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배려라는 이름으로 선을 긋는다.
“지우 도련님!”
도현은 지우가 도대체 왜 저러나 싶다. 의문투성이다. 유진은 지우와 강단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몰라야 한다.
“어?”
지우는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도현과 앞에 놓인 주안상을 번갈아 바라봤다. 구절판에 떡갈비, 산해진미가 놓여 있고 궁궐의 어의들이 빚어 임금께 올린다는 향온주(香溫酒)가 있었다. 효원각에서 가장 비싼 술이었다.
“자네가 여기 단골이라고 하니 요거타는 많이 먹어봤을 것이고 오늘은 자네도 나도 취하고 싶을 거 같아 향온주를 내오라 일렀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술이네.”
“아다마다. 내가 이걸 빚기 위해서 혜민서 김의원을 매수... 아니 그게... 이리 좋은 술을 어찌 대접받나하고.”
책방에서 효원각까지 오는 동안 지우와 유진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졌다. 지우는 수다스런 본성을 감추지 못했다.
묵사집(조선시대 산학책)은 이미 몇 년 전에 다 뗐으나 집에 있는 책이 닳아 다시 구입하려 하였다는 것. 서양 홍시 농사를 짓고 있다는 이야기, 고추를 가지고 무뢰한들을 물리칠 호신용 무기를 만들고 몸을 따뜻하게 만드는 주머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가감없이 주워섬겼다.
유진은 하인이 구해다 준 손난로의 발명가가 자네였었나 하며 치켜세웠다. 말을 주고 받다 동무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고 유진이 먼저 제안해 서로 말까지 놓게 되었다.
“내 행색을 보아 알겠지만 나는 이런 걸 살 형편이 못 되네.”
“내가 산다고 하지 않았나. 내 행색을 봐서 눈치챘겠지만 나는 이런 걸 살 형편이 충분하이. 걱정하지 말고 드시게.”
“책에다가 산해진미까지. 만난 첫날에 이거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처음 만났지만, 왠지 모르게 가깝게 느껴진다고 하지 않았나! 믿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무에게나 이런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아니네.”
유진은 지우가 좌승지 신유진을 모른 체 그저 돈많은 양반네 한량인 자제 정도로만 아는 것이 은근 재미있었다. 지우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도현에게 물었다. 술 향기가 뭉근하게 사위를 감싸고 지우의 입꼬리가 진돗개 말린 꼬리처럼 감겼다.
“그 아이는 왔는가? 아직 몸이 낫지 않았다 하던가?”
도현은 자기가 답하기도 전에 사레가 들려 켁켁거리며 물 대신 연신 술을 부어 마시는 지우를 얼음결 스치듯 바라봤다.
“몸은 다 나은 것 같습니다. 밖에서 잘~ 돌아다니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본디 버릇없이 제멋대로라 이참에 버릇을 고치려 합니다.”
유진은 연거푸 술을 들이키는 지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네 어찌 술을 자작하는 것인가? 아무리 마음이 상해도 그렇지, 그렇게 마시다가는 병나네. 이 독한 술을 안주도 먹지 않고 말이야. ...그 아이의 이름은? 어디 살고? 그날은 경황이 없어 이름을 묻지 못했어.”
“강단이라고 합니다. 남촌 외곽에 사는 강단이.”
“강단이라. 그 아이다운 이름이군.”
유진은 지우에게서 잔을 떼어 놓으며 두 손을 붙들었다.
“객주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며칠 그 아이가 필요해서 그러네. 그 아이가 의협심이 있고 재주도 남다르다는 것을 자네도 알 걸세. 그 품성에 딱 맞는 일이 있어 그러니. 나흘 정도 뒤에 다시 효원각으로 보낼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주게.”
“네.”
“...”
“자네는 이만 나가 보아도 됨세.”
“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도현은 지우 앞에 있는 종지에 좋아하는 산적을 놓아주고 방을 나섰다. 밖에는 요거타에 홍달홍달을 먹으며 도현을 기다리는 처자들이 많았다. 봄바람이 단단히 들어 효원각을 지나칠 수 없었던 처자들은 신유진까지 효원각에 나타났다 하니 웬 횡재인가 하였다.
“저자는 묘하게 나를 경계하는 기분이 드는군.”
유진은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장사를 하니 예민할 수밖에. 알면 알수록 좋은 사람이야.”
“좋은 사람이라.”
술을 연거푸 마시며 유진과 지우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이어나갔다. 둘의 얼굴은 얼큰하게 달아올랐고 잔을 쥔 팔이 흐느적대는지 멈춰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자네는 내가 좌승지 신유진이라고 하는데도 놀라지 않은 걸 보니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거 아닌가?”
“한양에 자네의 용모에 대한 찬양과 가문에 대한 흠모가 넘치는 데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내 종놈의 아버지가 제 자식이 잘되길 바라며 자네 이름을 갖다 쓴 거 아니겠나? 경을 칠 일이지. 신유진 이 나쁜 새끼 같으니라고. 자네를 두고 한 말은 아니네. 흠. 흠.”
"알면서도 나를 이리 대하는 걸 보니 자네 배포가 보통이 아니야."
