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무녀의 몸짓

검은 천을 휘날이며 탐욕을 쫓아간다.

by 은송하

선왕은 비열한 자답게 수집한 정보들도 더럽기 짝이 없었다. 지화는 피식 웃으면서도 눈물이 찰랑댔다.


“선왕 전하. 전하께서 제 어미를 욕보이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것도 모자라 제 아비를 농민 반란군의 주모자로 모셨지요?”


손에 든 책을 힘껏 움켜쥐자 지화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무녀가 별거입니까? 탐욕이 자라 귀신이 된답니다. 그 귀신을 찾는 자들 또한 탐욕에 눈 먼 자들. 어둠과 집착을 먼저 발견하고 먹이를 주었다가 뺏었다가 가지고 놀며 칼춤을 추는 것이 무녀이지요.”


장 숙원은 책을 들고 일어났다. 선왕과 세자의 위패가 올려진 제단 향로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돌리자 제단 뒤쪽의 뚜껑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열렸다. 뚜껑 안쪽으로 선왕의 비책서를 밀어 넣고 다시 향로의 손잡이를 왼쪽으로 비틀어 뚜껑을 닫았다.


“산신님. 저, 아이를 가져야 해요.”


장 숙원은 검은 천을 제 팔에 걸치고 오방색 광목 사이를 천천히 노니며 몸을 살랑대었다. 치마 사이로 슬쩍 내비치는 맨발은 사내의 등허리를 훑듯이 요염하게 내빼었다. 속이 훤히 비치는 하얀 저고리에 햇살이 닿을 때마다 장 숙원의 하얀 피부가 빛나고 그사이의 가슴골이 아무도 없는 공허한 신당 안에서 음란한 기운을 쏟았다.


걸음이 빨라지는가 하더니 검은 제비나비처럼 우아하게 사뿐거리며 신당을 거닐다가 움직임이 점점 격렬해졌다.


‘끼익’하고 신당의 문이 열렸다.


장 숙원이 뒤돌다 제 치마를 밟고 넘어지자 들어온 사내가 장 숙원의 허리를 받히며 껴안았다.


“집에 갔는데 없길래 와 봤어.”


사내는 매화와 나비가 수 놓인 화려한 도포 자락을 입고 말을 할 때마다 볼에 보조개가 살짝씩 들어가는 것이 여인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도현이다.


장 숙원은 도현의 갓끈의 끝을 잡아당겼다. 끈이 끌리는 사라락 소리가 도현과 장 숙원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심장에 망치질을 해댔다. 장 숙원은 도현의 갓을 벗겨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이마가 예뻐서 말이야.”


장 숙원의 홑겹 아래로 봉긋하고 아담한 가슴이 아래위로 들썩이는 게 도현에게 전해졌다.


“너는 방탕해.”


“네게만 그런 것이야.”


도현은 장 숙원의 쪽 찐 머리를 한 손에 움켜쥐고 머리를 젖히더니 제 입술로 친절하면서도 교활하기 이를 데 없는 장 숙원의 입술을 짓이겼다.


도현이 미처 닫지 못한 신당의 문으로 산기슭의 꽃가루들이 밀려 들어오고 노오란 꽃가루들이 신당 안을 부유하며 벌거벗은 둘의 몸을 간지럽히곤 했다. 도현은 붉은색 광목을 힘껏 잡아당겨 장 숙원의 몸을 감싸 안고 신당 옆 암자로 천천히 걸어갔다.


장 숙원은 도현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내가 방탕하다면 너는 뭐야?”


"난... 머저리."


부드러운 이불 안에서 도현과 지화는 다른 이를 마음에 품고서 서로를 움켜쥐었다. 우리의 이것이 욕정인가. 욕정이 사랑이었나, 이것이 차라리 사랑이면 좋겠다 하고 생각하다가도 산 아래로 내려가면 금세 그것은 그저 욕정이었음을 깨닫기를 여러 번이었다.


‘손이 닿으면 부서질까, 마음이 닿으면 영원히 헤어질까 했던 지우가 지금 여기에 있는 너라면 얼마나 좋을까.’


‘전하. 전하의 여인은 나 하나여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서 나는 아들이 다음 보위에 올라야 할 것입니다.’


붉은 천이 서로를 휘감고, 새근거리며 자다 눈을 뜨니 깊은 밤이었다. 먼저 잠에서 깬 도현이 눈을 찌푸리며 일어나는 장 숙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지화야. 배고프지 않아?”


“응.”


“잠시만 기다려. 나가서 상을 차려올 테니.”


장 숙원은 팔을 이마에 올리며 말했다.


“조선 팔도에 너만치 다정한 사내는 없을 것이야. 내가 좋아하는 밤 조림을 또 챙겨온 건 아니겠지?”


“맞아. 밤 조림. 집에 남아 있는 것 중 마지막. 기대하고 있었구나?”


몸을 일으키며 제 옷을 신당에 두고 온 걸 깨달은 도현은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너하고 있으면 나는 딴사람이 되는 거 같아.”


장 숙원은 몸을 일으켜 도현의 목을 얼싸안으며 말했다.

“아니. 넌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맞아.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 네 유혹을 거절 못 하는 반푼이. 널 안고 싶어 나도 모르게 이 산을 오르는 호색한.”


도현이 지화를 처음 만난 건 반년 전이었다. 관악산 옆 과천현 현감이 효원각에서 술을 먹고 나서다 디딤돌에 발을 헛디뎌 마당으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었다. 설향은 도현에게 그를 데려다주고 오라 하였고, 돌아오는 길에 산적을 만나 절 부근에 쓰러져 있는 것을 지화가 신당 옆 암자로 데려와 치료해 주었었다.


