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로 글을 쓰는 요령이 생겼다.
문장이 다가오는 건 정말 찰나이다. 아이가 맑은 눈으로 때 묻지 않은 말을 할 때, 잠깐의 시간이 생겨 한 두 페이지 들여다본 책의 한 구절이 마음에 걸려 있을 때, 이웃의 순박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했을 때 나에게 나도 모르게 내려앉은 문장.
내가 애써 만든 문장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걸어온 누군가의 말 같다. 이런 문장이 계속 내 머리에 맴돌다 또 다른 문장이 덧대지는 것은 쉽지 않다. 일주일, 한 달, 때로는 수개월이 걸린다.
두 문장이면, 이제 시작이다. 애쓰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는 자판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쓰고 싶다. 당장이라도 노트북이나 노트를 펴서 옮겨 적고 싶지만 여건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아쉽게도 그런 영감의 문장은 얄밉게도 산더미 같은 빨래를 개고 있거나, 눈물을 훔치며 양파를 썰거나, 어둠 속에서 아기를 재울 때……. 그런 움직이기 힘든 순간에만 슬그머니 등 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장들을 붙잡기 시작했다. 밤에 생각한 문장은 다음날만 되면 어딘가로 흩어져 버리는 것이 흔한 일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머릿속으로 한 페이지 정도는 담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 요령을 이야기하자면, 첫 문장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쓴 글이 한 페이지쯤 되면 (사실 글로 막상 옮기면 오타가 가득한 졸작의 초고겠지만 그래도 그 꾸며지지 않은 문장이 좋아서) 놓치지 않기 위해, 첫 문장을 자꾸 곱씹는다. 첫 문장을 잊지 않으면 그래도 얼추 비슷한 분위기의 글이 자판에 옮겨진다.
내가 태어나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은 아이 셋을 낳은 일이지만, 그래도 솔직한 후회가 있다면 아이들의 터울을 너무 벌인 것이다. 각각의 이슈가 너무 달라 아이들이 요구하는 바가 너무 다르고 채워주지 못해 미안할 때가 많다. 나는 큰 아이 간식을 하다, 둘째 숙제를 봐줘야 하고, 큰 아이들 둘과 실랑이를 하다 셋째의 똥 기저귀를 치워야 한다. 세 아이가 모두 집에 있는 네 시 이후, 나는 치열하고 아름다운(?) 전쟁의 시간을 보낸다. 그래도 오전의 여유만 내게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감당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지난 일주일은 내게 실로 고행이었다. 큰 아이가 체육 시간에 코뼈를 다치는 바람에 일찍 하교해 통원 치료를 하고, 두 돌 지난 셋째가 며칠 열감기로 나랑 이십 사 시간을 내리 붙어 지내고, 이제 셋째가 좀 괜찮은가 싶으니 둘째가 구내염에 걸려버렸다. 나는 열흘 가까이 한 시간도 온전한 나의 시간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어느 날인가, 글을 쓰려고 잠깐 앉았다가 낮잠에서 일찍 깬 셋째 울음에 부리나케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셋째를 안은 머릿속으로 아까 쓰다 만 문장을 곱씹다가 잠깐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점심도 건너뛰고, 세수도 하지 못한 채였다. 거울에 산발한 머리로 시들어가는 마흔 중반의 아기 엄마가 있었다. 배부른 투정 같으나 그때는 그랬다. 그리고 윤동주의 시 구절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상황도, 마음도 너무나 다른 그 시의 한 토막이.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무얼 바라
그는 자문하고 있지만 아마 알았을 것이다. 본인이 왜, 무얼 바라 다만 홀로 침잠하는지. 그러기에 시가 또 '씌어지고' 말지 않았을까.
나도 혼자 푸념하듯 중얼거리지만 내가 왜 육아전투의 와중에도 이렇게 문장에 매달리는지 안다. 지금의 모든 순간을 하나도 놓치지 싶지 않다. 아이들의 뒤통수에서, 발가락에서, 맑은 눈망울에서 발견한 찰나의 마음을 남기고 싶다. 아이들 셋을 키우느라 조바심을 묻은 채 더디 가지만, 내가 '지예'로 꿈을 꾼 오늘을 세상에 증거 하고 싶다. 나는 쉽게 쓸 수 없는 이 시간들 속에서 나의 문장 하나도 놓칠까 봐 조바심 내며 순간순간 멍하게 되뇔 것이다.
그리고 답을 아는 질문을 덧붙이겠지.
나는 무얼 바라 이리 쓰는가, 쓰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