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에게는 당연한데 나에게는 낯선 것들이 있다. 놀이공원에서 먹는 츄로스라든지 고속도로 휴게소의 알감자 같은 것들이다. 나는 그런 간식들을 사먹는 것에 늘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에버랜드에서 츄로스를 사먹었다. 여자친구가 먹고 싶어해서였다. 아니 그보다는, 여기 왔으니 먹어야지 하는 그런 당연함이 이유였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우리 가족은 에버랜드 와도 이런 간식은 그냥 지나쳤다고 했더니 여자친구가 깜짝 놀랐다. 어린 시절 우리집은, 어찌저찌 에버랜드에는 갔어도 츄로스는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부가적인 지출까지 하기에는 부모님의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고 본다.
그때의 엄마아빠와 또래가 된 나는 그 간식값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휴게소에 들르면 알감자든 핫바든 꼭 손에 하나씩 쥔다. 역시 몇 년 전 월미도에서 처음 먹어본 회오리 감자도 이제는 나에게도 당연한 것이 됐다. 이 간식들은 나에게 맛 이상의 가치가 된다. 추억이 되고 즐거움이 배가 된다. "그때 먹었던 닭꼬치 참 맛있었지. 거기 참 좋았지."하며 4,000원 남짓한 돈으로 시간마저 되살 수 있게 된다. "이걸 4천 원이나 주고 산다고?" 하던 내가 그 돈으로 이야깃거리를 아낌없이 사는 모습이다.
돈은 신발과 같다. 신고 다녀야 의미가 있다. 아까워서 모셔만 두면 즐거움을 못 느낀다. 대신에 그 신발을 신고 세상 곳곳을 다니면 이것저것 보고 즐길 수 있다. 깨끗한 새신발일 수록 더 그렇다. 남들에게 자랑까지 할 수 있으니 보관하는 것보다 더욱더 신고 다닐 맛이 난다. 나는 돈 덕분에 간식 사먹는 재미도 알게됐고 '어디 가서 뭐 사야지' 하는 기대하는 재미도 알게 됐다. 악착같이 모으던 때의 그 나름의 검소함도 나쁘지 않았지만 쓸 땐 쓰는 미덕이 생겼다. 만약, 나이키 농구화 전시해두듯 월급 받는 족족 아끼기만 한다면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질까? 흙 좀 묻더라도, 가끔씩 괜히 썼다 싶은 돈도 내 인생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주조된 자유'라고 했다. 내 마음에 돈을 쓸 여유가 없다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나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꼭 큰 돈을 쓸 필요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후회 없는 지출을 한다면 내 삶이 더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늘은 퇴근길에 잠시 딴길로 새서 인형뽑기나 조금 하다올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