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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May 13. 2022

엄마의 杞憂 - 杞人忧天

비상. 큰일이다.

아들 녀석이 중간고사를 기똥차게 잘 봐버렸다.

9일이 넘게 지속된 우리의 침묵은 결국 엄마인 나의 백기 투항으로 종료되었다.

수도꼭지 급으로 잘 운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에 먼저 말을 걸기까지 한참을 주저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고, 냉랭하던 아이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데 내 마음도 쿵, 하고 내려앉았다.

우리 모자는 눈물 콧물 질질 짜내며 결국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고 엄마는 앞으로 아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공간을 허용하고 존중하겠다고 했고 아들은 아무리 속상해도 입을 다무는 일은 이틀을 넘기지 않겠다는 타협을 끌어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이를 꼭 안아주며, 잘 자라고 있는 거라고, 너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 거지만 엄마도 사람인지라 서운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게 내 진심이니까. 그게 또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침묵의 시간을 좀 더 끌어보려 했지만 오늘 있을 체험학습이 내내 걸렸다.

좋은 마음으로 보내고 싶었다. 엄마가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김밥을 싸며 웃는 얼굴로 잘 놀고 오라는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제저녁 화해를 시도한 것이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한 남편과 셋이서 고스톱을 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지난 추석 때 시댁에서 고스톱을 배워온 아들이 아빠랑 맞고를 칠 때만 해도 저 무슨 해괴한 상황인가 했는데, 긴긴 겨울방학을 보내며 나 역시 어느새 아이와 마주 앉아 피박이네, 광박이네, 쌌네, 흔들었네 을 외치며 아주 푹, 빠졌었더랬다.

중딩 아들과 고스톱을 친다고 어디 대놓고 말하긴 껄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셋이 함께하는 취미가 처음 생긴 거라 내심 뿌듯했다. 정말이지 우리 집 남자들과 나는 취향이 겹치는 게 하나도 없어 내내 따로 행동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머리 맞대고 얘기하며 즐거워하는 취미가 생겨 좋았다.

그리고 고스톱은 이번에도 제 역할을 톡톡히 발휘했다. 화해 후 멋쩍었을 시간이 고스톱으로 인해 화기애애해졌으니 이 정도면 학교나 국가에서 장려해야 하는 취미생활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오늘의 나는 또 생각이 많아졌다.

에버랜드로 체험학습을 다녀온 아들은 다시 그 무리의 '혼성그룹'과 함께 에버랜드로 향했다. 다 저녁에 그곳에 가서 뭘 하려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우선 허락했다. 심지어 오늘부터 영어학원은 정상수업이 진행됨에도 난 아들의 부탁을, 아니 부탁보다는 더 강했으니, 아들의 통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시험을 잘 봤기 때문이다. 결국 녀석의 의도대로 진행되고 있는 거라고 보는 게 맞을 거다. 녀석은 나와 냉전을 벌이던 그 시기에 분명 속으로 올백을 맞아 엄마가 아무 소리 못하게 해야지.라고 다짐했었을 터다. 시험만 잘 보면 그간 자기 주도 학습이 아닌 엄마 주도 학습으로 공부한다고 타박하는 잔소리를 한 번에 반박할 수도 있고, 시험 기간 내내 카톡으로 여자 친구와 수다를 떨었던 자기 행동에 대한 정당성까지 주어질 수 있으니까.


물론 올백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 봤다. 기똥차게 잘 봤다. 심지어 수학은 어려웠다는데, 이 중학교가 시험을 어렵게 낸 학교가 아닌데 그 수학을 백 점을 맞았단다. 결국 엄마가 졌다. 틈틈이 카톡을 하면서도 공부를 잘했다니 뭐라 반박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 에버랜드2차도 안 보내줄 이유가 없었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열심히 놀 자격은 충분한 것 아닌가.


하지만 또 내 마음은 그게 아니다. 굳이 그곳을 다시? 이 시간에? 굳이? 라면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지만, 오후에 보내온 사진을 보고 단박에 이해했다. 학교에서 같이 다니라고 짜준 모듬은 전부 남자 친구들뿐이었다. 녀석은 그 '혼성그룹'과 함께 가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아니 우리 아들을 포함한 그 '혼성그룹'은 자신들 만의 시간이 필요했던 게 분명하다.


내 중3 때가 떠올렸다.

나도 그랬다. 나도 남자애들과 놀고 싶었다. 좋아하는 애도 있었다. 늘, 쭉, 계속.... 다만 나는 아들보다는 인기가 없어 늘 짝사랑을 하는 쪽이었고, 소풍 때 가서 쭈뼛거리며 친구를 통해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사진을 같이 찍자는 부탁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내 아들은 달랐다. 여자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고, 당당하게 놀러 다니고 있었다.

훗. 그래. 뭐 하루쯤 학원 좀 제끼면 어떠랴. 이 청춘에, 이 시기에만 누릴 수 있는 풋풋함인데. 나는 하고 싶어도 못 했던 일인데, 나는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던 관심인데, 나는 노력했어도 성취할 수 없었던 점수인데. 그래, 열심히 했으니 놀아도 된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정신 차리길. 핸드폰과 멀어질 수 있길. 적당히만 놀길.

속이 쥐 코딱지만 한 엄마는 아들이 없는 저녁에 이런 쓸데없는 걱정들만 늘어놓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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