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같은 사람

시계를 안고 시간을 함께 걷는다.

by 은송하

지우는 유진이 무엇을 알고 저리 묻나 싶었다. 손바닥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혹 어제 함께 술을 먹었을 때 제가 실수한 것이 있었나 되짚어 보았으나 크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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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객주님은 동무도 사내도 아닙니다. 저 같은 것이 어찌 그런 분의 동무가 되겠습니까? 저는 효원각에서 일한 지 이제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작은 재주로 쓸모가 있기에 챙겨주시는 것뿐입니다.”


“쓸모라. 하긴... 재주라는 것이 숨기는 것이 더 어려우니.”


“영감님도 제가 쓸모가 있어 보여 영감님 댁에 머물라 하셨고 저에게 문제도 내신 것이 아니십니까?”


“맞다. 식초로 글을 쓰는 건 네가 생각해 낸 것이냐? 아니면 효원각 객주가 너에게 그리하라고 이른 것이냐?”


지우는 눈을 번쩍 뜨려 하였으나 퉁퉁 부은 눈이 일그러질 뿐이었다.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요거타인지 요거트인지 하는 그것에 매실 장아찌가 올려져 있더구나.”


“...”


“식초로 글을 쓰려고 이화주에 냄새가 강한 것을 올렸겠지.”


지우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침묵이 유진에게 답했다. 생각의 시발점이 지우인 것을 말이다.


“나는 냄새에 예민한 편이야.”


그러고 보니 개천이 그랬다 유진은 고약한 냄새를 싫어한다고 말이다. 유진은 자기 전에 꼭 향을 피우고 그중에서도 난과 지초의 향을 좋아하니 방에 넉넉히 챙겨 놓으라고.


“떨지 말아라. 한양 바닥에서 공주 자가와 나 사이에 사연이 있다는 걸 모르니 이가 있더냐. 어여쁜 공주 자가가 아프시기 시작하자 내가 내쳤다는 소문 말이다. 세자 전하가 돌아가시기까지 했는데 냉정하기 그지없는 파렴치한 놈. 그런데 아픈 영상의 손녀와는 혼약을 밀어붙여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한 탐욕에 눈이 멀고 죽음을 몰고 다니는 재수없는 녀석.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오만방자한 놈.”


감정의 내비침 없이, 음의 높낮이도 없이 자신에 관한 소문을 말하고 있는 유진을 지우는 멀뚱히 바라봤다. 인생사 그럴 수 있다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위로라도 건네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유진이 말을 이었다.


“혼례를 치르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유진의 씁쓸한 미소에 지우는 함께 술을 마신 벗님에 대한 추억으로 차분히 말했다.


“제가 보기에 영감께서는 비정한 분도 오만한 분도 아니십니다.”


‘재수가 없는 건 맞지만.’


지우는 말끝을 흐리면서 흔들리는 호롱불을 따라 달라지는 유진의 그림자를 바라봤다.


“네가 보기에 나는 어떤 사람이더냐?”


유진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계집이 떠들어댈 자신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그러셨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사람입니다.”


“날 만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어린 계집이 사람보는 눈이 있다고 칭찬이라도 듣고 싶었던 것이냐?”


지우는 명료한 눈동자로 유진의 눈을 바라봤다.


“제가 자개장 안에서 엿들은 걸 아시면서도 공주 자가 앞에서 절 끌어내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영감님은 공주 자가에게 들키면 제 목숨이 그날로 날아갈 걸 아셨겠지요? 공주 자가의 성정을 아시니 말입니다. 제가 열이 나자 의원에 데리고 가지 않으시고 집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혹여 객주가 저를 찾아 해코질 할까 염려되어 그러신 거 아닙니까?”


“의도가 없던 일들을 의도가 있었다는 듯이 잘도 이야기하는구나. 나는 네가 말한 대로 그렇게 선한 의도만을 가지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아픈 이가 가족이나 의원, 동무나 연모하는 이를 제외하고 누구를 찾겠냐고 물으신 것은 평양 부윤댁 아씨에게 접근하려고 하신 거 아닙니까? 공주 자가나 영의정 대감의 손녀처럼 될까 걱정되셔서요.”


유진은 지우의 쫑알거리는 입술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제 함께 술을 마시던 강지우의 입매와 똑 닮았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평양 부윤댁 아씨도 한양으로 오자마자 몸져누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지우는 소란당에서 평양 부윤의 집을 물끄러미 보던 유진이 떠올랐다. 미래의 신부를 향한 연정이고 걱정이었을 것이다.


“신부되신 분이 염려되시지요?”


‘신부라. 이번에는 맞이할 수 있을까?’


“이제 스물 일곱 되시니 노심초사 이 혼례만은 꼭 치르시고 싶으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내가 이때까지 그것을 참았으니.”


지우의 시선이 서서히 내려가 그곳에 닿기 전에 유진은 옆에 있던 서책을 돌돌 말아 지우의 머리를 콩하고 가볍게 쳤다.


“어허! 그... 그.. 음탕한 눈, 치우지 못할까?”


“치이~! 설마 참지 않으셨습니까?”


지우는 아프지도 않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유진에게 볼멘 소리를 했다. 유진은 참았다면 뭔가 자존심이 상하고 참지 않았다면 명예에 금이 가는 것은 둘째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니 고개를 돌려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상스럽구나!”


“...평양 부윤은 대대로 북쪽 지방에 끼치는 힘이 컸고 무관들과 친분이 많으니 이번에 대제학 가문과 연을 맺고 한양으로 들어와 병조 판서가 되시면 영감께도 전하께도 큰 힘이 되실 겁니다. 장인께서 중앙에 관직을 얻는 것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마당 쓸고.”


