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서방님

파혼한 여인. 정혼한 여인. 좋아하는 여인.

by 은송하

“어... 어. 강단아.”


유진이 끌려오며 지우의 귓가에 속닥였다.


“정말로 날 팔았다가는 내 죽어서도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농으로 한 말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계셨습니까?”


“그때의 네 눈빛은 날 정말 유곽에라도 팔아 기방 도령으로 앉히고도 남을 기세였다.”


“북촌의 아씨들 사이에서 난리가 날 텐데.”


“너 정녕.”


이때 익숙한 향기가 유진의 코에 스쳤다.


‘이것은.’


유진이 걸음을 멈추자 지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갈 길을 가자.”


“네.”


부윤댁에 이르러 지우는 하영의 몸종인 우덕이를 찾았다. 우덕은 하영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은 못난이 계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아비까지 집에 들이니 탐탁지 않아 둘을 꼬아보았다.


“하영 아씨는 어떠십니까?”


“좀 전에 궁에서 보내주신 약을 드시고 조금 나아지셨다. 독경사를 부르시고 저리 좋아하시다니. 오랜만에 웃는 얼굴을 뵈었다.”


“제 아비라 그런 것이 아니라 독경사들 중 목소리가 평안하고 끊김이 없어 찾는 분들이 꽤 되십니다.”


“너희 부녀는 의가 참 좋은 모양이구나? 손을 꼭 잡고 다니니 말이다.”


“나서부터가 아니라 몇 해 전 병으로 안력(眼力)을 잃으시어 아직 길을 걷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으십니다.”


지우는 우덕이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줄을 알고 봇짐에서 연지 하나를 꺼내었다.


“제가 효원각 객주 설향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뭐라? 설향? 월도각 세 기녀에 당할 자가 없지만, 효원각 설향의 검무와 앵두 같은 입술이라면 그에 맞먹는다 들었는데.”


“맞습니다. 그것이 이것입니다. 단오에 다홍 홑치마를 두르시고 이것을 바른 뒤 그네를 뛰시면 끝~!”


우덕은 지우가 건네는 연지를 퍼뜩 소매에 집어넣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어서 가자. 아씨가 기다리신다. 마나님이 만드신 더덕 정과를 내가 마.”


“감사합니다. 저기... 언니라고 불러도 되지요?”


“암만. 불러도 되지.”


“언니. 고맙소.”


유진은 지우가 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손을 휘저으며 불렀다.


“강단아~”


“네. 아부지. 저 여기 있소.”


지우는 유진의 손을 잡고 우덕의 뒤를 따랐다.


“아씨~. 강단이가 독경사를 모시고 왔습니다.”


안에서 답이 들려왔다. 몇 번이고 연습한 듯 기쁨이 묻어나면서도 분명한 어조였다.


“어서 모시거라.”


이제껏 지우의 손을 잡았던 유진은 지우의 팔에 손을 얹었다.


“아부지~. 한 걸음 올리시고 신발을 벗으시어요.”


“그래.”


한껏 목소리를 긁어 유진이 답했다. 발이 쳐진 활짝 열린 문 앞에 유진이 편하게 앉았다. 진은 눈을 꾹 감았음에도 하영이 저를 빤히 보는 것은 다 느껴졌다.


지우는 유진과 하영 사이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더덕 정과 몇 개를 챙긴 뒤에 말했다.


“아부지. 저는 우덕이 언니 따라 부윤댁을 구경하겠습니다.”


지우와 우덕의 발걸음이 담을 넘은 것이 확실해지자 유진은 잔뜩 말은 어깨를 펴고 천을 걷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을 흘깃흘깃 보던 하영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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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하영의 안색을 살폈다. 나비 날개 같이 휘어진 눈썹에 볼에 솜털이 보송하니 아프지 않았다면 복스럽게 생겨 어느 집안에서든 탐을 냈을 것이다.


얼굴을 붉히는 하영을 보며 유진은 무안해 눈을 피하며 말했다.


“혼례 전에 이렇게 찾아와 무례히 행하는 것을 용서해 주오.”


