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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dakmate Jan 01. 2023

나는 왜 육아가 힘들까?

나는 스카이캐슬에서 자랐다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기억하시는지? 스카이 캐슬은 대한민국 상위 0.1%가 모여 사는 스카이캐슬 안에서 자식을 천하제일 왕자와 공주로, 일류대에 보내기 위해 무엇이든 하는 사모님들의 처절한 욕망을 보여주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우정·의리가 아니야. 니들 위치야. 피라미드 어디에 있느냐라고! 밑바닥에 있으면 짓눌리는 거고, 정상에 있으면 누리는 거야.”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나타낸 예로, 극중 로스쿨 교수 차민혁의 대사이다.    

 

 나의 어린 시절도 스카이캐슬에 나오는 자녀들의 환경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지방 발령으로 산업단지의 사택에서 자랐다. 그곳은 회사 직원들만이 모여 사는 곳으로 서로의 집안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지냈다.

함께 모여 사는 커뮤니티라 겉으로는 화목한 듯 보였지만, 동료들끼리 승진을 위한 경쟁과 아내들의 물밑 내조 그리고 자녀들의 학업경쟁까지 더해 살벌하게 치열한 곳이었다. 오직 상위 0.1%만이 살아남아 기업의 임원진이 될 수 있기에 서로가 동료이자 적이었다.     

부모의 관심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첫아이인데다가 이런 환경까지 더해져 아이의 작은 어깨는 부담으로 짓눌렸다. 1950년대 태어나신 어머니는 그 당시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했고, 결혼 후에는 지금의 MZ세대 엄마들처럼 자아실현을 하지 못하고 경력단절이 된 채 자녀교육에 열을 올리셨다.      

5살부터 피아노, 미술, 발레 등 각종 사교육을 받아왔고 초등학교부터는 입시준비의 시작으로 각종 학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기대치가 너무 높다보니 아무리 잘해도 칭찬을 받기 어려웠다. 전 과목 1개를 틀려도 “왜 이 쉬운 문제를 틀렸니? 윗집 누구는 올백 받았다더라. 넌 왜 그것밖에 못해?”라고 만점을 받지 못했다고 꾸지람을 들었다.

     

 모든 것을 다 잘하기란 어렵다. 게다가 항상 최고가 되기를 기대한다면,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 최고는 항상 갱신되기 마련이니까. 또 상위권이 되어도 누구누구와 비교를 계속한다면 더욱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완벽주의 부모의 완벽한 기대아래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지적받으며 자랐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 기대에 부응하기란 어려웠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누구누구보다 잘해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부모님께 칭찬받으려 살았다. 무언가를 잘하지 못하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부모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있고, 나는 거기에 부응하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에.  

   

애벌레들은 꼭대기에 오르려고 기를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있어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호랑 애벌레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호랑 애벌레는 들뜬 마음으로 옆에 있는 애벌레에게 물었습니다. “저 애들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아니?” 그러자 그 애벌레가 말했습니다. “아무도 설명해 줄 시간이 없나 봐. 다들 저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애쓰느라 바쁘거든.”

호랑 애벌레가 또 물었습니다. “저 꼭대기에는 뭐가 있는데?”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모두 저기에 가려고 서두르는 걸 보면 아주 멋진 곳인가 봐.”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동화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나는 마치 여기 나오는 수많은 애벌레 무리들이 애벌레기둥을 이루며 서로를 밟고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 목표도 없이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남들이 다 하니까 본능적으로 입시를 위한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내 존재는 남보다 못하면 가치가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학습의 동기에는 크게 외적동기와 내적동기, 두 가지가 있다.

외적동기는 쉽게 말해서 ‘해야 돼서’ 하는 행동이다. 예를들면 학생이니까 공부를 해야한다. 좋은 직장을 가지려면 명문대에 가야한다. 밥벌어먹고 살아야하니까 일해야 한다. 어찌보면 남을 의식하고, 타인의 평가가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반해, 내적동기는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배움자체가 기쁨이 되는 것이다.

내가 아닌 타인이 기준이 되고, 해야하니까 억지로 하는 행위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인생은 스스로 가치있고 보람을 느끼는 일, 가슴이 뛰는일을 해야만 행복하지 않을까?    

 

게다가 나는 납득이였다. 왜 살아야하는지, 공부는 왜 해야 하는지 머리로 납득이 되어야 몸이 움직이는 사람이 나였다. 또 어린 시절부터 또래아이들과 놀기보다는 혼자 책을 읽고 공상을 즐기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기쁨을 느꼈다.

스카이캐슬에서의 생활은 내향형이자 감성형, 그리고 유리멘탈인 나에게 버거운 생활이었다. 급기야 나는 드라마 스카이캐슬의 가짜 하버드생 차세리처럼 그곳을 회피하고 도망쳤다.

부모님의 높은 기대를 만족시켜 줄 자신이 없었고,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으리란걸 뼛속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습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고, 내적 동기를 가지게 된 과목이 ‘영어’였다. 그시절 미드를 보고, 팝송을 들으며 자유롭고 차별없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고, 기회의 땅으로 도망치듯 떠났다.     

이렇게 자라다보니, 내 아이는 절대 나처럼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반드시 아이 존재 자체로 사랑해주는 엄마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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