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의 방긋한 미소
교육계의 이월은 바쁘다.
학년을 마무리하며 못다 한 일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계획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승진과 함께 직장을 옮기기도 하는 이월에 퇴직한 나도 여전히 바쁘다. 아직 몇 년의 정년을 앞두고 있던 후배가 미리 명예퇴직을 선택했기에 축하하기 위해 만나는 날이라서다. 축하 자리에서 연신 방실거리는 후배의 미소가 아름답다. 함께 한 또 다른 후배의 미소가 보이지 않는것은. 아마도 먼저 가는 선배를 생각하며 이후에 짊어질 사명감에 미리 마음 아픈가 보다. 퇴직 후 그녀의 삶을 응원하기 위한 식사 시간은 금방 흐른다.
몇 년 전, 나의 정년퇴직을 생각하며 우리가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그려본다. 우리 셋이는 함께 서울대학교에서 한 달간 합숙을 하며 연수를 받았다. 기숙사에서 우리 둘이는 같은 방을 사용했다. 언니인 내게 많은 것을 양보했고 나는 스스럼없이 언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였다. 가장 감사했던 것은 꽉 찬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면 몹시 힘들었는데 ㅐ가 먼저 입욕할 수 있도옥 도왔다. 지친 몸을 씻고 싶을 텐데 삼사십여분을 기다려주는게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만큼 양보하고 다정했던 그녀는 사랑으로 우리 관계를 승화한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 그녀의 사명감으로 뭉친 책임감, 대전 유아교육의 기틀을 단단히 잡아온 그동안의 사연들이 겹치 지나며 그려진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늘 본인보다 교육 발전에 기여하는 생활을 오랫동안 했다. 아직도 교육계에 더 필요한 인재인데 명예퇴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토록 유아교육을 위해 노력해 온 것을 잘 알기에 아쉽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이다.
또 달ㄴ 후배는 연신 아쉬움을 토로하는데 명예퇴직하는 후배는 퇴직 후 직장 생활보다 좀 더 여유로운 노후를 계획했다고 즐겁게 말한다. 이제는 본인보다, 교육보다, 가족을 위한 시간을 더 갖고 싶단다. 이제 막 태어난 손자 손녀와 함께 먼저 퇴직한 남편과도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단다. 노후 준비를 더 중요시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미리미리 준비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싶단다.
아, 멋진 그녀, 명예퇴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정년까지 가지 않고 좀 더 젊을 때 퇴직하여 퇴직 후 시간을 역량 것 즐길 후배가 멋지단 생각이 든다. 그 어떤 말보다 '이제 모든 것 내려놓고 나답게 살아보려 해요.'라는 말이 당당하게 내 귀를 때린다. 도망가는것도 아닌, 스스로 포기하는 것도 아닌, 자기만의 삶의 박자를 스스로 선택했다 생각하니 점심 식사가 더 즐겁다. 그녀를 열렬히 응원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제 부럽기까지 했다. 우리의 점심 한 끼 사이에 후배는 이미 다음 계절로 건너가 웃고 있었다. 담담한 표정, 가벼워진 어깨, 대화중의 말 사이에 가느다란 여백이 안정감 있다. 아름다운 후배다. 오늘 우리는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을 뿐인데 우리의 마음에 우리들이 함께 했던 장면들이 오래 남는 날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왜 이리 허전할까?
내가 정년퇴직하던 그때, 사 년 전의 허전함을 오늘은 대충 넘기고 싶지 않다. 그때, 정년퇴직 후 허전함은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사라져서였다. 00님, 하루에도 몇 번씩 불러주던 직원들의 호명이 어느 날 갑자기 멈춰서 궁금하고 힘들었다. 삼 년 먼저 나온 후배는 선택해서 나왔고, 나는 다 해낸 사람의 정년퇴직의 자리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오는 허전함일까? 다시 생각해 본다.
끝까지 완주한 나의 허전함은 중도에 삶의 방향을 튼 후배와 약간의 결이 달라서 일 것이다. 글을 쓰며 더 깊고, 더 조용히 생각해 본다. 나의 정년은 사회가 정해준 끝이었지 내 마음이 준비한 끝은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 없이 퇴직했던 그때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허전함은 상실이 아니라 시차 차이다. 퇴직으로 몸은 이미 멈췄는데 마음은 오랫동안 출근 시간에 맞춰 있었다. 그동안은 누군가의 필요로 살았던 직장의 시간이 길었다. 퇴직 후에는 아무도 급히 부르지 않으니 가끔 쓸모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져 허전했던 것이다. 사라진 건 내가 아니라 나의 역할이었는데 지금도 가끔 이렇게 놀기만 해도 되는지 생각하는 내게 말한다. 이렇게 편안하고 즐거우니 아무 걱정말고 나만의 시간을 지내라고!
명예퇴직을 앞둔 그녀는 너무 행복하다. 그녀의 행복은 아주 자연스럽다. 직접 선택해서 뛰쳐 나온 그녀의 해방감의 계절, 봄이 다가 오고 있으니까! 명예 퇴직을 선택한 그녀는 이제, 아침에 알람을 듣지 않아도 되고, 유아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낮과 밤이 있고, 본인이 본인만의 시간을 써도 된다는 기쁨이 있다. 출근 시간, 급하게 이어지는 회의, 관리자의 책임감, 누군가에게 필요가 없어져 숨이 트이고 좋은 날들일 것이다. 이제 그녀만의 역할로 옮겨가기 위해 퇴직으로 직장을 멈췄으니 낮 시간에도 나와 함께 할 시간이 많아졌다. 하루에 해야 할 일이 줄어든 게 아니라 하루를 쓰는 단위가 커졌다. 바쁠 땐 못 보던 것들이 이제는 전부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00야! 명예 퇴직을 진심으로 축하해!
그녀가 느끼는 즐거운 리듬이 벌써 느껴진다.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빈칸이 많은 원고지 같다. 정년퇴직으로 일을 잃은 게 아니라 나를 다시 부를 이름을 찾고 있는 것이다. 앙드레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