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비오는 책방

너 때문인가 나 때문인가

by 은송하

꽤 오래 올 비였다. 책방을 지나가는 아낙들이 그 비를 있는 그대로 맞으며 오랜 가뭄이 끝났다고 기뻐했다.


“역시 장 숙원 마마의 기도는 영험해. 오늘 오전에 종묘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하더니 벌써 이리 비가 내리니 말이야.”


지우가 책방 가장 안쪽 벽에 다다르자 뒷문을 열어 놓고 등지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그는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고 손에는 책이 들려있었다. 산학원본.


지우는 숨을 가다듬고 선비의 어깨너머에 대고 말을 걸었다.


“저기 선비님. 혹시 보고 계신 서책을 구입하실 예정입니까?”


사내는 짐을 들이고 있는 소란당의 앞집을 매우 유심히 보고 있었고, 가끔 책을 들여다볼 때도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책을 보며 의미 없이 시선을 던지는 것 또한 지우가 자주 하는 행동이기에 지우는 방해가 되지 는 않도록 소곤거렸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사내가 문을 닫지 않은 채 서 있기에 지우는 서둘러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기를 바랐다. 책에 빗물이 튈까 걱정되었다.


“저기 선비님. 문을 좀 닫아 주시겠습니까? 새 책에 빗물이 튀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작게 말해 들리지 않나 싶어 지우는 더욱 크게 말하려다 책방 안으로 비를 피해 들어온 이들 때문에 말을 말았다.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낼 때 쓰는 디딤대를 가져와 사내의 뒤에 놓고 올라갔다. 하려던 말보다 선비가 보고 있는 문제에 먼저 눈이 갔다.


“선비님. 원주율 3을 넣으면 금방 풀릴 듯싶습니다.”


지우는 사내가 문제 어디쯤을 풀고 있는지도 배려하지 않은 채 중요한 단서를 내뱉었다. 사내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다 발로 디딤대의 다리를 치고 말았다.


“아...아~.”


지우는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오늘 일진도 폭삭 망했구나 싶었다. 유진이었다. 유진은 지우의 가슴이 얼굴을 덮치자 책을 놓치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지우의 허리를 안고 뒤에 있던 책장에 부딪힌 뒤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기. 형씨!”


유진은 지우로 인해 중요한 무언가를 놓쳐버리지 않을까 초조해졌다. 이번 혼인만큼은 무를 일이 없어야 했다. 정혼자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 중에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는지 살펴보러 온 것이었다.


지우는 풀어져 떨어진 갓 옆으로 물이 스며 들어가는 산학원본이 보였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맞추어 지우의 눈에 눈물이 샘솟았다.


“내가. 내가... 책이 젖는다고 하지 않았소? 지금... 책이 젖어가고 있단 말이오.”


“그게 문제입니까? 당신 때문에 내가.”


유진이 선비를 밀어내려던 찰나 선비의 몸은 축 늘어지며 흐느꼈다. 몸에 닿는 굴곡이 어딘가 익숙한 듯도 하였다.


‘울어? 책이 젖어 못 사게 되었다고 사내가 울어?’


유진은 어찌하지를 못하고 두 손이 허공을 헤매었다.


‘되는 일이 없구나. 난 평생 아버지와 끝명이하고 살면서 도현이나 가끔 놀리며 살면 그뿐이라 여겼거늘. 산학이나 풀며 필요한 게 생기면 연구를 하고 산과 강을 거닐면 행복할 거로 생각했단 말이다. 빚도 갚아야 하는데. 뺏긴 집도 찾아야 하는데. 장가라니... 장가라니! 내 어찌 그 여인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책이 비에 젖었어. 책마저. 내가 유일하게 기대며 살았던 책마저.’


“신유진 이 백정만도 못한 새끼.”


지우는 말을 뱉어 놓고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의식의 끝에 그가 있었을 뿐인데 뱉어 버릴 줄이야.


“혹시 저를 아십니까?”


