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목소리.
진경은 눈이 반쯤 감긴 채로 일어나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머리는 다 뒤집혔고 티셔츠의 목은 잔뜩 늘어나 있다.
영어 학원 원장인 제니스가 갑자기 맡긴 학원 후기들을 손보느라 학원에 딸린 기숙사에서 밤새고 정오가 넘어서야 잠들었다. 진경이 손을 보면 학원생 유입이 더 원활하다는 제니스의 기분 탓, 진경에게 용돈을 더 챙겨주려 하는 어른의 마음이다.
“아... 몇 시지?”
진경은 휴대폰을 보며 알람 소리를 못 들은 게 실화인지 싶어 눈을 똥그랗게 뜨고는 큰 눈을 껌뻑였다. 폰을 보고 또 봤다.
“6시? 젠장... 젠장. 젠... 장!”
진경은 이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학원에서 영화관까지 어떻게 해야 빨리 갈 수 있을지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샤워실을 다녀온 후 머리를 말리며 택시를 탈 수밖에 없겠다고 결론지었다.
화장은 하고 가야겠지? 진경은 제니스가 입학 선물로 준 오렌지색 틴트를 입술에 톡톡톡 두드렸다.
“예쁘다. 민망하고 어색하지만 그래도 약속했으니까 용기 있게. 진경아. 오늘은 이상한 소리 지껄이지 마라. 제발이다.”
진경은 긴장감을 내려놓으려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거울 속 자신이 낯설었다. 남자를 만나러 간다고 이것저것 고치려 들다니.
챙겨온 분홍색 기모 원피스를 머리 위로 쏙 넣고 흰색 패딩을 걸쳤다. 머스터드 색 발목 양말에 진갈색 스웨이드 로퍼를 신고 복도로 나왔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있었던 2박 3일 압살 특강반 학생들이 빠져나가서 그런지 기숙사 복도는 한산했다. 학원 앞 큰길로 나온 진경은 휴대폰을 열어 택시 호출 전화번호를 검색했다.
“바로 호출되는 택시 앱 같은 거 있으면 좋을 텐데. 머릴 감는 걸 포기하고 지하철 탈 걸 그랬나? 그래도 친구 만나는데 안 씻는 건 좀.”
진경은 배터리 5%에서 홈 화면 조명이 어두워지자, 충전하는 걸 또 까먹었냐 하고 얼굴이 죽상이 되었다.
“강진경. 넌 진짜.”
진경은 버스 정류장 한 정거장 위에 있는 대형 마트 앞에 택시 승강장이 있었던 게 생각나 빠르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 맞은편으로 마트와 택시 승강장이 보여 진경은 초조하게 신호등이 초록색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오후 6시 47분. 저녁 장을 보러 사람들이 많이 있을 만도 한데 오늘따라 거리가 이상하리만치 한산했다. 진경은 그제야 이번 주가 겨울 들어 제일 추울 거라는 기상 뉴스가 생각났다.
‘빠듯하긴 해도 시간 맞춰 도착하겠어. 7시 30분 영화라고 했지?’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고 진경이 횡단보도로 한 걸음 내딛으려고 하는데 그 순간, 뒤에 있던 상가 창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낡고 오래된 4층 상가 건물이다. 외벽에는 녹물이 잔뜩 흘러내려 있고 샤시도 오래된 갈색 샤시다.
진경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자 2층 상가 창문, 불투명한 갈색 시트가 덮인 창문에서 무언가가 계속 창문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안에서는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희미한 그림자가 비쳤다.
‘뭐지? 사람이 왜.’
급기야 그 사람은 머리를 창문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으로 휘갈기며 쓰고 있는 것은.
SOS.
곧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있는지 갑자기 사라졌다. 창문에는 진득한 피 같은 것이 거칠게 발라졌다. 진경은 손끝과 입술이 금세 새파래졌다. 피가 발린 창문.
‘사라지지 마. 사라지면 안 돼. 또 잃어버릴 수는 없어.’
진경은 손을 덜덜 떨며 112에 전화했다. 경찰에게 정황 설명을 하는 도중에 휴대폰이 꺼져버리고 말았다. 잠시 발을 동동거리며 경찰을 기다렸다. 입술이 마르고 입 안이 텁텁해졌다. 손톱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수가 30분 정도는 기다려 주겠지?’