“아닙니다. 제가 아파서 걱정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제가 오히려 죄송하지요. 안으로 앉으셔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최근에 다시 몸이 안 좋아졌다 들었습니다.”


“아팠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숙원 마마의 치성환을 먹어서 가뿐해졌습니다. 다행히 외가 쪽이 장 숙원 마마와 친밀하게 지내십니다. 강단이 말대로 하지 않아 병이 났지 뭡니까.”


하영은 멋쩍게 웃더니 삼상의 한 가문인 유진의 가문에 걸맞게 장 숙원과도 연이 있음을 보였다.


“누가 그 치성환을 갖다 주었습니까?”


“숙원 마마를 모시는 젊은 궁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어찌나 살갑게 말을 붙이고 서방님에 대해. 에구머니나! 죄송합니다.”


하영은 밤이나 낮이나 수백 번 불러보았던 서방님을 저도 모르게 뱉고는 유진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습니다.”


“도련님. ‘서방님’은 첫날밤 치를 때 다시 불러드리겠습니다.”


상것들과 밤을 여러 번 치른 적이 있다는 우덕이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남정네들은 ‘서방님’이라는 말과 ‘오라버니’라는 말을 좋아한다고 말이다. 조만간 초야를 치르는 법도 가르쳐주어 서방에게 사랑을 듬뿍 받게 하겠다고 장담을 하였다.


대신에 혼례를 치르고 좌승지 댁에 갈 때 저도 데려가 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오늘 밤은 이 집에 머물고 싶은데 그리해도 되겠소?”


“네. 부모님과 아랫것들에게 일러두었습니다. 독경사의 집이 멀어 며칠 저희 집에 머물 수도 있다고요.”


“감사합니다.”


“저에게 궁금한 것은 없으시온지요?”


“...”


하영은 유진의 생각 많은 표정을 살폈다.


“제가 아픈 건 우연일 것입니다. 평양에서 한양으로 오면서 몸살이 나 아팠을 것입니다. 물갈이를 하고요. 도련님과 혼례를 치른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집을 돌아보아도 별거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한양에 곧 적응하겠지요.”


“독경사로 왔으니 불경을 읊고 아가씨의 저녁이 어떻게 나오는지 본 후에 마련해 주신 거처로 가겠습니다. 밤에 집안을 둘러보고 별거 없으면 내일 날이 새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네. 아니. 그게. 그리 일찍이요?”


하영은 유진이 이대로 쭉 있다가 혼례를 치르고 함께 유진의 집으로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혼례까지 며칠 남지 않았으니.


“이제 혼례가 이레밖에 남지 않았고 저도 건강해질 터이니 걱정하지 마셔요. 장 숙원 마마께서 제 사주에 아들 둘에 딸 셋이 있을 거라 하셨습니다.”


하영이 얼굴이 벌게서 하는 말에 유진은 옅게 웃어 보이며 하영의 마음을 다독였다.


‘숙원 마마라. 숙원 마마는 내가 혼례를 치르려는 여인마다 가까이 지내시는구나.’


시장 길바닥에서 맡았던 익숙한 향기는 장 숙원이 악귀를 쫓는 용도로 대비와 공주에게 특별히 공을 들여 만들어 준 향낭이었다. 아픈 이가 흘리는 식은땀 냄새가 섞여 있기에 지나간 여인은 공주가 분명했다.


유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을 읊기 시작했다.


집안을 한 바퀴 돌고 와서 디딤돌에 앉아있던 지우는 유진의 목소리를 따라 웅얼거리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지난밤 부족했던 잠이 몰려와 결국 나무 기둥에 기대어 잠을 청하였다.


꿈속에서 지우는 청사초롱을 들고 유진의 앞을 종종 걸었다. 유진은 신랑의 예복을 입고 하영의 집 마당으로 들어서서 후덕해 보이는 하영의 어머니에게 나무 기러기를 건넸다.


마님은 기러기를 초례상에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지는 해의 붉은 노을이 하영의 붉은 활옷에서 더욱 불탔다. 상견례가 끝나자 신랑 유진은 차선을 내리고, 신부 하영은 한삼을 내려 서로를 뜨겁게 바라봤다.


