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을 살아가며 한 번씩 인생을 뒤흔들 고통을 마주하곤 합니다. 때로는 이 고통의 수렁 속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치고, 또 때로는 그럴 힘마저 없어 그대로 깊은 수렁 속에 잠기곤 합니다. 조금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수렁 속, 이 고통에서 당신을 구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더 웨일>은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혹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를 구하기도 하는 이 삶 속에서, 영화 <더 웨일>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원받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결책은 아니라고, 그리고 어쩌면 당신을 구하는 것이 가족도, 연인도 아닌 나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272kg의 거대한 몸을 가진 ‘찰리’는 온라인으로 에세이를 가르치는 대학 강사입니다. 과거에는 정상 체중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최근 몇 년간 급격하게 찐 살로 더 이상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졌습니다. 거대한 몸 탓에 외출도 하지 않고 집 안에만 머무르던 어느 날, 그에게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딸 ‘엘리’가 집으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잘 지내고 있을 거라는 찰리의 예상과 달리, 엘리는 이번 에세이 과제에 통과하지 못하면 학교에서 쫓겨날 정도로 문제아가 되어 있었습니다. 찰리는 그런 엘리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줄 테니 이 집에서 작문 수업을 받으라는 제안을 하며 <더 웨일>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법을 살린 연출
<더 웨일>은 사무엘 D. 헌터의 동명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절제된 공간 사용과 카메라 연출을 통해 고전주의 연극 법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롯된 이 법칙은 시간, 장소, 행동의 일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더 웨일>에서는 ‘시간’과 ‘장소’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시간의 일치란 극중 진행되는 사건이 하루 안에, 즉 연극이 진행되는 시간 안에 끝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더 웨일> 속 찰리의 일상도 일주일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 전개됩니다. 영화는 임의적으로 시간의 제한을 두며 앞으로 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유한함을 강조합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요일별로 사건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영화의 직선 플롯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도록 연출하기도 합니다.
한편 찰리의 행동반경을 ‘집안’으로 제한하는 것은 ‘장소’의 일치를 보여주는 연출입니다. 영화에서는 집을 벗어날 수 없는 찰리 대신, 다른 인물들이 그의 집에 방문하여 사건을 만들어나가고, 핵심 사건들 역시 이야기의 무대인 ‘집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간의 제약은 자칫하면 이야기가 단조로운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는데, <더 웨일>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찰리를 제외한 인물들이 그의 집에 방문하는 구성으로 단점을 해소하고 있습니다.
관객의 시야를 가린 시점의 연출
<더 웨일>에서는 연극과 영화의 차이가 뚜렷하게 비교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바로, 두 장르의 특징에서 비롯된 카메라 연출입니다. 연극과 달리 영화는 카메라 렌즈를 투영해야만 하는 예술입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인물의 시점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관객은 필연적으로 카메라 렌즈로부터, 즉 감독의 시선에 의해 정보를 제공받게 됩니다. 그러나 <더 웨일>은 오히려 카메라의 시점을 제한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영화에서는 종종 찰리가 창문을 통해 방 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방 밖의 인물이 찰리의 방 안을 들여다보는 시점은 한 차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찰리와 관객들은 창문에 비추어진 그림자 혹은 노크소리나 말소리를 통해 방문자의 ‘인기척’만을 느낄 뿐입니다. 따라서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인물의 시점은 오직 영화 속 무대, 즉 방 안의 인물들로 한정됩니다. 마치 연극처럼 시점이 고정된 이 연출은 <더 웨일>이 무엇에 중점을 두느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화 <더 웨일>은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사건 전개보다 인물 중심의 서사와 각 인물의 심리에 힘을 싣은 영화입니다. 그렇기에 찰리의 심리를 세심하게 묘사하는 것, 그리고 관객들이 그의 시점에 몰두하여 다른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인물의 시점을 제한하는 연출을 통해 관객들이 찰리의 시점에 적극적으로 몰두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즉 관객의 시선을 일부 가리는 연극적인 연출로 영화의 효과를 극대화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구원인가
찰리의 집에 찾아오는 인물들은 전부 하나의 공통점으로 이어져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위해 타인을 돕지만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미성년자 엘리를 제외한 나머지 세 인물들은 간병인, 선교사, 강사라는 직업군으로 모두 타인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통해 찰리를 구원하려고 하지만, 결국 그들의 진정한 동기는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인물 토마스는 신실한 선교자인 척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새생명교회의 교리를 전파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의 전도는 찰리가 새생명교회 때문에 연인을 잃었단 사연을 들은 후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토마스는 신앙을 통해 찰리를 구원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몰래 도망친 뒤, 찰리를 구하여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인물 리즈는 찰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실질적 도움을 주는 의료인입니다. 그는 오빠의 자살을 말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의 애인인 찰리를 돌보며 죄책감과 슬픔을 희석하려 합니다. 토마스와의 대화에서 “오직 나만이 찰리를 도울 수 있어.”라고 소리친 대사는 찰리의 유일한 구원자가 되려는 리즈의 욕망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가장 실질적 도움을 준 리즈 역시, 찰리가 매우 위급한 상황임을 알면서도 결코 그를 병원에 보내지 않습니다. 이는 지금껏 의료인으로서 도움을 준 것과는 대비되는 행동으로, 구원자가 되고 싶었던 욕망과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세 번째 인물 엘리는 찰리의 재산을 받겠다는 표면적 이유로 찰리의 에세이 수업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러나 내면적 이유로는 찰리가 떠난 뒤 받은 상처와 분노를 그에게 쏟아내기 위해, 보상받지 못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을 해결하기 위해 등, 여러 복잡한 이유로 찰리를 만납니다.
