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앞으로 만나고 싶은 여자

by 은송하

[...이수야. 나.]


이수는 아찔했다. 영미가 지호와 헤어지고 싶다고 말하려는 건지 하고 말이다. 그렇다면 진경이와 이제 안녕인 건가? 5일간의 시간이 꿈처럼 생생하게 머릿속을 휘저었다. 아침 햇살 요정과의 은밀한 시간이 멀어져 가는 것 같았다.


“엄마, 설마 아저씨하고 헤어지려는 거세요? 무슨 일이에요? 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이제 일주일? 엄마. 엄마는 진짜... 왜 이렇게 쉬워요?”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쉽다니? 너 엄마를 그렇게 생각했었니?]


“네.”


[...맞아. 엄마 왜 이렇게 쉽지? 왜 이렇게 신중하지 못한 건지.]


“...”


이수는 한쪽에서 이수를 유심히 보는 동호회 형들이 신경 쓰여 담벼락에 바짝 붙어 통화를 이었다.


[지호씨 나이가 말이야.]


“아저씨 나이가 왜요? 50살이라면서요. 궁합도 안 보는 4살 차이라 찰떡궁합이라고 좋아하더니.”


[방금 여권을 봤는데 아니었어. 나이를 속였더라고. 40살. 아래로 여섯 살이었어.

]

“네?”


이수는 두 번 보았던 지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금테 안경에 광대뼈가 두드러졌고 턱이 갸름한 그는 출판사 사장답게 이지적이고 매너가 몸에 밴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영미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연하라고는 절대 짐작할 수 없는 외모였다. 이제 사십에 들어서다니. 사십에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히는 출판사를 일궈내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 한 모양이었다.


“진짜요?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


[이럴 줄 알았어. 너무 너무 동안이다 했어.]


“네?”


[이수야. 죄짓는 거 같아서 헤어져야 할 거 같아. 어쩌지?]


“연하면 좋지 않아요? 엄마가 언제까지 간호사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아저씨 재산이 있으니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왜? 엄마는 이 일이 너무 좋은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거야. 아저씨도 나 일하는 모습 멋지다고 했고.]


영미는 중형 사이즈의 내과 병원에서 건강검진센터 수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채혈을 무서워하는 지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것이 인연이 된 거였다.


“아저씨는 옆에 안 계세요?”


[네 선물 사고 싶으시다고 나가셨어. 다정하기도 하지?]


이수는 영미가 전화한 의중이 헤어지는 걸 말려달라는 건지 단호하게 헤어지라고 조언해 달라는 건지 헷갈렸다. 어린 새 아빠라도 받아줄 수 있냐는 건지.


“엄마. 서로 사랑하는데 나이가 무슨 문제겠어요? 다음부터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얘기하시고 용서하세요. 어리다고 하면 엄마가 안 만나 줄까 봐 그러셨나 봐요. ...내일 봐요.”


[그래 이수야. 역시 나보다는 네가 더 현명해. 사랑하는데 나이가 무슨 문제겠어. 내일 아침에 만나.]


의외로 대화가 싱거웠다.


“그리고. 진.”


뚜뚜뚜.


전화가 끊겼다. 영미는 자기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전화를 끊었다. 진경의 전화번호를 아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를 기다리고 있는 형들에게로 갔다.


여기서 이수는 막내였다. 회장 병철은 그중 최고령 노총각이었다. 첫사랑을 잊지 못해 여태 솔로인 병철과 혼전 임신에 두 번의 결혼, 그 사이 여러 번의 연애가 껴있는 엄마라니. 극과 극 사이에서 인생은 참 다양하다고 느꼈다.


이수는 2년 전, 대학에서 주관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가했었다. 그때 멘토가 의예과에 다니고 있던 태선이었다. 태선이 데리고 간 병철의 카페 ‘스누피’에 걸려 있던 사진을 보고 이수는 뭔가 모를 이끌림을 느껴 동호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실내 동물원 작은 우리에서 계속 제자리만 맴도는 백호의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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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가 합류한 남정네 다섯 명이 횡대로 한 줄을 지어 경복궁을 나서자 한 해를 솔로로 마무리하는 그들을 위해 사람들은 홍해 갈라지듯 길을 비켰다.


대학교 앞 건물들 사이 골목 안쪽에 자리한 카페 ‘스누피’는 따뜻한 원목 수납장들이 창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위에는 병철이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스누피 피규어들이 가득했다.


카페 입구에 CLOSE 표시를 확실히 해두고 자리를 잡은 동호회 사람들은 이제 성인이 된 이수의 음주를 위해 집에서 아끼던 담금주부터 위스키까지 가지고 들고 왔다. 태선은 고가의 칠레산 와인을 개봉하며 거들먹거렸다. 병철은 이수가 좋아하는 토마토 달걀국을 끓이고 고추기름에 오징어를 달달 볶아 왔다.