혼례를 뒤로하고 나온 지우는 끝명이를 데리고 배를 탔다. 아비도 오라비도 빚쟁이도 없는 곳을 향해 갔다. 물줄기를 따라 천천히 내려가던 배 위에서 강물에 두둥실 뜬 보름달을 바라보는데 끝명이가 말했다.


“도련님. 저를 절름발이로 만든 게 누구여요? 어르신은 아셨지요? 세자께서 그 밤에 집에서 돌아가실 것을 말이에요”


한이 서린 말을 뱉고 끝명이는 지우를 깊은 강물에 빠뜨렸다.


풍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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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평안해지기로 작정하였다. 꼬르륵 가라앉으며 이제야 정말 모든 것에서 벗어났구나 싶었는데 눈을 떠졌다.


젠장.


물속이 아니라 어느 허름한 헛간이었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턱 아래에 길게 찢긴 흉터가 있는 그 녀석이었다.


성우에게 청나라 가짜 돈을 사라며 돈을 빌려준 작자, 매달 소란당 야설에 암호를 심겨두어 돈을 어디에 돈을 갖다 놓아야 할지 명시한 자.


시간을 조금이라도 어길 시에는 이자가 두 배로 뛰었다. 그 녀석 때문에 소란당 야설 최고 구독자로 오해 아닌 오해를 받아야 했었다. 비열하게 생겨 먹은 얼굴에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지우의 목에 짧은 칼을 대며 말했다.


“어디서 편하게 죽으려고? 돈을 못 갚으면 너희 집 계집종을 기루의 부엌데기로 팔고 너는 청나라에 가 평생 노역을 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녀석의 어깨너머로 아비인 백단은 방귀를 뀌며 책을 읽고 있다가 코를 파 코딱지를 헛간 벽에 튕기고 있었고 성우은 월도각 춘영의 치맛자락을 둘러쓰고는 희희낙락대고 있었다.


지우는 꿈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우의 침묵에 그 녀석이 화가 났는지 칼을 휘둘렀다.


하. 하... 하.


지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뜨자 옆에서 눈물이 잔뜩 고인 도현이 미소 짓고 있었다.


“도련님. 무슨 일 있으세요? 괜찮으십니까?”


말을 마친 도현이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의 지푸라기들이 도현의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도현이 지우 대신에 칼을 맞았다. 그 녀석의 칼에서 진득한 피가 칼날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도현아. 도현아...”


앗!


누군가 제 이마에 꿀밤을 먹여 지우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떴다.


“강단이 너. 역시나 도현이라는 그 소 객주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거구나?”


유진은 허공에 손을 뻗으며 도현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지우가 고까워 이마를 때리고 말았다.


“마음에 품다니요? 꿈에서 저를 구해 주어 그런 것입니다.”


그때 방 안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하영이 문을 열었다. 유진은 즉시 눈을 감고 갓에 달린 검은 천을 내리며 지우의 손을 잡았다. 하영은 방문 틈으로 유진이 지우의 손을 잡은 것을 얼핏 보았다.


하영의 옆에 있던 우덕이 하영의 저녁상을 물리며 유진과 지우에게 말했다.


“아씨가 강단이 너는 오늘 밤 나와 자라고 하셨다. 네 아비에게는 깨끗한 방을 내어주라고 하셨고. 네 아비의 독경이 마음에 드셨단다. 저녁 밥상은 네 아비의 방으로 들여 보내주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우는 하영이 들을 수 있게 크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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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에서 밥상을 받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닭 한 마리 고운 거며 육전에 취나물, 봄동 겉절이에 쌀밥이 고봉으로 올려져 있었다. 게다가 이불을 보니 새것과 진배없었다.


“영감님이 정말 좋으신가 봅니다. 색시에게 사랑받는 기분이 어떠셔요?”


지우는 군침을 흘리며 재잘거렸고, 유진은 밥상을 지그시 둘러보았다.


지우가 닭 다리를 하나 뜯어 유진에게 내밀었다. 유진에게 닭 다리 하나를 권했으니 자신이 남은 닭 다리 하나를 먹어도 봐 줄 거라 여겼다.


월, 수, 금,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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