유진은 자신의 유명세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가진 배경이며 사연이 사람들 입방아의 중심에 있기 딱 좋은 먹잇감이 아니던가. 그저 태어난 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도 누군가에게는 큰 이득이 돌아가고 누군가의 인생을 나락으로 보낼 수도 있는 위치였다. 저도 모르게 은덕을 베푼 이도 원수도 될 수 있었다.


‘나를 해치려 일부러 이러는 건가? 그런 것 치곤 허접하군. ...혹여 남색하는 자가?’


가끔 환관들이 저를 보는 눈빛이 촉촉하기도 했었다.


지우는 냅다 일어나 유진을 모르는 척 옷 여기저기를 털기 시작했다. 끝명이 힘들여 다듬이질한 두루마기에 얼룩이 생긴 걸 보자 지우는 솟구치는 짜증에 괜시리 콧구멍에 한 숨을 내쉬었다.


“흠. 흠. 나는 그쪽을 모르오. 진짜로 모르고 안 적도 없고 앞으로 알고 싶지도 않소.”


유진은 일어나 지우를 아래위로 훑었다.


“저는 왠지 그쪽의 낯이 익은 듯도 합니다. 목소리도 귀에 익고 말입니다.”


“저는 완전 결백하게 오늘 처음 보오.”


지우는 바닥의 갓을 집어 들고 끈을 매었다. 책도 집어 들었으나 이미 먹이 번져 다시 쓰기에는 글러 먹었다.


“제 이름이 신유진이라 그럽니다. 처음 보는데 말이 꽤 짧구려.”


지우는 최대한 유진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얼버무렸다.


“이런 우연이. 제가 실례를 했소이다. 그것이 내... 내... 아! 저와 혼약을 맺은 여인과 눈이 맞아 도망간 우리 집 하인 이름이 신유진이오. 상것의 이름이 곱더니 고것이 이름값을 하고야 말았잖소. 상것에게는 상것의 이름이 있거늘. 쯧쯧. 너무 화가 나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소이다. 다시 한번 더 사과를 드리리다. 딱 봐도 그쪽이 나보다 나이가 어려 보여 말이 짧았나 봅니다. 거 실례했소.”


‘이 사내만 만나면 거짓말쟁이가 되는군.’


지우가 목례를 간단히 하고 나가려 하자 유진이 지우의 어깨를 잡았다.


“딱 봐도 그쪽이 저보다 한참은 아래 동생 같아 보이는데요?”


“내가 동안이라.”


“어쨌든 형씨의 눈물에 그런 사연이 있었구려. 형씨가 사려던 책이 젖게 되었으니 내가 구해서 선물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실 제가 보려던 게 아니라 제가 신세를 진 사람이 좋아할 거 같아 사려던 거였습니다.”


지우는 그새 입술을 실룩이며 뒤돌아보았다.


“아니 뭐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그렇게 하신다면 내 기꺼이 받겠소. 선비님 아량이 보통이 아니시구려. 허허.”


지우는 유진이 자신을 요리조리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책을 뒤지는 척하며 얼굴을 가리고 말했다.

“책을 구해다 준다니 감사하긴 한데.”


지우는 어찌 대화를 마무리지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댔다.


“술 한잔 같이하겠소? 이것도 인연인데. 술 한잔하려는데 딱히 찾아갈 이도 없구려. 비도 오고.”


어차피 여기서 평양 부윤의 집을 더 관찰하는 건 글렀다 싶었다.


“수~울?”


지우는 혓바닥을 날름 내밀며 입술을 훔쳤다. 귓가에 술독에서 나는 뻐끔 소리가 명랑하게 맴돌았다.


“혹시 술을 못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지우는 고개를 내젓긴 했으나 유진을 따라가 함께 술을 마시자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낮술은 내키지 않으신 게요?”


‘공짜 술을 마다할 내가 아니지만.’


지우는 괜시리 책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관심도 없는 책들을 뒤적거렸다. 입술을 곱창처럼 내밀며 할 말을 떠올리며 애썼으나 딱히 생각나지 않아 괴로웠다.


“아랫것을 시켜 책은 금방 구해다 주리다.”


유진은 지우를 지그시 보더니 정중하게 말을 맺으려 했다.