이수는 형들이 주는 주종들을 하나씩 맛보고 안주들을 먹었다. 가끔 엄마가 주는 반주를 한 잔씩 받아먹어서 그런지 잘 취하지 않았다. 오늘 출사에서 빛의 노출이 얼마가 적당했으며 포인트 스페이스가 어디인지를 나누면서 형들의 촬영 허세를 재밌게 들었다.


“그런데 이수야. 아까 그 여자애 진짜 누구야? 진짜 친척? 네가 설명이 없으니까 내가 욱해서 말하게 되잖아.”


태선은 짧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형답지 않게 생각 없이 말해버린 게 미안했다. 본능적으로 이수를 경쟁 상대라고 느끼는 걸까. 유독 말이 까칠하게 나가게 된다. 쌍거풀이 짙고 잘생긴 외모지만 그에 비해 웃는 모습이 바탕을 따라가지 못했다.


“엄마가 재혼하셨는데, 그 집에서 잠깐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친구예요. 일 때문에.”


태선은 이제야 만족한 듯 술 한 잔을 들이켜고 이수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이 새끼 진짜. 우리가 알고 지낸 지가 이제 3년이야. 형 좀 이제 편하게 대해주라. 응? ...걔는 나이가 어떻게 돼?”


“...저하고 동갑.”


“그래? 나 소개 시켜 주라.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아담하고 뭔가 신비롭고.”


“...”


“왜? 띠꺼워?”


태선은 속으로 했던 다짐은 잊고 또 언성이 높아졌다. 그래. 권이수란 놈은 언제나 침묵으로 날 묵살하고 무시하는 놈이었어. 내가 성질을 부리면 형들은 또 저 녀석 편을 들겠지.


“그만해. 이수 이제 스무 살 된다고 모였는데.”


“당장 사귄다는 것도 아닌데 이 새끼 표정이.”


“태선아. 그만.”


병철이 목소리를 깔고 단호히 말하자 태선은 앞에 놓인 술을 재차 들이켜며 말을 말았다. 친아버지보다 더 좋아하고 따르는 병철이었다.


눈은 그칠 줄 몰랐고 내년에는 다들 연말에 여자하고 있길 바란다며, 그 얘기를 몇 년째 하는 거냐며 새벽까지 얘기하다가 2층에 있는 병철의 집 곳곳에서 다들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거실 바닥에 누워있던 이수는 조심스럽게 제 배에 올려진 병철의 다리를 치웠다. 일어나 마른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계속 있었다가는 아침 해장국부터 시작해 병철의 집에 마련된 PC 방에서 게임하고 밤에는 또 술을 마시면서 새해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집 앞에서 이수는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점심 때쯤 도착하시니까 씻고 눈 좀 붙일 시간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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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진경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극세사 수면 바지를 어그 부츠에 쑤셔 넣고 목장갑을 끼고서 밤새 내린 눈을 치우고 있었다.


“마당 치우는 거야? 경희 아주머니하고 한 기사님은 안 계셔?”


이수가 진경이 든 야광색 마당 빗자루를 뺏어 들려고 하자 진경은 빗자루를 뒤로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내 일이야.”


솜털이 송송한 하얀 볼은 붉게 물들어 있고 립밤 같은 건 바르지도 않은 것 같은데 입술은 촉촉하게 윤이 났다. 형들이 말했던 앞으로 만나고 싶은 여자들 목록에 진경이 단연코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


“이건 내 일이야. 너 술 냄새 장난 아니야. 어서 들어가서 씻어야겠다. 아줌마가 걱정하시겠어.”


“응.”


이수는 씻고 침대에 누웠다. 진경은 자신에게 술 냄새가 난다고 하였지만 코끝에서는 진경에게서 늘 나던 머스크향이 맴돌았다. 진경의 귓가에서 향기를 맡는다면. 간질거리는 숨을 따라가느라 잠이 오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영미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경희와 인사했다.


“이모님. 온천에 들어갔다가 오니까 피부가 있잖아. 완전 보들보들한 게 장난 아니야. 나 아기 피부 됐잖아. 만져봐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진짜 부드럽네요. 저도 작년에 아들하고 가족 여행으로 갔었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진짜요? 우리 여름에 다 같이 가요.”


“비용은 사모님이 내시는 거죠?”


“뭐 까짓것. 휴가비 퉁친다 생각하고 해외 가요 다 같이.”


“그래도 휴가비는 따로 주셔야죠.”


영미는 거실에 짐을 옮겨 놓으며 한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이수는 갈색 니트에 베이지색 바지를 차려입고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차려입은 건 영미에게 이 집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시키고 싶어서였다. 다시는 할아버지를 지방 요양원으로 보낸다느니, 헤어질까? 고민이라느니 라는 변덕진 말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영미는 아이보리 색 버킷햇을 벗고 이수를 향해 돌아보았다. 이수와 똑 닮은 진갈색 홍채가 이수를 사랑스럽게 바라봤다.


“아들! 잘 지냈어?”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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