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는 영미를 향해 슬쩍 웃어 보인 뒤에 마당을 바라보았다. 지호가 진경의 어깨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주고 있었다.
작가의 집필을 위한 지원이라. 진경을 자신의 집에까지 머무르게 할 이유가 있었을까? 아내와 양아들을 들이면서? 진경의 부모님을 알고 지냈더라도 진경의 작품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크더라도.
질투? 의심? 이수는 지호가 마뜩잖았다.
현관 안으로 지호가 들어왔다.
“저기. 이수?”
지호는 아직 이수의 이름을 부르기 어색한지 안경테를 올리며 슬쩍 이수를 올려다보았다. 실내로 들어와 김이 서린 금테 안경을 벗으며 이수를 정면으로 봤다.
“인사 나눴지? 강진이 하고는.”
“네.”
지호는 안경을 다시 쓰고 거실에 있던 짐을 챙겨 영미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수 학생. 30분쯤 뒤에 점심 식사할 거야.”
경희는 5일 만에 돌아온 고용주 부부의 식사 준비에 분주해 보였다.
지호는 식사하는 중에도 온통 신경은 진경에게 가 있었다. 진경이 쓰고 있는 글이 어느 정도 진척됐는지가 궁금했다. 1938년 신춘문예에 ‘실락원’이라는 작품으로 당선한 곽하신 선생님 이후로 진경이 최연소 당선 소설가였다.
몽환적이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나이답지 않은 과감한 문체가 화제가 됐었다. 대중에게 어필되는 매력도 충분히 있어서 진경의 단편이 포함된 작품집은 이전과는 다른 판매량을 자랑했었다.
진경이 장편을 쓰고 있다는 말에 지호는 진경에게 몇 번이나 공모전에 내지 말고 저희 출판사와 계약부터 하자고 졸랐다.
“아직 한참 남았어요. 머릿속에 맴도는 그림들이 있는데 단어가 손에 잡히지를 않네요.”
출판사에 전에 없던 ‘창작자 지원 프로젝트’를 만들고 집 2층을 작가 집필실과 침실로 내줬다. 이수가 집으로 들어오면서 작가 한 명은 다른 오피스텔을 잡아주었다. 진경도 나가려는 걸 억지로 붙잡았었다. 진경과 진경의 글을 본 그 순간부터 지호에게 진경은 첫사랑 같은 거였다.
꿈결 같고 깨끗했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한국 음식 먹으니까 기운 난다. 그렇죠?”
영미는 떡갈비 한 점을 떼다가 지호의 밥그릇 위에 놔주었다. 지호가 연하라는 걸 알았어도 말버릇까지는 아직 고치지 못했다.
“어제 잠을 잘못 자서 좀 멍하네. 이모님 음식 먹고 싶긴 했어. 참. 이수야. 사 온 선물은 밥 먹고 줄게.”
“네.”
“진경씨는 입학 전까지만 여기 있는 거지?”
“아마.”
“이 작가님 작업실에서 같이 작업하면 안 되나? 우리까지 있어서 불편할 거 같은데.”
“애가 자기 돌보는 사람도 없이 글 쓰는 거에만 매진하는 거 쉽지 않아.”
지호는 저보다 키가 큰 아들이 생겼다는 게 아직은 어색해 계속 영미를 보며 이야기했다.
“진경씨. 그런 상황에도 씩씩하게 사는 거 보니까 너무 예쁘다. 어린데 어쩜 저렇게 이것저것 뚝딱뚝딱 잘해? 정원도 예쁘게 잘 가꾸고.”
영미는 지호의 기분을 맞춰주려 답지 않게 진경을 칭찬했다. 자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 어린 여자애만 싸고 드는 게 가끔 서운하기도 했다. 저렇게 정색해서 말할 거까지야. 신혼여행에서 너무 좋았잖아 우리. 들떠서는 허니문 베이비 만들자고 농을 던지고 피임도 안 해놓고는.
“강진이가 워낙에 나무하고 꽃을 좋아하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부모님하고 이것저것 만들면서 놀아서 손재주가 좋아. 어머니가 동화 작가고 아버지가 정치 칼럼니스트셨어. 정치인들이 강진이 아버지한테 줄 대려고 별의별 짓을 다 했다고 하더라고. 나는 강진이 아버지하고 5년 전에 에세이 출간 때문에 만났다가, 형님 동생하는 사이가 됐지.”
