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별채

그의 질문들.

by 은송하

“돌아가신 마님이면...”


지우는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도련님 어머님. 정부인이신 조씨 부인을 모른단 말이냐?”


개천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이 못생긴 계집애에게 쌀쌀맞았던 게 조금 미안해 기를 살려 주려 난처한 말을 꺼냈다. 도련님이 저것을 특별히 여길 리 없을 터인데.


지우는 유진에게 약간의 동질감, 둘 다 보통을 약간 비껴가는 아비를 둔 것에 대한 측은함을 느꼈다. 엄마가 없으니 있는 동안에라도 잘 대해줘야겠다 뭐 그런. 몇 년 전에 유진의 아버지인 대제학 대감이 처녀에게 새장가를 든다고 백단이 부러워했던 기억이 났다.


백단이 지우에게 괜찮은 원녀(怨女)가 있는지 물어봐서 효원각 객주 설향과 잘해보라 했더니 객주와는 남녀를 뛰어넘은 우정이니, 시대가 우리 관계를 담을 수 없다느니 해괴망측한 소리를 했었다.


“지금 마님은 여기 오신 적이 없으십니까?”


“도련님이 발을 들이지 말라 신신당부해서 말이야. 전 마님과 추억이 많은 곳이니. 지금 마님이 어질고 좋은 분이라 문제 삼지 않고 잘 넘어가 주시더구나.”


‘남매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다 큰 아들에게 뭐랄 거야. 게다가 어린 첩까지 들어와 앉았는데 아들하고 사이까지 나빠 대감에게 밑 보일 수는 없었겠지.’


지우는 코 평수를 늘리며 마당을 두리번거렸다. 유진의 어머니가 자주 오셨던 곳이라 그런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대제학 대감께는 아실이라는 첩이 있다. 여기에 오래 있지는 않겠지만 알아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여종이 있으시면 편하셨을 텐데.”


개천은 하늘을 보며 지난 일들을 곱씹는 듯했다.


“도련님을 뵙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다들 도련님 한 번 만져보겠다고 별의별 사특한 짓들을 벌였다.”


“이상한 여종들만 여기 왔었나 봅니다.”


개천은 아무리 봐도 별종이라는 듯 지우를 이리저리 뜯어 보았다. 지우는 새벽에 저도 유진의 눈썹을 만져볼까 했던 건 잊고 괜히 고결한 척을 했다.


“도련님이 여기에 너를 오라 하신 건 네가 그런 딴 맘을 품는 계집들과는 다르기 때문이겠지? 네 분수를 잘 알 테니 말이야. 내가 도련님 수발에 본가에서도 일이 많아 도련님이 나를 안쓰러워하신 거다. 내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서 자손을 보라는 뜻 같기도 하고.”


지우가 보기에 개천은 제 상전을 아주 다정한 사람으로 여기는 듯했다.


“도련님이 원체 깔끔한 걸 좋아하시고 고약한 냄새는 질색이시니 청소를 깨끗이 해야 하느니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개천은 허리춤에서 책 하나를 꺼냈다.


“이걸 너에게 전해주라 하셨다. 너 같은 계집에게 이런 책이 왜 필요한 건지. 너는 글을 아느냐?”


지우는 별 대답 없이 무심히 책을 받아 들고 개천에게 물었다.


“뭐 조금. 영감님은 어디 가셨나요?”


“등청하셨다.”


“언제 오시는데요?”


“오늘은 늦는다고 하셨다. 전하와 석강이 끝나시면 전하께 상소를 올리시고 퇴청하실게야.”


“일을 하기는 하시는군요?”


“어허! 일을 그냥 하시는 정도가 아니시다. 스물 하고도 일곱에 좌승지가 된 것이 쉬운 일이더냐? 게다가 그중에 삼 년은 돌아가신 마님의 3년 상을 치르셨거늘.”


“...”


“네가 먹을 식사는 내가 가지고 올 것이다. 인시(3시-5시)와 신시(15-17시). 너는 별채에만 있고 이 집 어디에도 돌아다녀서는 안된다. 도련님께서 너에게 야식 반합을 궁으로 가져오는 일을 시키셨으니 내가 부를 때까지는 짐을 풀고 도련님 방을 정리하거라.”


“네.”


개천은 눈을 찢으며 입단속을 시키고는 안채로 가버렸다.


지우는 개천이 건네준 책을 이제야 자세히 보았다. 산학원본이다.


“신세 진 사람에게 준다더니 나였나? 내가... 강단이가 산학을 좋아하는 줄은 어찌 알고? 어찌 됐든 같은 책이 두 권이니 한 권은 험하게 써도 되겠어. 억지로 집에 붙들어 놓았던 것이 미안하긴 했던 모양이야?”


지우는 행랑채 마루에 걸터앉아 별채 정원을 보았다. 앵두나무의 연분홍 꽃잎이 어제 비바람에 많이 떨어져 흩날렸다. 개천 외에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고 별채에서 홀로 지냈을 유진을 생각하니 조금 외로웠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대제학의 아들, 중전의 아우,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선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했어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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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책을 휘리릭 넘겨 본 뒤에 짐을 풀었다.


“집에 다녀오게 한 것도 고마워해야 하나? 내가 이 집 문밖을 나가서 무슨 말을 떠들고 다녔을 줄 알고. 생각보다 허술한 구석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사람을 쉽게 믿는 모양이야? 그러니 공주에게 그리 당하지.”


지우는 청소를 열심히 하여야 한다는 개천의 말을 곱씹으며 걸레를 찾아 들고 유진의 방으로 들어갔다. 병풍 뒤에 미닫이문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자연스레 열어보니 문 뒤에 있는 방에는 책들과 문서가 가득했다. 책장 구석구석을 닦는 중에 서책들 사이 종이 하나가 빼달라는 듯 삐죽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뭐지? 중요한 공문이나 연서라도 되는 건가?”


