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이는 나의 그림자에게

경수필

by 회색도서관

“너 만만해 보여.”


언젠가부터 친구들이 나에게 가볍게 말을 던졌다. 웃으면서 농담처럼 건넨 말들이었지만, 그 말들이 내 안에 남긴 파장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그 말속엔 내가 늘 미소 짓고, 다정하게 굴고, 상처받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내 모습이 담겨 있었나 보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보였던 건, 실제로 내가 그렇게 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 스스로도 나를 만만하게 여겼던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내 안의 상처들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아마 그래서, 나는 상처를 더 쉽게 받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그만 말에도 마음이 쿡쿡 찔리고, 누군가의 표정 하나, 말 하나에 긴 하루가 무너졌다. 그럼에도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밝은 척.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혹은 누군가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나의 진짜 얼굴은 감춰두고 포장된 가짜만을 꺼내 들었다.

내 안에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던 우울은 그렇게 꾹꾹 눌린 채 고여 있었다.

무력감, 자기 비난, 그리고 다시 우울. 감정의 반복은 점점 나를 지치게 했다. 감정을 숨기고 애써 눌러 담을수록, 나는 더 흔들렸고, 나는 점점 나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이중적인 삶 속에서도, 나는 학교에서는 웃었다. 누구보다 환하게, 누구보다 친절하게 웃었다. 마치 우울함을 속삭이는 나의 그림자를 떼어내어 나를 따라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하지만 기숙사로 돌아오면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룸메이트들에게, 나는 매일같이 감정을 쏟아냈다. “나 너무 힘들어.”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어.” 그렇게 털어놓을수록 나는 점점 더 초라해졌고, 내 안에서 넘쳐버린 감정들이 방향 없이 흘러 친구들의 마음에 닿을 때마다, 그 무게를 함께 짊어지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함이 점점 쌓여갔다. 내 감정이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는 순간, 나는 더 무너졌다.


그러다 문득, 나는 ‘감정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감정을 어디든 쏟아내고 싶어서였지만, 점점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 주었다.

“왜 이렇게 힘들다고 느꼈지?” “내가 지금 진짜 느끼는 감정은 뭘까?” 그렇게 글을 쓰며 멀어졌던 나와 대화했다. 놀랍게도 감정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감정에 끌려다니기만 했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왜 우울한지, 무엇이 나를 무너지게 하는지, 나 자신에게 차근히 묻고, 답을 찾기 시작하면서부터 감정이 나를 삼키는 일은 줄어들었다.


여전히 나는 쉽게 상처받고, 가끔은 이유 없이 슬퍼진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나의 약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감정을 솔직히 바라보고 인정하면서,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기숙사 친구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나아졌다. 더 이상 하소연만 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균형이 생겼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닌, 관계 속에서 감정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도 배워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예전엔 이유 없는 우울을 부끄러워했다. 밝은 척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멀리할까 봐, 억지웃음으로 감정을 덮는 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감정을 숨기다 보니, 나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할 용기도 잃어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감정 또한 분명히 내 일부이고, 기쁠 때만이 아니라 무너질 때도 여전히 내가 나인 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감정을 무작정 숨기지 않아도 괜찮다고, 밝은 척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용히 앉아 있는 나도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준다. 그것이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이고, 그렇게 나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진짜 성장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