지호는 죽은 강진의 부모가 생각나서 그런지 조용히 수저를 놓고 서재로 들어갔다.
“이수야. 혹시 여기 많이 불편하면.”
처음이었다. 영미가 이수에게 원하면 다른 곳에서 살아도 된다고 하는 건. 이수는 영미가 지호를 정말 마지막 남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할아버지가 인사도 안 하고 갔다고 뭐라고 하시던데. 전화는 드렸어요?”
“망할 노인네. 전화하면 전화한다고 뭐라고 하고 전화 안 하면 안 한다고 뭐라 하고. 내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 갈수록 괴팍해지시는 거 같아.”
“외로워서 그러시죠 뭐. ...아저씨만 괜찮으시면 저는 당분간 여기서 지내고 싶은데. 요양원하고도 가깝고.”
“응.”
이수는 점퍼를 입고 마당에 나와 진경이 어디 있나 살폈다. 진경은 수도 동파 방지 스티로폼을 꼼꼼하게 수도에 감싸고 일어나 허리를 펴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툭툭.
진경이 고개를 돌리자 이수의 손가락이 볼을 파고들었다.
“헐. 이런 장난 초 3때 이후로 처음이야.”
진경은 웃으며 이수의 손가락을 깨무는 시늉을 했다.
“이러니까 꼭 연애하는 것 같다.”
이수는 멀찍이 있는 구진봉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날 좋아한다고 고백해 진경아.’
이수는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에게 좋다고 고백해 온 여자애들 가운데 호기심에 두 명과 사귀었었다. 그러나 그 여자애들은 데이트 몇 번에 따분해졌고 얼마 못 가 흐지부지 헤어졌다.
“연애? 내가 너한테 여자 친구가 된다는 뭐 그런 거?”
되묻는 진경을 향해 이수는 돌아보며 얼버무렸다.
“...여자인 친구? 최소한 친구인 건 맞잖아. 우리.”
“나는 네가 나하고 사귀고 싶다고 그런 줄 알았어.”
“그게 더 정확히 맞아. 우리 사귀자.”
이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귀까지 빨개졌다. 처음이다. 고백이란 거. 토론대회나 영어 발표에서도 쫄린 적이 없었는데 이 작은 계집애 앞에서는 주춤대고 버벅대고 긴장됐다.
진경은 스티로품을 자르던 가위를 들어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말했다.
“만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사귀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너 되게 가벼운 거 같아. 난 사랑에 꽤 진지한 편이라.”
이수는 영미에게 ‘엄마는 사랑이 쉬워?’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역시 말이라는 건 돌아온다.
“나 사랑해?”
진경의 뒤에 있는 동백나무 빨간 꽃봉오리가 예뻤고 한쪽에 쓸어 모아 놓은 눈덩이들이 햇빛에 녹아가며 반짝거렸다. 푸르른 하늘을 배경 삼아 그 위에 뜬 은하수 같은 진경의 눈을 보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사랑해.”
네 손을 잡고 싶었다고. 네 입술에 입 맞추고 싶었다고. 너와의 낮과 밤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이수는 이어 말하고 싶은 걸 억누르며 긴 속눈썹을 여리게 떨었다.
스무 살이 되면, 대학 갈 즈음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막연하게 상상하곤 했었다. 이수는 오늘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다만, 새 아빠의 집 정원이라는 게 별로였지만.
“...”
진경은 허공에 가위질할 뿐 답이 없다가 이수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난, 출판사 문연(文緣)의 지원을 외면할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아. 우리가 헤어진다면 너는 여자 친구만 잃게 되겠지만 난, 소중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잃을지도 몰라.”
“...”
“나도 네가 싫은 건 아니지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어. 이런 감정을 연민이나 가끔은 성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 같거든. 2차 성징도 끝났고 고등학교도 졸업 했으니, 연애를 안 하면 뭔가 부족한 인간 같아 보일 수 있는 것에 네가 신경 쓰는 거일 수도 있고. 우리가 연애하면 네가 말한 통속이잖아. 대표 아들과 회사 직원의 그렇고 그런 관계. 일일드라마나 주말 연속극에 자주 등장하는. 나중에 나... 영미 아줌마한테 싸대기 맞는 거 아냐?”
