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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dakmate Dec 30. 2022

나는 왜 육아가 힘들까?

완벽주의 부모밑에서

 엄마는 어려서부터 “너 키울때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줄 아니?” 이런 말씀을 자주하셨다. 이모들과 엄마친구분들까지도 “엄마한테 잘해라. 너 키운다고 엄마가 너무 고생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른들을 뵐 때마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 솔찍히 듣기 지겨웠다. 그리고 속으로 ‘애 키우는 게 다 똑같지. 뭐가 그렇게 힘들었다고. 애는 엄마 혼자 키우나’ 이런 생각을 했다. 병을 앓았고 간호하느라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별로 실감도 안 나고 감정이입도 되지 않았다.     

 

 나는 생후6개월에 BCG주사 부작용으로 소아결핵을 앓았다. 말도 못하는 아이는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수액주사를 맞고, 검사를 하고, 약을 먹어야했다. 지금처럼 의료기술이 좋지 못해서 머리에 찌르는 수액주사를 아이가 손으로 빼고 다시 찌르고를 반복했다. 6개월 아기는 입원생활 때문에 엄마와의 분리불안증이 생겼고, 다른사람 품에는 잠시도 가있지 않았다. 아마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지 않았을까? 그 때문에 엄마는 24시간 내내 병실에서 아기 옆에 붙어있어야 했다. 먹고, 자고, 배변활동을 하는 기본생활은 물론이고 내 시간을 잠시도 가질 수 없이 몇 달간 무교대로 사는 엄마의 삶이 어땠을까? 


 그리고 퇴원하고도 1년간 쓴 결핵약을 먹어야했다. 요즘이야 달콤한 시럽약이 있지만, 그때는 가루약도 아닌 알약을 엄마가 직접 가루로 빻아 먹이셨다. 이유식을 시작하는 아기는 약을 뱉어내고 입맛이 없어 밥도 잘 먹지 않았다. 엄마는 따라다니며 이유식을 먹이셨다.

아이는 자라서 말도 시작하고 걷기도 하고, 다른 여느 아이들처럼 호기심이 많았다. 엄마는 입으로 가져다 넣는 것마다 빼앗았고 저지했다. 아이는 나가서 뛰어놀지도 못했다. 다칠까봐, 또 아플까봐.     

아빠는 규칙과 루틴이 있는 분이셨다. 사회통념과 같은 외부의 평가기준이 중요했다. 예를들면, 어린이는 어린이 다워야하고 엄마는 엄마다워야하고 아빠는 아빠다워야 했다. 그런데 그 기준은 남들이 정해놓은 사회적인 기준이었다. 


 나는 어린아이때 TV에 나오는 사람들을 따라하고 어른들앞에서 재롱을 잘 부렸다. 마이크를 잡고 가요도 따라부르고 사회도봤다. 앞에 나서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런데 아빠는 “어린이가 동요를 불러야지, 어른노래 따라부르지 마라” 하고 나무라셨다.

가정에서의 역할도 여자는 살림과 육아를 하는것이 마땅하고, 남자는 직장에나가서 돈벌어오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이라고 생각하셨다. 아이는 기준이 많으니 지적당하고 제지당하는 일이 많았다. 

     

 나는 부모님에게 과잉보호와 통제 두 가지를 다 겪으며 자랐다. 

과잉보호는 어린아이가 가진 호기심과 실패/성공 경험을 빼앗았다. 호기심을 가지고 탐색해보려는 시도는 좌절되었다. 그리고 실패를 경험해보면서 스스로 방법을 터득하고,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박탈되었다. 

통제는 ‘나는 무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심어주었다. 완벽한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 내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없고,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이 가득했다. 또 나아가 타인에게도 완벽한 기준을 세워놓고 판단했다. 결코 어떤 것에도 만족할 수 없었다. 


 늘 불만족했고, 그래서 우울했다. 항상 다른 사람과 비교했고 나는 못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아이 때 만들어진 자아, 그 거울은 찌그러졌다. 내 눈에는 열등감에 가득찬 ‘못난 나’라는 안경이 씌어져있었다. 그 안경은 내안에 나로 충만하지 못하게 방해했다. 내가 가진 장점도 단점으로 만들어버렸다. 

나는 그저 사랑받기 원했다. 있는 모습그대로 존중받기 원했다. 내 안의 어린아이는 “난 절대 엄마, 아빠처럼 안 살꺼야” 라고 외쳤다. 그리고 나는 꼭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다짐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엄마가 되었다. 그런데 웬걸 절대 되지 말아야지 하는 엄마모습이 내안에 가득했다. 피곤하고 힘든걸 참다가 분노게이지가 올라가면 욱하고 폭발했다. 아이와 남편은 참는 동안에 아무표현도 하지않으니 갑자기 왜 화를내는지 황당해했다. 내가 이유도 모르고 엄마의 화를 감당해야 했던것처럼, 내 아이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 


 엄마는 화가 폭발하면 머리와 뺨을 자주 때리셨는데 그때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 아이에게는 절대 손을 대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그래서 손이 올라가는 걸 참다보니 입에서 상처 입히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널뛰기를 했다. 


아이에게 기회를 많이 줘야지 했지만, 이것저것 탐색하면서 저지레를 하니 그것들을 치우기가 힘이 들었다. 그냥 내가 해줘버렸다. 밥먹는 시간은 고문당하는 것 같이 괴로운 시간이었다.

하나 흘리면 하나닦고, 하나 흘리면 하나닦고. 그모습을 바라보는게 너무 힘들어 대신 먹여주고 치웠다. 그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보는게 어려웠다. 넘어질까봐 아이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실패의 기회를 주지않고 완벽을 기대했다. 아이에게 내가 들었던 말들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내 그럴줄 알았다. 니가 그럼그렇지.” “이것도 못해?”    

 

좋은 엄마가 되어서 사랑을 듬뿍 주고 싶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 안에 저장된 사랑이 없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나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자기사랑으로 충만해져야 그 사랑이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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