로가 있고 도로를 건너면 또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또 가다가 내리면 육교가 있고 육교를 건너면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이런 식으로 고지대의 주택지인 반산 구까지 20개의 에스컬레이터가 이어진다고 한다. 1993년 조성된 반산구 거주자들의 출퇴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체 얼마나 높은 산등성이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일까. 반듯한 건물들 뒤편으로 옹색하게 끼어있는 초라한 집들이 보이고 조그만 베란다 창틀마다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펄럭이고 있다. 어젯밤 피크트램을 타고 빅토리아피크에 올라가서 봤던 홍콩의 야경이 떠올랐다. 거대한 불기둥처럼, 빛 덩어리처럼 우뚝 선 빌딩 너머로 또는 그 아래로 신비하게 반짝이던 작은 불빛의 실체가 저것이었구나! 순간 코끝이 찡했다. 낮과 밤의 간극도 아니고 미와 추, 빛과 그림자의 문제도 아니다. 찬란하고 거창한 것들은 초라하고 사소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기 마련인 걸까?

산 중턱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렸다. 길가에는 맥줏집들이 즐비하다. 인테리어가 멋진 집을 골라 들어갔다. 유리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놓고 한참 기분 내고 있는데 맞은편 가게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마침 중요한 축구 경기가 있어 TV중계를 보면서 맥주 마시고 있었나 본데, 한 골 넣은 모양이다. 잔을 부딪치고 몸을 흔들어대고 뛰어오르고 서로 끌어안는가 하면 연신 하이파이브를 하고 야단법석이다. 뜨거운 햇볕만큼이나 사람들의 열정도 뜨겁다.

에스컬레이터 옆에 나 있는 계단으로 되짚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못했는데도 꽤 많이 내려와야 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계단 옆 조그만 빈터에 누군가 가져다 놓은 듯 낡은 의자가 하나 놓여있다. 아픈 발을 쉬게 할 겸 잠시 의자에 앉았다. 에스컬레이터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실어 올리고 있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와야 할 때는 어쩌나 싶었는데 출근 시간대인 아침에는 하행으로만 운행한단다. 높은 산등성이에 지어진 빌딩들의 물 시설이나 전기 시설들은 다 어떻게 해결했을까? 내가 멋진 풍경으로써 기대했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홍콩 사람들에겐 가파른 삶의 터전이었다. 땅이 좁은 데다 산이 많은 홍콩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만든 절실한 생활의 도구였다.


마지막으로 하버시티의 레이저쇼를 보러 갔다. 이곳엔 쇼핑 천국 홍콩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대형 백화점이 있다. 쇼 시작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하얀 대리석으로 치장된 백화점은 화려했다. 유리 너머에서 환한 조명을 받고 있는 고급스러운 물건들을 스쳐보며 걷다가 문득 멈춰 서서 지갑을 뒤적거렸다. 그때 딸이 물었다.

“돈 얼마나 남았어?”

“저녁 식사비 빼고 나면 만 원 정도 남네.”

애초에 뭘 살 생각도 없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만 원을 들고 고급 백화점이라니. 다리만 아프고 무의미한 아이쇼핑을 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우리 레이저쇼나 보러 가자.”

레이저쇼는 여행 책자에도 소개되고 구경하는 인파도 몰릴 만큼 나름대로 유명한 쇼였는데 기다림이 허무할 정도로 너무나 소박하게 레이저 몇 번 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호텔로 돌아와 맡겨둔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새벽 1시 20분이다. 우리가 공항에 도착한 것은 9시. 교통카드 환불을 했는데 잔액이 생각보다 많았다. 돈도 남았고 시간도 넉넉해서 여유롭게 식당을 찾았다. 웬걸, 벌써 다 문을 닫았다. 정해진 금액을 넘기지 않으려고 아이스티도 한 잔만 사서 나눠 마시고 조그만 타르트도 한 개만 사서 나눠 먹었는데…. 과자 몇 개로 끼니를 때우고 작은 면세점으로 들어가 남은 돈에 딱 맞춰 물건을 골랐다. 주머니에 달랑 동전 두어 개가 남았다. 홍콩 여행 소박하게 즐기기, 미션 완성인가?

돈을 얼마나 절약했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많이 걸었던 덕에 홍콩을 조금 더 깊이 만날 수는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지친 몸을 비행기 의자에 깊숙이 기대었다. 덥고, 좁고, 높고, 허름하고, 화려하고, 어둡고도 빛났던 8월의 홍콩. 어느덧 비행기는 날아오르고 홍콩은 찬란한 별 무리로 변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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