“응? 연민? 성욕? 싸대기?”
진경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수에게 가위와 목장갑을 쥐여주며 말했다.
“어차피 집으로 들어갈 거니까 다용도실에 이것 좀 갖다줄래? 난 별채에 가서 한 기사님 식사 챙겨드려야 해서. 경희 이모가 별채 살림은 안 하시거든. 돈이 안 되면 의욕이 안 생기신 대. 아저씨한테 의욕을 잃은 지도 꽤 되셨다나 봐. 그리고 나 오늘부터 별채에서 잘 거야. 작업할 때나 이층에 갈 거야.”
“...어. 왜?”
“이제 아침에 찾아가는 일은 없을 거야. 사모님도 오셨는데 그건 아니잖아.”
이수는 이런 상황에서 진경이 영미를 ‘사모님’이라고 부르자 진경과 저 사이에 계급 차이가 생긴 듯 껄끄러웠다.
“나. 차인 거지?”
이수는 진경의 눈동자가 향한 별채를 같이 보며 말했다.
“차이다 보다는 ‘관계를 보류하다.’. 아니면 ‘여전하다.’라고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이수는 진경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럼 ‘여전하다.’로 선택할게.”
“좋아. 이 집이 불편해도 머물러야 하는 동지로. 친구로.”
진경은 계약이라고 맺듯 손을 내밀었다. 이수는 제 손안에 가득 잡힌 진경의 손을 꼭 붙잡았다.
“내가 불쌍했어? 연민이라고.”
“나를 혼자 세상에 남겨두고 멋대로 세상을 등져버린 부모님을 가진 나나, 젊은 새 아빠를 받아들여야 하는 너나. 연민이라는 말이 거슬렸다면 미안해.”
진경에게는 자신에 대해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아 오히려 편했다.
“...연락처 가르쳐 줄래?”
“나는 네 번호 알아. 경희 이모한테 물어봤었어. 문자 보낼게.”
“어. 쉬는 날은 언제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쉴 수 있는 일이라.”
진경은 제 입술을 자잘하게 깨물었다.
“그렇구나.”
“...”
“내일은 뭐 해?”
“내일은 학원 가는 거 말고는 별거 없어.”
이수는 진경에게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화 좋아해?”
이수는 지금 개봉한 영화가 어떤 게 있었지? 하고 생각하며 물었다. 이십 대가 되자마자 여자에게 진지하지 않은 ‘사랑해.’를 내뱉은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슴에 불덩이가 차올라 뱉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아 처음 말해 본 ‘사랑해.’였다.
진경에게 느낀 마음의 확신은 시간의 양에 비례하지 않았고 욕정조차도 누를 기다림, 이 아이를 책임져야겠다는 단호한 마음의 불씨였다. 데이트하면서 이수가 어떤 사람인지 진경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매너 있고 괜찮은 남자.
“영화보다는 영화관 분위기를 더 좋아해. 무섭지 않은 어두움이랄까. 고독하지 않은 광장 같기도 하고.”
진경은 일정이 빠듯한 사람처럼 별채를 자주 쳐다봤다.
“나도 그래. 우리 내일 영화 볼까?”
“...”
“액션 좋아해? 동호회 형들이 나홍진 감독의 ‘황해’ 재미있다고 하던데.”
“좋아. 학원이 5시에 마치니까 바로 영화관으로 갈게. 괜찮아?”
“나도 그 시간 괜찮아.”
이수는 입꼬리를 실룩대며 집으로 돌아가려다 다시 진경에게로 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커트 머리 춥겠다.”
“겨울 되고 조금 후회했어. 이제부터는 기르려고.”
“긴 머리도 잘 어울릴 거 같아.”
“여름에는 묶는 게 편하니까. 나. 가볼게. 아저씨 식사 차려드리고 아줌마한테 용돈 받고 있거든.”
“어.”
이수는 별채로 뛰어가는 진경을 바라봤다. 역광 속에서도 진경을 놓이지 않으려 끝까지 봤지만, 그 뒷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건 15년 뒤였다.
재건축 빌라는 구축 아파트가 되었고, 아파트 근처 초등학교는 올해 입학생이 한 반을 겨우 만들 수 있는 정도라고 했다. 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문구점 앞, 긴 머리를 묶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