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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핀름 Oct 16. 2024

<룩백>: 좌절한 예술가의 미래가 있는 곳



  1. ‘예술가 되기’과 ‘예술 하기’의 경계에서




    영화 오프닝의 앵글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서부터 시작해 어느 지방의 한 주택으로, 그 주택의 2층 방 안에서 만화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한 소녀의 뒷모습으로 이동한다.  소녀의 이름은 후지노, 만화 창작을 좋아하는 초등학생이다.


    만화 <체인소 맨>의 작가로 알려진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룩백>은 ‘예술 하기’(여기에서 ‘예술 하기’란 직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예술분야에서의 행위와 향유 그 자체를 말한다)에 흥미를 느끼게 된 한 아이가 프로예술가로 성장하기까지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이 꿈을 성취하는 순간에 주목하여 극적인 장면을 연출해내는 여타 다른 소년만화와 달리 <룩백>은 프로가 되고 난 이후 예술에 대한 애정이 시들어버린 주인공의 모습을 분기점으로 삼는다. 영화에서 만화를 그리는 후지노의 뒷모습은 비슷한 구도로 여러 번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후지노의 뒷모습이 가장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후지노가 프로 작가로 가장 큰 성공을 이루고 난 뒤에 이어지는 장면이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만화적 재능을 인정받으며 학보에 네 컷 만화를 연재하던 후지노는 어느 날 자신의 그림 실력을 완전히 압도해 버리는 쿄모토의 만화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이후 후지노는 쿄모토의 그림 실력을 뛰어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 공부에만 투자하기 시작한다. 주변의 만류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실력의 비약적 도약을 이루어냈지만, 후지노는 결국 쿄모토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재능의 차이를 느낀 후 “이제 됐어”라고 말하는 후지노의 체념은 나의 실력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 어린 예술가의 첫 좌절이다.



     졸업장 전달을 위해 쿄모토와 첫 대면을 한 이후, 후지노는 자신의 노력과 재능을 알아봐 주는 쿄모토와 함께 하나의 팀이 되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나와 같은 열정을 지닌 첫 동료이자 팬을 만나게 된 순간이다. 두 사람은 프로 만화가가 되기 위해 혼자일 때보다 더욱 치열한 강도로 만화를 그리지만, 그 과정은 프로 작가가 된 이후 보이는 후지노의 일상과 달리 설레고 즐거운 시간으로 표현된다. 영화는 왜 예술가의 아마추어 시절을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연출한 것일까?



     지난 6월 두산아트센터에서 올라간 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예술가로 인정받길 원하는 아마추어들의 우습고 치열한 투쟁기를 다루며 예술인과 비예술인을 구분 짓는 경계의 파열을 예고했다. 인물들은 연극 무대를 올릴 수 있는 자격을 갖기 위해 예술인 패스를 받아야 하는 배우 지망생들이다. 막이 진행되며 그들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술 하기’ 자체에 즐거움을 느꼈던 나의 자아는 점점 사라진다.



    ‘예술 하기’의 지속을 위해서는 ‘예술가 되기’가 필요하고, 아마추어와 구분되는 프로로써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술가는 계속해서 ‘자격 증명’을 제1 목표로 달려 나간다. 미대에 진학한 쿄모토와 이별한 뒤 ‘샤크 킥’의 작가가 된 후지노에게 ‘예술 하기’는 곧 ‘노동’이 된다. 노동의 결과가 곧 나의 시장 가치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노동 그 자체를 사랑할 수 있는가?  후지노가 이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하며 경계선에서 배회하던 어느 날, 후지노의 인생을 또 한 번 바꿔놓을 터닝포인트가 찾아온다. 그 발단은 과거의 동료이자 자신의 재능을 처음으로 인정해 준 열성팬 쿄모토의 죽음이다.