경찰이 오기 전, 한 손에 묵직한 편의점 봉투를 든 여자가 건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이 시간에 샵이라도 다녀왔는지 긴 머리에 웨이브를 크게 말았고 숙련된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짙은 화장을 했다. 몸매가 드러나는 슬림핏 원피스를 입고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검은 부츠를 신었다. 몸의 굴곡이 타인의 손을 부지런히 끌 것 같았다. 그녀는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진경은 경찰에 신고했으니 괜찮겠지 하고 스스로 되뇌이며 발길을 돌리려다 결국 그 여자를 따라 건물에 들어가고야 말았다. 여자의 하이힐 똑깍 소리에 진경의 발걸음 소리가 묻혔다.
진경은 여자가 2층으로 가지 않기를, 창문과 아무 상관이 없기를 바랐지만, 여자는 2층 사무실 같은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한 계단 아래에서 진경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사지를 떨었다.
엄마가 오빠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었다. 싱크대 앞이었다. 너 같은 게 나와서 내가 병이 생겼어. 어떻게 나한테서 이런 병신이 나왔지? ...네 아빠가 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건 다 니들 때문이야 알아? 내가 너희들만 낳지 않았어도. 내가 이렇게 괴물같이 변하지만 않았어도. 아빠보다 내가 더 성공했을 거라고.
...강진경! 네 이쁜 얼굴로 남자들 꼬셔서 상 탄 거지? 지호도 너한테 빠져서는. 진경아. 언젠가는 너도 나처럼 될 거야. 아무도 기억 못 하는 작가, 사랑을 갈망하는 여자가 돼서 고독 속에서 침몰하는 태양.
...진경아. 너는 아무도 사랑하지 마. 글은 이제 쓰지말자 진경아. 네 글은 자원을 낭비하는 쓰레기야. ...우리 진경이는 외롭게 살지 않기를. 제발. 제발. 버림받지 않기를.
진경이 눈물을 쏟으며 사색이 되어 가는 동안 사무실 안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욕이 새어 나왔다. 욕을 빼고는 풀어달라고 고함치는 소리. 희미하게 간청하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어떻게 들으면 실소가 섞인 음침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거의 소리들은 썰물처럼 밀려나갔다.
‘어떡하지? 안에 있는 사람이 혹시 지금 죽기 직전이면. 살려야 해. 살아야 해.’
진경의 눈에 계단 옆에 놓아둔 소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소화기를 들고 조심스럽게 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천천히 돌렸다. 다행히 사위가 조용했다. 아장거리며 조용히 들어갔다.
긴 테이블과 의자 몇 개, 그리고 한쪽에는 파란색 롤스크린이 내려와 있었다. 카메라 거치대와 조명판 같은 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까 그 여자, 어디로 갔지?’
진경은 여자의 신음에 걸음을 멈췄다. 뭔가 질퍽거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는 듯했다. 둘러보니 대각선 방향으로 방이 있다. 조심스럽게 다가간 진경은 투명창 너머로 남녀가 겹쳐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떨군 머리 아래로 검붉은 피가 여자의 움직임을 따라 주욱 내려왔다 올라갔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때 진경이 들고 있던 소화기가 문고리에 부딪혔다. 뒤돌아본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진경은 소화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고요한 적막 속에서 시멘트 바닥에 부딪힌 소화기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진경은 ‘엄마, 잘못했어요.’라는 말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진경의 모습을 본 여자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태선씨. 딴 년 있을 줄 알았어. 저런 베이비는 취향 아니지 않았어? 어디 물고 빨대나 있냐고.”
여자는 태선에게서 몸을 떼고 치마를 내리고서는 옆에 있던 술병을 집어 들어 진경을 향해 걸어갔다.
진경은 떨어진 소화기를 집어 들고 안전핀을 뽑으려 했지만 땀 때문인지 계속 손이 미끄러졌다. 계속 뒷걸음질하며 걷다가 조명 반사판이 넘어지고 반사된 빛이 문을 열고 나온 여자의 얼굴에 닿자, 그녀는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입술을 쓱 훔쳤다. 자리를 이탈한 색조는 여자를 기괴한 모습으로 만들었다.
여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소주 뚜껑을 따 왈칵왈칵 몇 모금 마시고 바닥에 소주를 부었다. 진한 알콜 향기가 진경의 코에 닿기가 무섭게 여자는 테이블에 소주병을 세게 쳤다.
“태선씨하고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는데. 네가 방해해? 너같이 볼륨도 없는 년이 나하고 비교가 되냐고!”
진경은 이 상황에서 가슴을 쭉 펴고 앞으로 내미는 자신이 싫었다. 의사 때문이다. 긴장되는 상황에서는 가슴을 펴고 어깨를 열면 호흡이 깊어지고, 자율신경계가 안정되며, 자신감과 안전감이 회복되는 효과가 있다고 상담 내내 연습을 시켰다.
