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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예 Oct 11. 2023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논문을 위한 공부와 사색 1.

이제 만 두 살의 막내가 말을 배우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말을 못하는 아이가 아닐까 걱정했던 아이의 말문이 뒤늦게 터졌고 다행히 천천히 말을 더듬어 배워갑니다. 아이는 배고파, 졸려, 추워 등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의 표현에서부터 행복해, 사랑해 등의 표현까지도 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아이는 이제 의식적인 '고자질'까지 할 수 있습니다. 오빠가 본인의 장난감을 빼앗은 것에 대해 세상 가장 억울한 표정을 하고 엄마에게 구원을 요청할 수 있으며, 엄마로 하여금 본인의 권력(?)을 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말을 '가지는' 중이고 말이 가진 권력을 습득하는 중 입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를 공부하다, 우리 아이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서발턴'이라는 용어를 사전으로 검색하면 '하층민'이라 해석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해석은 정확한 것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하층민은, '상층민'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요. 그러한 폭압적 해석조차 스피박이 지적한 주류 이데올로기의 하나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서발턴'은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사용했던 용어로, 그는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이탈리아 남부의 하층 농민 계급에 대해 처음 서발턴이라 칭했습니다. 이후, 이 용어는 20세기 후반 인도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지배 엘리트 집단 이외의 주변부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다 일반화되었습니다.


서발턴으로 지칭되는 집단은 반드시 하층민이나 소수자가 아닙니다. 스피박은 "서발턴은 고정적 정의로 단순하게 서술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제기한 가장 중심적인 질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알 수 있듯 서발턴은 입을 가졌으나 '말할 수 없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피폐한 본질을 삶으로 경험하고 있으나 말할 수 없는 모든 이들이 서발턴입니다. 


말은 곧 권력과도 같습니다. 역사는 말을 가진 이들에 의해 서술되어 왔습니다. 서발턴에 대해 씌여진 문학작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를 투명하고 객관적인 관찰자라고 주장하는 모든 서술에는 언제나 주관적인 '재현'이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까지도 서발턴의 글은 서발턴이 쓸 수 없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씌여집니다. 그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글. 그리고 주류와는 다른 '타자'로 위치시키는 역사. 이것은 서발턴의 역사는 아닐 것입니다. 말을 가지지 못한 자는, 곧 약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막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 억울한 일을 자주 당했습니다. 두 오빠는 집안의 작은 소동에 대해 아직 말도 못하는 동생탓을 하기 일쑤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남몰래 웃으며 아이에게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 시은이 억울하겠다, 그지? 얼른 말해서 오빠들 혼내주자."라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지켜보는 내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아이가 말하기 전까지,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엄마는 신적인 존재입니다. 세 아이의 입장을 지켜보고 대변할 수 있는 엄마가 있었기에 공정하고 객관적인 서술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서발턴의 논의로 옮겨오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집니다. 서발턴과 서발턴외의 이들을 창조한 신이 지켜볼 터이나 신은 말이 없습니다. 그들의 역사가 끝나기 전까지. 다만 서발턴을 '재현'하는 일방적인 서술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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