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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핀름 Mar 04. 2024

<추락의 해부>: 해부된 집터에 남은 현실들


    한 남자가 자신의 집에서 추락해 죽었습니다. 남자의 사인은 자살 혹은 살인으로 추정되는 상태. 사인을 입증할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용의자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 산드라입니다. 산드라의 살인죄와 무죄를 주장하는 양측의 치열한 법정 다툼 속 가족의 가정사는 각자의 입장에 유리한 방식대로 해부되고, 재해석되는데요. 일 년이 넘는 해부 과정을 겪은 뒤 낱낱이 조각나버린 이 가족의 집터에 남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1. 허구와 진실, 소설과 현실



    상상력으로 꾸며낸 이야기를 뜻하는 ‘허구’와 거짓이 없는 사실을 뜻하는 ‘진실’은 서로 양극단에 위치한 단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심지어는 법정 안에서 ‘허구’와 ‘진실’이 칼로 무 자르듯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를 보충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비유가 바로 ‘소설’과 ‘현실’입니다.

    산드라는 자신이 현실에서 겪은 일들과 감정을 토대로 소설을 쓰는 자전 소설 작가입니다. 영화 초반 작법 상담을 위해 찾아온 학생 조엘에게도 그녀는 소설을 잘 쓰는 기술을 강의하는 대신 조엘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도록 유도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작가의 현실을 반영하여 쓴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소설을 ‘작가의 이야기’로 치환하여 판단할 수 있을까요? 산드라를 살인 용의자로 세운 재판에서 검사는 그녀의 소설 속 인물의 심리를 토대로 산드라의 살해 동기를 설명합니다. 티비쇼와 기자들 역시 그녀를 소설 속 인물과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산드라의 현실과 산드라의 소설을 동일시한다면 산드라는 평소 남편에게 살의를 갖고 있던 아내여야 합니다. 사뮈엘의 죽음 전날 부부가 감정을 폭발시키며 싸우던 음성이 담긴 녹음 파일은 그러한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산드라가 실제로 사뮈엘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산드라가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하였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상상에 달려있습니다. 물론 산드라의 글엔 남편에 대한 살인 욕구가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글은 일기가 아닌 소설이고, 주인공은 산드라가 아닌 가상인물입니다. 소설과 현실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판단 준거를 세울 수 없기에, 우리는 소설을 현실로 치환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소설을 현실로 치환할 수 없다’는 명제는 정확하지 않은 단서들을 통해 사뮈엘의 죽음을 소설화하는 재판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검사와 변호사는 살인을 입증하기 위해 혹은 의뢰인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부부의 은밀하고 개인적인 과거들을 소환합니다. 그러나 가족의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하여 가족의 일들이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되고 해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검사는 사뮈엘의 정신과 상담 기록과 부부 싸움이 녹음된 녹음 파일을 토대로 부부의 관계를 ‘아내의 일방적인 착취로 유지되던 폭력적 관계’로 해석합니다. 반면 변호사 뱅상은 사뮈엘을 평생 열등감과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유약한 인간으로 해석하려 시도하죠. 검사와 변호사는 부부의 생활에서 각자의 주장에 어울리는 부분을 골라 자신만의 단편소설을 완성합니다.



    ‘남편을 노예처럼 부려 먹은 아내-착취당한 남편’-‘남편의 히스테리와 우울을 감내해 온 아내-열등감에 시달리던 남편’이라는 두 가지 소설에서 관객은 다니엘의 입장이 되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때 영화가 제공하는 상징적인 소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프닝 크레딧에서부터 사용되던 부부의 필름 사진들입니다. 사진 속 산드라와 사뮈엘은 이후 펼쳐지는 법정 진술들의 내용과 사뭇 다른 분위기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이상적인 부부사이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한 남자가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자살할 만큼, 한 여자가 남편으로부터 비롯되는 절망을 견디지 못해 우발적 살인을 저지를 만큼 끔찍한 부부의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필름 사진 속 부부의 행복한 모습들이 거짓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부부의 모습도, 저주를 퍼부으며 다투던 부부의 모습도 모두 진실입니다. 부부에겐 여러 모습과 감정이 공존할 수 있습니다. 개연성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는 다면성. 그게 바로 현실과 소설이 달라지는 지점일 겁니다.