“처음 본 이와 술을 마시는 것이 마뜩잖을 수 있소. 이해합니다. 같이 안 간다고 해도 책은 전해줄 터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이곳 책방에 맡겨놓겠소. 그럼 이만.”


지우가 같이 안 간다고 하여도 유진은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 책이 젖은 것도 사모하는 여인이 사내와 도망친 것도 괜시리 제 탓인 것만 같아 술 한잔하자고 권한 것이다. 이 책방에서 만난 불운한 저 때문이라고.처음 만난 사내가 내뱉은 ‘이 백정만도 못한 새끼’라는 욕이 묘하게 속을 시원하게 했다. 어쩌면 누군가 대놓고 욕하며 덤벼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승정원이 한가한 곳은 아닐 텐데. 가문의 뒷배를 믿고 게으름을 부리는 것인가?’


지우는 목을 긁적이며 유진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러면 뭐. 효원각으로 갑시다. 내 단골집이오. 술값도 그쪽이 내는 것이오?”


매몰차게 책만 받고 입을 싹 닫기에는 미안했다. 술친구를 해주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효원각이라면 일이 생겼을 때 뒤처리를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알겠소.”


유진이 먼저 책방을 나서고 따라 나가던 지우는 손님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소설에 빠져있는 동식이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쯧쯧. 아직도 거기서 머물고 있느냐? 뒤가 더 장난이 아니다 녀석아!”


동식은 지우가 해맑은 얼굴에 청아한 목소리인 것이 불만이었다. 아무리 봐도 소란당 야설 최고 구독자로는 안 보였다. 야설만 보는 건 또 아니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다.


“내용에 대해 더 궁금한 건 나중에 이 형님에게 물어보도록 하여라.”


“나으리는 똥식이라고나 하지 마십시오. 저는 동식입니다. 하동식!”


동식은 지우를 빤히 보면서 얼른 책을 뒤로 넘겼다.


“그래. 하똥식! 다음에 보자. 귀여운 녀석~! 선물이다.”


지우는 입으로 딸깍 소리를 내며 동식에게 책을 내밀었다. 유진이 안 볼 때 소매 춤에 넣어 놓았던 것이었다.


‘보쌈할 결심.’


“이 책을 읽고 나면 내가 너를 똥식이라고 부르든 멍식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을 것이야!”




지우가 효원각에 들어서자 일하던 이들이 즉시 도현에게 가서 지우가 왔음을 알렸다. 효원각 식구들은 지우와 도현이 젖형제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현은 달려 나와 지우가 유진과 같이 우산을 쓰고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우에게 무슨 일이냐 눈짓했다.


“좌승지 영감이 오셨는데, 어서 방으로 안내하지 않고 뭘 그리 멍하게 있는 것이야?”


지우는 거들먹거리면서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지우의 급박하게 굴러가는 눈알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네. 마침 충의원이 비어있습니다. ...제 우산이 더 크니 도련님은 제 우산을 같이 쓰시지요?”


도현은 지우 쪽으로 우산을 내밀었다. 외간 남자의 우산 밑에 있지 말고 얼른 건너오라는 오라비의 표정이었다. 유진의 집에서 있었던 일도 속시원히 말하지 않고서 유진을 여기까지 데려온 의도를 몰래 물으려던 것이다.


유진은 도현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았다. 계집애를 데려가던 손이 오늘 만난 인연도 데려가려 했다. 지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이렇게 하면 제 동무가 비 맞는 일이 없겠지요? 어서 안내하시오. 이틀 전에 이 집에서 먹은 요거타가 참으로 별미였소.”


“동무?”


도현의 물음에 지우는 눈을 찡긋하며 나중에 얘기하자는 표시를 했다. 아마 신유진 영감이 지우보다 예닐곱은 나이가 더 많을 것이다.


도현이 충의원으로 안내하자 유진은 오늘도 그 계집이 자개장 안에서 엿들을까 하고 저도 모르게 흘깃거렸다.


지우는 양반다리를 하고서 다리를 아래위로 빠르게 들썩였다. 왜 하필 또 이 방인지. 감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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