  

    2. 만약 예술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쿄모토의 장례식 이후 후지노는 자신이 쿄모토를 안전한 방 안에서부터 위험한 바깥으로 끌어냈다는 자책에 빠진다. 자신이 쿄모토와 교류하지 않았더라면 쿄모토의 죽음 역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며 두 사람의 연결고리가 되어준 네 컷 만화를 찢어버린다. 이때 후지노에 의해 찢긴 종이가 제 2세계선의 어린 쿄모토에게로 전달되는 평행 세계 진입의 연출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영화의 장르를 가장 잘 살리면서도 본격적으로 작품의 주제 의식이 드러나는 중요한 장면이다.

    1세계선과 달리 후지노와 대면하지 못한 2세계선의 쿄모토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1세계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결국 미술대학에 입학한다. 후지노의 자책과 달리 쿄모토를 바깥세상으로 이끌어 내 배경 미술의 세계로 인도한 주체는 바로 쿄모토 그 자신이었던 것이다.



    작중의 살인 사건은 2019년 한 남성의 과대망상으로 일어난 쿄애니 방화 사건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는 니시야 후토시를 비롯한 36명의 동료를 잃어야 했다. 가해와 피해가 명확한 사건에서 ‘그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더라면’이라는 가정은 사건의 책임을 피해자의 일상으로 돌리려는 사고방식이다. 후지노와의 만남 유무와 관계없이 쿄모토는 미술을 사랑했고, 후지노의 만화에 감격했으며, 꿈을 향해 도전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예술 하기’를 사랑했을 뿐인 쿄모토가 방 밖으로 나오지 말았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면 남겨진 1세계선의 후지노가 해야 할 일은 쿄모토와 함께 했던 ‘예술 하기’의 과거를 삭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전의 쿄모토가 있는 힘껏 응원해 왔던 자신의 ‘예술 하기’를 제대로 ‘Look Back’ 하는 것이다. 쿄모토의 방에 소중히 걸려있던 옷의 등판을 보며 어린 예술가로서의 첫 시작점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후지노는 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던 상실의 순간, ‘예술 하기’의 흔적이 가득 차 있는 쿄모토의 방에서 만화를 사랑해 왔던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되돌아본다.




  

    3. Look back! - ‘앞만 보며 달려’의 전복  


    

    직업적 성공을 선행한 이들에게 우리는 종종 ‘앞만 보며 달려라’는 조언을 듣는다. <룩백>은 제목에서부터 그러한 성취 주의적 사고에 제대로 제동을 거는 영화다. 처음 예술에 재미를 느끼게 된 날부터 타인의 인정에 목말랐던 아마추어 생활,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동료와의 만남과 이별, 작품으로 첫 고료를 받은 순간과 프로가 된 이후 ‘예술 하기’가 노동으로만 전락해 버린 상황까지 후지노라는 한 만화가의 일대기를 관객과 공유하며 설득한다.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는 예술가는 좌절과 상실로부터 치유받을 수 없다고.



    쿄모토의 방에서 자신의 작업실로 돌아온 후지노는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자신의 꿈이자 쿄모토와 함께     시작했던 만화 ‘샤크맨’의 원고를 그린다. 후지노가 고개를 들면 바로 바라 볼 수 있는 위치에 빈 네 컷 만화 용지가 붙어있다. 그것은 순수한 재미로 만화를 그리던 어린 시절의 후지노를 기억하겠다는, 동시에  쿄모토와의 추억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다시 프로 작가의 생활을 시작한 후지노는 또 한 번 좌절의 순간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지노의 등 뒤, 그녀가 걸어온 과거에는 후지노를 응원하는 쿄모토와 만화를 사랑하는 어린 후지노가 있다. 과거는 바꿀 수 없는 영역이므로 그 사실은 후지노의 미래의 좌절과 무관하게 영원하다.


    나의 ‘예술 하기’가 자꾸만 ‘예술가 되기’의 욕망으로 빨려 들어갈 때, 증명의 압박이 애정과 흥미를 압도할 때, 예술가는 앞만 보며 질주하는 대신 ‘Look back’으로 스스로를 치유한다. 그곳에 당신의 미래가 함께 있다.





editor: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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