지우가 다음 것을 맞춰보라는 듯 좀 전에 자신을 쳤던 서책을 다시 말아 유진의 입에 대자 유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마당을 쓸면... 깨끗해진다?”


“땡~!”


지우는 서책으로 유진의 이마를 콩하고 쳤다.


“마당 쓸다 돈 줍고도 모르십니까? 엽전이 어디 떨어지지나 않았을까 하고 비질을 미친 듯이 하는 천것의 심정 같은 건 모르실 테니. 흠.”


유진은 서책을 또 말려다 자신이 유치한 복수나 하려는 것에 어이가 없어 크게 웃어 넘겼다.


“...내 평생 마당 빗질을 해본 경험이 없어 맞추지는 못했으나 그렇다고 백성의 그 간절함을 모르진 않는다. 그나저나 평양 부윤이 병조 판서가 될 거라는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느냐?”


“저작거리에 도는 말을 해본 것입니다. ”


“자개장 안에서 들은 것이 평범한 것들은 아니었겠구나. 그래서! 네가 평양 부윤댁 진 낭자라면 누구를 찾겠느냐?”


“죽을 것같이 아프다면 두 가지 중 하나이겠지요. ...살려고 누군가를 찾거나 아니면 평안히 죽으려고 누군가를 찾을 것입니다. 의원은 아니라고 하셨으니 굿이라도 하려고 하거나 영험한 스님을 찾겠지요. 서학을 섬기는 자들도 병이 나으려고 기도 같은 걸 한다고 들었습니다.”


“무녀들이나 스님, 사주 명리에 밝은 자들이겠구나. 천주교도를 찾지는 않을 것 같고.”


“저를 부윤 대감댁에 들여보내 주시면 뭐라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신기가 있는 어린 무당이라 해보겠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이상한 점은 없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너만 보낼 수는 없다. 같이 들어갈 방도를 찾아보자.”


유진은 지혜로운 책사(策士) 한 명을 얻은 듯 든든했다. 유진도 생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혼자 하려고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었다. 때마침 밖에서 유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영감님. 전하께서 하사하신 자명종을 들고 왔습니다. 둘 다 댁으로 보내드릴까요?”


“하나는 내일 집으로 보내주시게. 그리고 하나는 지금 들고 갈 것이야.”


“네.”


궁인이 자명종 하나를 집무실 안으로 들고 들어오자 지우는 벌떡 일어나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명종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들어라. 네 것이니.”


“정말입니까?”


지우는 자칫 유진에게 가서 안겨 매달린 뻔한 것을 멈추고는 제 몸보다 더 큰 자명종을 번쩍 안아 들었다.


“저는 이것을 들어 손이 없으니 영감께서 등롱을 드시고 제 갈 길을 밝혀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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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흐뭇하게 웃으며 등롱을 들었다. 환하게 웃는 강단이는 정말로 그자와 많이 닮았다. 강지우. 울어도 웃어도 투정을 부려도 미운 구석이 없었다.


그래! 같은 사람이다.


마지막 말끝에 ‘다’라고 붙일 때 약간의 비음이 섞이는 음성. 같은 냄새. 목에 스쳐 닿던 입술의 감촉. 손에 감기던 가는 허리. 복숭아뼈에 있던 붉은 점.


사내와 여인을 번갈아 사는 너는 대체 누구냐?



관악산 자락에 신당을 차린 장 숙원은 선왕과 세자의 위패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관악산의 화기(火氣)가 궁에 좋지 않다며 이곳에 신당을 마련하고 싶다고 하였을 때 죽은 선왕과 지금의 대비 윤씨가 지어준 것이었다.


장 숙원은 눈보다 하얀 소복 차림에 얇은 검은 천을 어깨에 두르고 두 손을 위로 향하여 겹쳐 놓은 채 다소곳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광목천에 물들인 오방색이 높은 서까래에서부터 바닥까지 흘러내리고 높은 창에서 들어오는 봄볕이 장 숙원의 사위를 따뜻하게 감쌌다.


“관악산을 지키시는 산신이시여. 제 어미는 단지 이곳 관악산에서 약초나 산나물을 캐며 살아가던, 아비는 산 아래에서 소작농으로 살아가던 착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 부모님은.”


감은 두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선왕과 대비의 부덕으로 나라가 망조에 들었고 백성들은 악해져만 가니 저는 어린 나이에 결심했습니다. 나의 복수에 백성의 피고름과 눈물까지 더해 갚겠다고. 부모님을 지켜보셨던 산신께서는, 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던 산신께서는 저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산중에 쓰러진 저를 그분께서 구하셨으니 말입니다.”


장 숙원은 천천히 눈을 떠 선왕의 위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선왕의 자식들인 휘랑과 휘우, 은우가 궁전 뜰에서 놀던 걸 멀찍이서 보기만 하던 때가 잠시 붉게 빛났다 사라지는 노을처럼 아른거렸다.


그들은 언제나 아침 볕 같았고 자신은 늘 그 볕에서 겨우 자라난 잡초 같았다. 그 볕이 없이는 자랄 수 없고 크게 자랐다간 뽑힐 것 같았던 두려움에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장 숙원은 자기 앞에 놓인 죽은 선왕의 비책서(祕策書) 들어 읽었다. 읽고 필사하며 닳고 닳은 것이 수어 권이었다. 대비의 약점과 취향. 궁에서 주름잡았던, 여전히 건재한 대신들의 가족과 흠집들이 자세히 적힌 책이었다.


선왕의 의심과 불결한 생각들이 만든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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