지우는 상 위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배포가 크다네. 돌쇠는 고봉밥이 좋다고 했어. 뒷동산의 물레방아는 쉬지를 않아. 야설이 싫어. 빨리 돈을 갚아야해.”
“뭘 그렇게 쫑알대나? 자네 종놈이 나보다 훨씬 나은 놈일세. 연모하는 여인과 떠났잖은가! 난 여태 장가도 못 가고 있는걸. 혼인하고 싶다! 간~ 절히 하고 싶다!”
“나는 여인을 품지 않을걸세. 장가가기 싫어. 아버지도 싫고 형님도 싫고 다 싫어.”
“장가를 안 간다니! 그 여인을 못 잊은 게군. 집안에서도 반대한 건가? 걱정하지 말게. 내가 책임지고 자네가 그 여인을 잊게 해주겠네. 여인은 여인으로 잊히는 거 아니겠나! 내 한양 바닥을 다 뒤져서라도 자네의 배필을 꼭 찾아줌세.”
“여인은 됐어.”
지우는 잔에 든 술을 벌컥 들이켰다.
“빈속에 그리 술만 마셔서는 못 써.”
지우는 제 가슴에 손을 대며 또 울기 시작했다.
“먹어도 살도 안 찌는 체질인데 이것도 먹지마! 저것도 먹지마! 먹지 말라고. 가슴이 커진다고. 가슴이. 으앙~.”
“무예를 익히세. 내가 칼 쓰는 법을 가르쳐 줌세. 고춧가루는 이제 필요 없을 거야. 여인네 가슴처럼 될까 봐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유진이 자네 정말~.”
“강가 지우~.”
둘은 서로 끌어안고 방에 누워버리더니 대자로 뻗어 버렸다. 지우는 잠결에 제 버선을 벗어 던져버렸다. 복숭아뼈의 붉은 점이 빼꼼히 요염을 떨었다.
효원각이 있는 종로 거리에 닭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미명의 새벽은 봄의 기운을 실어 이곳저곳을 거닐었다.
지우는 눈을 떠 얼굴을 맞대고 있는 유진을 유심히 바라봤다. 목 아래를 받히고 있는 유진의 팔뚝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짙은 눈썹은 산만하거나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넓이와 각으로 뚜렷했고 속눈썹이 바깥으로 휘어 있는 모양이 힘 있고 아름다웠다.
지우는 유진의 눈썹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가 마른 침을 삼키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나가려다 이불을 꺼내 유진에게 덮어주고 방을 나섰다.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꺾자 도현이 대들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사람의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는 안개 깔린 효원각 마당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도현은 오랫동안 곱씹은 정제된 말을 뱉는 듯했다. 어제 입었던 그 옷 그대로였다. 매일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장신구를 하며 멋을 부리는 건 장사치로서 중요한 덕목이라 늘 말하곤 했었다. 객주 설향은 여자 손님 앞에서는 장신구를 자제하고 남자 손님들 앞에서는 화려하게 장식했다. 설향의 장사 수완 그대로를 아들 도현은 배우고 익혔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호감을 주도록 자신을 다르게 가꾸었다.
“그게. 책방에서 만났지 뭐야. 내가 영감을 덮쳐 넘어졌고 울었어.”
‘우연이 왜 자꾸 좌승지 영감을 향하는 겁니까?’
“덮치다니요? 울어요? 누가요? 영감님이? 아니면 도련님이? 왜요?”
“내가. 도현~. 미안해. 내가 지금은 집에 가야 할 거 같아. 아침에 가볼 때가 있어서. 다음에. 다음에 다 얘기할게.”
지우는 모르는 아씨에게 장가가게 되었다는 말을 지금 도현에게 꺼내고 싶지 않았다. 사내로 보이기 위해 가슴에 덧댄 가죽이 삐뚤어진 것을 보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제자리로 보냈다. 도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장가? 이 황당한 이야기에 도현이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화내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장가가서 여인인 걸 들키지 않으려 갖은 애를 쓰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도 모자라 아내라고 불러야 하는 여자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어쩌면 죽기를 기대하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걸 도현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도현의 마음에는 지우에 대한 측은지심이 가득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장난을 치는 거였다.
그래서 더 웃어 보이는 거였다.
그래서 더 침묵하는 거였다.
도현은 뒤돌아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침에 갈 데라는 곳이 좌승지 영감댁입니까?”
“...내가 영감댁에 가 있는 동안 끝명이 좀 챙겨봐 줘.”
지우는 힘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도현은 이럴 때 지우를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혹시 그 댁에 가기 싫으신 거면 제가 좌승지 영감께 부탁을 드려보겠습니다. 깨시면 조용히 묻겠습니다.”
“뭐하러 너까지 끌어들여 곤욕을 치러. 그러지 마. 경고했다! 진짜 그러면 나 화낼 거야~. 어제도 들었잖아. 며칠만 데리고 있겠다고. 혼례 때 쓸 술을 빚으라고 할 모양이야.”
지우는 어제 개천이 갖다 준 산학원본이 아직 제 몸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향했다.
도현은 처음으로 지우가 멀게 느껴졌다. 이미 흥미로운 다른 세상에 빠진 아이 같았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지우가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지우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