2. 편집되지 않은 시선의 목격자


    부부와 아들이 각기 피해자, 용의자, 증인의 역할을 맡게 된 상황에서 가족의 구성원이면서도 재판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가 있습니다. 그는 가족이 기르는 반려견이자 다니엘의 길잡이 역할을 하던 보더콜리 스눕(Snoop)입니다. 스눕은 다니엘과 더불어 사뮈엘의 시신을 최초발견한 또 다른 목격자이지만 ‘증언’을 할 수 없는 개이기에 사건현장인 집에서만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러한 힘없는 존재를 이상하리만큼 집요한 앵글로 쫓습니다. 정작 사건의 중심인물인 사뮈엘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공놀이와 목욕을 하는 스눕의 모습이 오랫동안 비추어지고, 경찰 조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집안 곳곳을 누비는 스눕의 움직임이 담깁니다. 자칫 쓸모없어 보일 수도 있는 스눕의 컷이 영화의 후반까지 기용될 쯤 관객은 이 영화에서 가장 편집되지 않은 시선은 발언권이 없는 개의 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같은 목격자 신분인 다니엘과 스눕을 비교해 봅시다. 다니엘은 사뮈엘의 죽음이 있기 전까지 다정하지만 가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와 엄격하지만 자신을 아껴주는 어머니의 숨겨진 사정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부는 아이에게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아이도 구태여 부모의 어두운 이면을 알기 위해 노력할 이유가 없었죠. 과연 스눕 역시 그러했을까요? 우리는 스눕(Snoop)이라는 이름에 ‘염탐꾼’ 혹은 ‘기웃거리다’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합니다. 아이에겐 숨기고픈 내밀한 이야기도 기웃거리는 개의 앞에선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법입니다. 스눕은 부부가 원수처럼 서로를 저주하던 날, 서로의 동반자처럼 사랑을 속삭이던 날, 아들의 사고에 서로를 원망하고 다독이던 무수한 날들을 지켜봐 왔을 겁니다. 아스피린을 먹고 쓰러지던 사뮈엘과 남편이 작업하는 다락방 밑에서 글을 쓰던 산드라의 모습 역시 지켜보았을 겁니다. 어쩌면 스눕은 재판장에서 발언하는 모든 인물보다 사건의 진실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목격자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앞서 인물들이 각자의 입장 변호를 위해 가족의 역사와 정보들을 어떻게 편집하고 소설화해왔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스눕은 편집자의 역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변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개는 그저 사뮈엘의 죽음에 놀라 달려가고, 경찰들이 가득한 집 안에서 다니엘의 옆을 지키고,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산드라의 옆에 누워 자신의 체온을 나눠줄 뿐입니다. 사건의 전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던 다니엘은 이러한 개의 시선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사뮈엘의 자살 징후들을 기억해냅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토사물 속 아스피린을 먹고 쓰러진 스눕을 두고 한 말이 사실 아버지 스스로의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가장 편집되지 않았던 낮은 시선은 그렇게 자신의 어린 주인에게 또 한번 길잡이의 역할을 합니다.




3. 해부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

   

     무죄 판결을 받은 뒤 후련한 얼굴로 법정을 나서는 산드라의 모습을 보며 다니엘은 마음껏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습니다. 산드라 역시 저녁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에 기뻐하면서도 뒤풀이 자리에 오랫동안 남아있다 다니엘이 잠든 후에야 집으로 돌아갑니다. 부모는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면들을 너무 많이 보여주었고, 아이는 모르고 자랐다면 더 좋았을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증인으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를 당당히 완성했던 아이는 아들의 역할로 돌아오자 갈피를 잃어버립니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낱낱이 해부된 가족은 제대로 재조립되지 못한 채 낱개의 조각으로 흩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영화는 해부된 가족의 미래를 뚜렷이 예견해 주지 않으며 미완의 결말을 선택합니다.

    결말뿐만이 아닌 영화 속 많은 요소들이 의도된 미완결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뮈엘은 평생 제대로 된 자신의 소설을 완성하지 못했고, 사인 역시 명확하지 못한 상태로 죽게 됩니다. 산드라는 사뮈엘의 고향으로 집을 옮기며 불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언어를 제대로 익히지 못해 영화 내내 미완성된 불어를 구사합니다. 하물며 그들이 머무는 집 역시 미완축된 상태입니다. 재판의 결과와 관계없이 산드라의 가족은 재판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사뮈엘이 죽은 이후 산드라가 슬픔에 빠진 다니엘을 안아주던 장면에서 다니엘은 엄마의 ‘말해주지 않은 삶’에 대해 알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이와 대비되어 산드라가 무죄 판결을 받고 잠에서 깨어난 다니엘과 나누는 포옹은 같은 장소 비슷한 앵글로 진행됩니다. 이때의 다니엘은 산드라의 ‘말해주지 않은 삶’을 모두 알고 있지만, 산드라는 일년 간 변화한 아들의 마음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모자에게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이해할 기력은 적어도 영화 속의 시간대에선 존재하지 않는 듯 합니다. 


    

    재판이 시작된 이후 가족의 집엔 산드라가 다니엘에게 재판과 관련된 말을 하지 않도록 마르주라는 인물이 늘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재판 결과가 나오자 감찰 요원으로서의 의무를 마친 그녀는 산드라에게 다니엘을 인솔한 뒤 집을 떠납니다. 그들의 집엔 마르주처럼 가족을 해부하거나 감시하기 위한 인물들이 끊임없이 출입하지만, 정작 가족의 회복을 위해 출입하는 인물은 없었습니다.

    극의 전개 과정의 포인트가 되던 다니엘의 피아노 연주를 기억하실 겁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어머니가 용의자로 지목되었을 때에, 과열된 재판 과정 중 어머니를 의심하게 되었을 때 다니엘은 피아노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분출합니다. 어머니가 무죄 판결을 받고 미완축된 집으로 돌아온 지금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버린 소년의 연주는 어떠한 형태일까요? 어쩌면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잔혹히 해부된 가족의 과거가 아닌 아직 나오지 않은 소년의 음악일지도 모릅니다.




editor: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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