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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핀름 Apr 03. 2024

<괴물>:괴물은 부르는가 불리는가 혹은 불어 내지는가


    두 소년이 이어진다. 등굣길에선 저만치 멀게만 보였던 작은 체구의 뒷모습이었는데, 학교 정문에 다다르자 어느새, 말간 왼편 얼굴이 보일 만큼 가까이에 닿는다. 두 사건이 연쇄한다. 영화는 여러 소방차와 입소문을 이끈 방화 사건으로 시작해 마을과 숲을 휩쓰는 폭풍우로 결말을 맺는다. 이런 인재와 자연재해마저 사소하게 만드는 사건은 바로 두 소년의 만남이다. 무릇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난다는 건 사건의 충돌, 나아가 새로운 사건으로 향하는 과정을 닮아있다.




    영화 〈괴물〉은 엄마 사오리가 미나토의 돌발행동에 이상함을 감지하고 학교에 찾아가며 시작된다. 관객은 학부모와 교사, 아이들의 엇갈리는 시점을 경유해 마침내 모든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가닿는다. 여러 겹의 서로 다른 시선으로 닫혀 있던 내막이 열린 곳에는 어떤 진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을까.






1. 하나의 망원경을 쥔 여러 인물들

    영화 〈괴물〉 속 인물들은 분명 같은 사건을 같은 시공간에서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초점에 치우친 탓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감독 고레에다는 이 착각의 연쇄 과정을 시각화하기 위해 하나의 망원경을 여러 인물에게 번갈아 가며 쥐여준다. 다시점 구성을 채택한 이 영화는 1부에서 엄마 사오리, 2부에서 호리 선생, 3부에서는 미나토에게 서술 권한을 맡기고 각자의 렌즈를 통해 그들이 무엇을 들여다보는지를 담고 있다.

    1부에서 사오리는 미나토의 잘린 머리카락, 상처 난 귀, 흙이 담긴 물통 등을 본 것이 전부였다. 그녀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에 가까운 아들의 정황만을 들여다보느라 실제 미나토와 요리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파악하지는 못한다. 2부에서 호리 선생은 미나토의 돌발행동과 요리와의 몸싸움을 말리고, 다른 학생의 이야기를 곡해하여 미나토가 고양이를 죽였다고 오해하기도 한다. 호리 선생은 미나토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라고 학부모에게 전하기까지 하지만 정작 모든 어른들은 많은 사건의 원인이 된 미나토의 혼란스러운 마음과 실제 괴롭힘 당하고 있는 요리의 상황에 대해선 눈치채지 못한다.



    오해와 착각이 연쇄하는 과정에서 어른들은 가해자, 즉 괴물을 식별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괴물 찾기에 급급한 나머지 혐의가 없는 상대에게 죄를 묻는 인물들은 제대로 된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다. 학교에 수 차례 찾아간 사오리는 학생을 고의로 다치게 한 적 없는 교사로부터 공개 사과를 이끌어냈다. 저지른 적 없는 죄에 대한 보복에 시달린 호리 선생이 진실을 요청하려 미나토에게 접근한 일은 본인에게 불리한 소문의 몸집을 부풀게 만들었을 뿐이다.

    괴물을 찾느라 망원경 밖을 보지 못한 건 사오리와 호리 선생뿐만이 아니다. 결국 괴물을 찾아 애쓰느라 망원경에만 붙들려 렌즈 밖의 더 넓은 정황을 보지 못했던 건 스크린 밖의 관객도 마찬가지였다. 관객은 오로지 접근 가능한 사실만을 바탕으로 각 인물을 추궁하고 그 의심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호리 선생이 미나토의 물리적·심리적 가해자였다가도 미나토가 학교 폭력의 가해자로 변모하는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는, 영화 속 인물과 관객 모두가 망원경을 내려놓은 3부에 이르러서야 드러나게 된다.


