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 모든 일은 최근 두어 주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이틀 밤 고민하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자책하고 불안감에 떨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인터넷 찾아보는 일은 그만두었다. 자책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고, 부모가 불안해한다고 좋아질 일도 없었다.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발달센터에 상담 예약을 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내 아이, 더 사랑해 주기.
내 아이, 이상을 느낀 부분을 부모가 힘껏 도와주기.
내 아이는 그냥 내 아이.
나의 사랑하는 전부.
나는 그날 아이들이 오기 전에 질 좋은 한우를 사 와서 소고기 미역국을 하고, 알배기 배추와 당근을 종종 썰어 넣어 계란말이를 했다. 그리고 시금치를 무치고 메추리알 장조림도 만들었다.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내가 미친 걸까? 아니. 나는 더 씩씩해지고 강인한 엄마여야 했다. 아이들을 셋 낳은 것은 아이들이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예쁘다고 많이 낳아놓고 언제까지 징징댈 수는 없다. 나의 꿈은 꿈이었지만, 아이들을 보는 시간에는 최대한 씩씩하고 멋진 엄마이길 다시 다짐했다. 나의 몸에 오히려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솟는 기분이었다.
둘째가 아마 나의 고민을 들은 첫 상대였을 것이다.
둘째는 천진한 얼굴로 그렇게 이야기를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엄마, 자기만의 세상에 빠져 있다는 건 눈을 마주치기 힘들다는 거야?"
그리고 둘째는 내내 동생의 눈을 맞추려 노력하고, 내게 자신만이 들은 동생의 언어를 해석해 주려 애쓴다. 그리고 열네 살 첫째는 무심한 목소리로 '아닌 것 같은데.' 하더니 수시로 동생의 이름을 부른다. 그제인가, 막둥이의 앞에 막둥이의 다섯 배나 되는 몸집의 첫째가 앉아 있는 모습을 봤다. 손가락으로 열심히 셋째의 볼을 퉁기며. 시은아, 시은아. 시은아, 시은아.
큰 오빠의 애타는 부름에 막내가 결국은 올려다본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말 없는 첫째의 '시은아.' 그것이 그의 동생을 향한 최선임을 안다.
감기에 걸린 시은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독감 주사를 맞으러 온 한 부부를 보았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종잇장처럼 야윈 남편과 행색이 초라한 부인이었다. 남편을 챙기느라 본인의 입성을 가꿀 시간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 부인을 대하는 간호사의 불친절이 너무 불편해서 간호사를 노려보고 있는 사이, 수납을 마친 부인이 휠체어를 돌렸다.
"아! 제가 열어 드릴게요."
얼른 시은이를 한 손에 안고 문을 열어 드렸다. 부인은 감사합니다,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상냥하게 답례를 했다. 그리고 휠체어를 밀며 "우리 이제 놀러 가자. 날씨가 너무 좋지?" 밝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묻는다. 고개를 한쪽으로 떨군 남편은 표정도 없고, 대답도 없다. 그렇지만 부인의 몸짓은 씩씩하고 힘차다. 나는 뭉클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약한 사람을 챙기라고 가족을 주고 엄마를 주었구나.
그날 시은이의 고민을 끝냈던 것 같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부부를 내게 보게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