“저기. 이제라도 안 늦었어요. 안에 계신 분 놓아주세요. 그쪽 너무 예쁘고 멋지신데 이런 일로 인생 망칠 수는 없잖아요.”
진경은 가슴을 쭉 펴서 그런지 어디서 용기가 난 건지 여자가 진정되기를 기도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이제 난 돌이킬 수가 없어. 태선씨가 말이야. 내가 제일 예쁘다고 했다고. 그래서 같이 있고 싶었을 뿐이고 많이 사랑할 뿐이야. 같이 죽거나 같이 살거나. 그 외에는 선택지가 없어.”
‘태선씨? 제발 일어나서 어떻게 좀 해볼래요?’
“우리 태선씨는 참 말이 예뻐. 두루두루한테. 저기. 너을 향한 다정함은 어떤 다정함이었지? 너한테도 아름답다는 말을 했니? 아니지. 너같은 애들한테는 귀엽다면서 해맑게 웃는 모습에 반하겠다고 했겠지?”
“저는 저분 알지도 못해요. 그냥 위험해 보이셔서 올라온 거예요. 보시다시피 누가 봐도 그쪽이 더 매력적이니까 손에 든 거 내려놓으실까요?”
그때 진경은 안에서 남자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진경을 향해 손가락을 펴 모른 척해 달라고 했다. 진경은 눈빛으로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빨리 도망가셔야 할 거예요. 제가 경찰 불렀거든요.”
태선이 여자의 손목을 잡으려 할 때 여자는 갑자기 희미하게 웃더니 손을 뒤로 꺾어 깨진 소주병을 휘둘렀다. 남자는 날카로운 유리병이 제 허리를 스쳐 지나가자 신음을 내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여자는 진경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여자한테 태선씨 절대로 다시는 안 뺏겨!”
진경은 급하게 안전핀을 뽑고 여자에게 소화기 노즐을 대며 분사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연기 속에서도 여자가 진경을 향해 병을 휘두르자, 태선은 힘을 쥐어짜서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자와 태선의 실랑이가 한참 이어졌다. 태선의 어깨와 볼에 작은 상처들이 생기고 태선이 여자의 뺨을 세게 후려쳐 여자가 쓰러져서야 조용해졌다.
여자는 애처롭게 태선을 바라봤다.
“어떻게 나온 거야? 아직 약효가 안 떨어졌을 텐데. 내가 태선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태선씨도 알잖아. 응?”
여자는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말을 끝내기 무섭게 토사물을 바닥에 토했다. 그때쯤 경찰들이 밀려 들어왔고 여자는 경찰에 잡혀갔다.
여전히 소화기를 들고 멍하게 있는 진경을 향해 태선이 다가와 물었다.
“괜찮아요?”
태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숨을 크게 몰아쉴 뿐 진경을 향해 웃어 보였다. 진경은 태선의 얼굴을 보자 여자가 왜 그렇게 매달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서글서글하게 잘생긴 인상을 풍기는 남자였다.
“네. 어. 어... 괜찮으세요?”
진경은 그제야 긴장이 풀려 눈물을 글썽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는 덕분에 괜찮아요. 아까 뭐 떨어지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어요. 많이 놀랐죠?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데려다줄게요.”
태선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필름 재단기에 자신을 묶은 노끈을 끊었다.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지만, 진경을 챙겼다.
“저기. 저기요~. 지금 몇 시죠?”
태선은 한쪽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를 읽었다.
“9시요.”
“벌써요? 망했다. 지금이라도.”
진경이 일어나 태선에게 인사하고 가려고 하자 태선은 “네. 그런데 어디선가 뵌.”하고 말을 이으려다가 이내 진경을 향해 쓰러졌다. 진경은 몸을 던져 태선을 안았다. 남자의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어떻게 해. 괜찮으세요? 네?”
여자가 ‘태선씨’라고 했던 게 생각나 진경은 이름을 불렀다.
“태선씨? 태선씨! 들리세요?”
진경이 전화기가 어디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자 때마침 경찰이 올라왔다.
“저기요. 저기... 이 분 쓰러지셨어요. 119에 전화 좀 해주세요.”
쓰러진 태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경찰은 진경을 바라보며 “혹시 아는 분이면 병원에 같이 좀 가주시겠어요? 그리고 사건 참고인으로 출석해 주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진경은 경찰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이수에게 연락해야 하는데. 아우성치는 제 마음이 말했다.
‘단란하게... 살고 싶었나 보다. 아직은 아닌데. 그러면 안 되는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