여기서 특별한 점은 그녀는 찰리의 구원에서 가장 거리가 멀어 보였으나 찰리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엘리는 엄마인 메리마저 ‘악마’라고 부르던 존재였으며, 찰리와도 가장 갈등을 겪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찰리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정작 에세이 수업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찰리에 대한 애증에서 비롯된 구원의 갈망으로 비치기도 합니다.
엘리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구원의 원인이자 애증의 대상인 찰리를 마음껏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친근하게 대할 수도 없는 모호한 상태를 유지하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찰리를 만나며 그에게 애증이 뒤섞인 화살을 돌리려 했으나, 오히려 그를 만난 뒤로는 자신의 복잡한 감정 때문에 제대로 감정을 해소하지 못합니다. 그 후, 원망의 대상을 잃어버린 감정의 화살은 자신에게로 향하고, 이를 공격적인 표현으로 표출하며 다른 인물과의 갈등을 겪게 된 것입니다. 즉 엘리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찰리를 만났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 인물입니다.
마지막 인물 찰리의 상황은 어떨까요? 주인공 찰리 역시 자신의 구원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다른 인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가족을 버리고 연인을 택했으나, 결국 그 연인마저 죽어버리며 삶의 모든 원동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렇게 본인의 선택에 대한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휩싸인 그는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단 걸 알아야겠어!”라는 대사처럼 자신의 선택이 딸의 인생마저 망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찰리가 바라는 것은 딸의 탈선을 막고, 그녀에게 용서와 인정을 받아 구원되는 것입니다. 즉, 엘리를 구원하려던 본인 또한 자신의 구원을 절박하게 갈망하는 인물인 것입니다. 이로써 <더 웨일>이 보여주는 모든 인물들은 구제받기 위해 구원에 얽매인 구원자들이었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끝 혹은 해방
<더 웨일>의 엔딩은 찰리가 보조 기구 없이 엘리에게로 걸어가는 장면과 바다로 들어가는 장면이 오버랩되며 끝이 납니다. 한 마리의 거대한 고래가 되어 자신이 꿈꿔왔던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은 마치 구원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과연, 정말 그는 구원받은 걸까요?
찰리의 주변 인물들은 그가 구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회를 부여받습니다. 찰리에게 매번 괜찮냐고 묻지만 정말로 그가 괜찮은지 직접 살펴보진 않는 피자배달부나, 찰리가 곧 죽을 걸 알면서도 구급차를 부르지 않는 리즈 등, 여러 기회가 있음에도 인물들은 찰리의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종교는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새생명교회는 신실한 신도였던 찰리의 애인을 구해주지 못했으며, 이를 믿는 토마스의 삶도, 그리고 교회로 인해 고통받은 찰리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즉, 인간이 아닌 종교마저 이들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자의 도움 없이도 찰리는 끝내 해방을 맞이합니다.
<더 웨일>은 우리에게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집니다. 그리고 등장인물을 통해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오히려 바라왔던 것은 ‘구원’ 자체가 아닌 ‘해방’이라는 의미를 전합니다. 특히 엔딩 장면 중 엘리가 찰리에게 에세이를 읽어주는 장면은 구원의 해방으로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찰리는 그녀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선택이 딸을 망치지 않았음을, 또한 딸이 진솔한 사람으로 자랐음을 확인하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할 방법으로 죽음을 선택하며 타인에 의한 수동적인 구원이 아닌, 구원을 맹목적으로 원하던 스스로의 욕망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더 웨일> 속 인물들이 바라던 구원의 형태는 누군가의 최종 목표이자 이상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찰리는 구원을 목표가 아닌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여 자신만의 진정한 해방을 맞이합니다. 결국 영화 속 인물들이 바라왔던 구원은 구원자에 의한 ‘구원’ 보다, 구원을 향한 욕망에서의 ‘해방’을 바랐던 것입니다.
구원을 향한 인간의 태도와 그 의미를 되새기는 영화 <더 웨일>. 삶을 살아가며 커다란 절망을 맞이했을 때, 진정으로 여러분을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누군가의 구제 없이 자신만의 구원을 얻은 찰리처럼, 어쩌면 내가 바라는 구원은 나 자신이 찾아낼지도 모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나의 구원자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editor: G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