지우가 종이를 빼내자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아픈 사람이 가족과 의원, 연모하는 이 외에 누구를 찾을 성 싶으냐?]


“이게 무슨.”


글 제일 언저리에 자잘한 점들이 찍힌 호박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지우는 유진이 저에게 보낸 편지임을 확신했다.


“죽일까?”


지우의 눈빛에 잠깐 살기가 스쳤다.


“그때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는데. 으이씨!”


마루까지 광을 내고 저녁을 먹고 나니 개천이 궁궐 문지기에게 전할 유진의 야식 반합과 밤길을 밝힐 등롱을 내주었다.


문지기에게 반합을 전하고 한 시진쯤 지나면 유진이 나올 것이라 하였다. 퇴청할 때는 왠만해서는 걸어서 집까지 온다고 하였다.


궁에 다다르니 지우를 기다렸다는 듯이 유진이 서 있었다. 관복을 입은 유진은 관료의 기품이 넘치는 몸짓으로 지우를 향해 손짓했다. 지우는 젠젠 걸음으로 유진에게 다가갔다.


“영감님. 개천 아저씨가 문지기에게 반합을 전하면 된다고 하셨는데 이리 나오셨습니까?”


“전하면 된다. 오늘은 내가 먹을 것이 아니라 여기 문지기들이 먹을 것이다.”


그러자 문지기들은 유진에게 감사하다며 넉살 좋게 인사하고는 지우의 손에 든 것을 얼른 잡아채 갔다.


“다시 들어가십니까? 마치실 때까지 소인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지우는 자분자분 말하였다. 오랫동안 익숙하게 유진의 수발을 들어온 사람 같았다.


“이보게. 우리 집 하인인데 내가 오늘은 퇴청할 때 짐이 있어 그러네만 잠시 승정원에 데리고 갔다가 나와도 되겠는가!”


“그렇게 하십시오. 좌승지 영감님.”


문지기들은 반합 안에 있던 쑥버무리를 일찍이 꺼내 먹으며 지우에게 헤헤 웃어 보였다. 지우는 유진의 옆에 붙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우는 처음 들어와 본 궁 안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단청에 곳곳에 화려한 복장의 금위군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고 복숭아같이 곱디 고운 궁녀들이 사뿐사뿐 걸어 다니고 있었다. 지우는 죽은 세자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선하기 그지없는 인상, 세상 물정은 하나 모르면서도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던 눈빛. 그런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무언가가, 그 그늘이 실뱀처럼 궁을 휘젓고 다니는 듯 밤에도 훤하게 밝은 궁궐 뜰임에도 지우는 오싹했다.


“아까 한 말을 허투루 들은 것이야? 내가 짐이 많다고 하지 않았느냐?”


“저는 연약하온데.”


지우는 입을 삐죽 내밀며 등롱도 겨우 드는 척을 하였다.


“무슨 씨름대회에서 3등을 하였다 들은 것 같은데.”


“네?”


“정신이 혼미한 중에 그리 들은 것 같은데 아니냐?”


“단옷날 그런 일이 있긴 있었읍죠. 그런데 참가자가 3명 밖에 없었습니다.”


유진은 쿡하고 웃은 것을 숨기려 헛기침을 해댔다. 지우가 그날 알량한 허세를 부리면서 감당 못 할 자신을 업고 효원각에서 폐가까지 걸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몸살이 들 수밖에 없었겠다.


“내가 남긴 쪽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았느냐?”


“생각은 해보았으나 이렇게 걸으며 말하긴 가벼운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승정원에 가서 얘기하자꾸나.”


유진은 지우를 근정전 서쪽에 있는 승정원으로 데리고 갔다. 유진의 집무실은 복도에서 세 번째 칸에 있었다. 유진의 성격답게 정갈하게 있을 것만 놓여 있고 군더더기 없이 단촐했다. 집에서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진이 의자에 앉자 지우도 의자에 앉았다. 그런 지우의 행동거지에 유진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넌 상것이 아니다.’


“짐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우가 아무리 둘러봐도 가지고 갈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조금 있으면 근정전에서 가져다줄 것이다. 제작년, 지주들이 수확물과 토지에 비례해 세금을 잘 내었는지 확인하였다. 다음 해에도 세금을 잘 낸 이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해주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땅의 일부를 뺏어 소작농들에게 소유권을 이전하였지. 이에 세금이 늘고 백성들이 기뻐했으니 오늘 전하께서 나에게 자명종을 하사하셨다.”


유진이 자신의 공을 치하하는 말을 하든 말든 상관없이 지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자명종을 직접 눈으로 볼 날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인시(3시-5시)와 신시(15시-17시)에는 일곱 번, 오시(11-13시)에는 아홉 번 울린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하사하셨다니. 영감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유진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두 개나 말입니까?”


“그렇다.”


지우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그중 하나가 고장 난다면 부탁하여 그 속을 뜯어보고 싶었다. 지우는 흡사 먹이를 두고 헥헥거리는 삽살개처럼 눈을 초롱거렸다. 유진은 방긋 웃으며 엉뚱한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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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사내가 좋으냐 여인이 좋으냐? 아니면 혹 너의 오라비와 너는 쌍태아냐?”


“네? 저희 오라비는 저보다 여덟 살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처자에게 무슨 질문이 그러십니까? 동무로는 여인이든 사내이든 상관없지만, 연정을 품는다면 당연히 사내가 좋지요.”


“상것 아니랄까 봐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을 배우지 못한 것이냐? 그래서 그 소 객주라는 자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것이야? 그럼 그자는 너에게 동무냐 사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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