지화나 지화의 신당은 마을 변두리에 있는 평범한 무당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음침하기보다는 평온했고 이제껏 맡아보지 못한 차분하면서도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신당 또한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화려하면서도 극락에 있는 듯 우아했다.


갈비뼈 아래 스친 무딘 날이 남긴 상처는 꽤 오래 낫지 않았다. 지화가 붕대를 갈아 주고 약을 먹이며 침을 놓을 때 스치는 분 냄새와 여인의 체취는 아픈 병자의 몸임에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지우가 효원각에 일하러 오면서 들뜬 마음을 도현은 엉뚱한 곳에 풀어버리고 말았다. 지우와는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으니, 지화는 도현과 밤을 보내어도 상관없다는 듯 굴어버렸으니 말이다. 그 뒤로 도현은 달포에 한 번쯤은 장 숙원의 신당에 왔었다. 오늘은 근 두 달 만이었다.


“어디 멀리 다녀왔어? 지난 달에는 보이지 않길래.”


“봄 가뭄이 심해 종묘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고 해서 도와주고 왔어. 아는 무녀님이 종묘에 있는 수복실 일을 도와주시거든.”


장 숙원은 어느 때 보다 편한 표정으로 도현의 가슴에 안겨 있었다. 이때만큼은 그저 이 산의 일부인 것처럼, 이 남자의 모든 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에 비가 오기는 했지만 부족하긴 했어. ...넌 평범한 무당은 아닌가 보구나?”


“내가 모시는 신이 보통 잡신이 아니긴 해.”


장 숙원은 원한이 만든 화신(禍神)이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다녀온 뒤로도 산신님이 이끄시는 데로 매일 기도를 올리느라 바빴어. 내일쯤 비가 내릴 거야. 백성들에게 턱없이 부족했잖아.”


“궁에 있는 장 숙원이 기우제를 이끌었다고 들었는데. 너도 봤어? 그 요녀!”


요녀라는 말에 장 숙원은 ‘쿡’하고 삐질 웃었다.


“세자 저하를 잡아먹고 이제 전하까지 넘보는 게 분명해. 능력이 시원찮은가 봐. 비도 하루에 그친 걸 보니. 아마 지화 네가 앞날도 더 잘 내다볼 거야. 너보다 곱지도 않을 거고.”


장 숙원은 도현의 배를 꼬집으며 말했다.


“신을 모시는 이에 대해 함부로 말했다가는 무슨 화를 당할지 몰라. 입조심 하라고.”


“알았어.”


“그리고 예뻐. 나만큼이나.”


지화는 도현의 눈이 자신도 장 숙원도 아닌 다른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보여 물었다.


“효원각 매출이 월도각을 훨 앞질렀다고 소문이 파다하던데 그 여자 때문이야? 도현이 마음에 품고 있다는 그 양반네 여식?”


“강단이는 해내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내는 게 없고 궁금한 건 못 참지. 그윽한 술, 맛깔난 안주를 만들어 줬으니 우리 입장에서는 매우매우 고마운 사람. 작은 주막에서 상단을 가진 여각까지 성장하는데 강단이와 강단이 아버지 도움을 많이 받았어. 모녀가 생각이 기발해.”


도현은 아무래도 지우의 이름을 직접 말하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쓸쓸해졌다. 나흘이면 온다던 사람이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렇게 좋으면 보쌈을 해서 멀리 도망가는 건 어때? 동해에 있는 장기군(長鬐郡, 포항시)에 숨어 살도록 내가 다리 놓을 수 있는데.”


“내가 여인과 도망을 치고 이곳에 오지 않아도 넌 괜찮은 것이야?”


이건 또 무슨 마음일까 싶었지만, 도현은 지화가 조금은 섭섭해했으면 했다.


“몸을 섞었다고 마음도 섞일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알고 있고, 마음을 섞었으나 몸이 가까이 있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니 섭섭해하지는 않을 것이야. 다만 보고 싶겠지. 휘영청 달 밝은 밤에는 도현이 네가 그립겠지.”


“언젠가 내가 누구와 도망칠 일이 생기거든 널 찾아올게.”


“내 힘껏 널 도울 거야. 아무도 못 찾게. 그런데 도현. 내가 예전에 기우제에서 얼핏 선왕의 용안을 본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신기하게도 너는 선왕의 용안과 닮았어.”


“그런 불충한 언사는 입 밖에도 꺼내지 말아. 누가 들을까 무섭다.”


장 숙원은 꺄르르 웃으며 일어나서는 도현에게 쉬고 있으라 하고 신당에 가 도현와 제 옷을 가지고 온 뒤 부엌에서 상을 차렸다. 밤 조림을 소담히 담았다.


‘강단이라는 여자아이를 월도각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숙부께서 좋아하시겠어. 지금 한양에 머물고 있는 청나라 상단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이득을 헤아릴 수 없겠지.’


장 숙원은 자신의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너는 도현의 아기씨가 아니다. 전하의 아기씨이다.’


AI 생성이미지


도현이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신당을 떠나고부터 비가 삼 일을 연달아 내렸다. 대비와 공주는 장 숙원이 얼마나 영험한지를 주상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해 댔다. 중전 신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니 숙원 장씨에게서 후사를 보아야 하지 않겠냐 하였다.


“주상. 역도의 무리들이 이 왕가를 흠집 내려 살쾡이같이 지켜보고 있음을 잊으셨습니까? 자손을 잇는 건 주상의 의무입니다. 이러다가는 조선 곳곳에 더러운 피가 섞인 것들도 지들이 왕족입네 하며 이 자리를 탐하기 일쑤일 겁니다. 어찌 숙원과 초야(初夜)조차 치르지 않으셨단 말입니까?”

월, 수, 금, 일 연재
이전 12화12. 같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