    사오리와 미나토가 함께 TV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 미나토는 ‘티비니까 몰카인지 알 수 있는 거야’라고 이야기한다. 〈괴물〉의 관객 역시 ‘영화니까’ 사건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우리가 영화 안에, 사오리와 호리 선생 역에 놓여있었다면, 누군가를 괴물로 부르지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2. 불쌍하지 않은 마음을, 후 분다는 것

    영화의 3부 구성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이 있다면 바로 교장 마키코이다. 교장은 마음 쓰일 수밖에 없는 아픔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다가도, 교장실에서 학부모를 대응하는 시나리오를 연습하고 죽은 손녀와 함께 찍은 사진의 액자가 제대로 ‘전시’될 수 있도록 배치하는 섬짓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1부에서 사오리는 교장이 마트에서 뛰어다니는 여자아이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모습을 목격하는데, 이는 학부모 항의에 성의 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교장의 의미심장함을 배로 만드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 역시 사오리가 받아들이는 단편적인 맥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더 큰 사고로 이어지기 이전에 뛰어다니는 아이를 멈췄다는 의도로 그의 행동을 읽어낸다면 교장은 충분히 ‘교장다운’ 행동을 한 게 아닌가.



    사오리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1부의 후반부, 울며 잠에서 깬 미나토는 엄마의 손을 잡으며 스스로가 불쌍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호리 선생이 억울함을 토로하기 이전인 2막의 초반부에서 그의 연인은 어항에서 뒤집혀 움직이지 못하는 금붕어가 마치 호리와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호리는 본인은 불쌍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짧은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이 대사는 미나토와 호리가 얼마나 닮은 꼴의 인물인지를 방증하고 있다. 호리 선생은 편모 가정인 미나토에게 공통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한 부모 가정의 아이에게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미나토는 남들과는 다른, 평범하지 않은 환경과 정체성을 가진 본인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강박을 놓지 못하고 있다.


    두 인물 모두 스스로의 다름에 대한, 즉 정상성의 범주에 소속되지 못한다는 의식에 저도 모른 채 붙들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씩이나 강조되는 불쌍하지 않다는 대사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대한 자격지심이 호리와 미나토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었기에 반복되며 강조된 대사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때 미나토의 ‘불쌍하지 않은’ 마음은 ‘행복할 수 없기에 거짓말을 하는’ 결과를 낳는다. 미나토는 사랑과 우정 중 어떤 이름표를 붙여야 하는지 망설여지는 감정을 갖게 된 후 망설임을 거짓말로 둔갑시켜 바깥으로 분출한다. 이때 결과적으로 분출되는 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며, 미나토가 진정 하고 싶은 말 혹은 부르고 싶은 이름은 아니었다.

    명명하지 못하겠는 감정, 엄마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사건의 전말, 무고한 호리 선생에게 누명을 씌운 죄책감. 열두 살이 감당하기엔 버거운 종합적인 비극을 삼키지 못한 채 미나토는 넘치기 직전인 마음과 같은 보리차를 기울이며 누구에게도 들리지 못할 사과를 되뇐다. 이때 미나토의 혼잣말은 의외인 인물인 교장에게 닿는다. 뜻밖에 도착한 음악실에서 어렴풋한 고백과 자백을 털어놓은 미나토에게 돌아온 것은 추궁이 아닌 트럼본이었다. 몇몇만이 가질 수 있는 건 행복이 아니라는 교장의 말을 듣고 나서 힘껏 불어 만든 트럼본 소리는 미나토가 발화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각각 학교의 다른 곳에 있는 사오리와 호리의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동시에 학교 전체를 공명하는 그 악기 소리는 마키코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을 명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는 정의할 수 없는 마음의 표현이고 해소될 수 없는 마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1부로 거슬러 올라와 같은 교실에서 미나토를 찾던 사오리의 장면을 복기해 보자. 미나토 두 손에 들려있던 보리차가 가득 찬 유리잔이 빈 잔으로 놓여있다. 오해의 연속으로 예상치 못한 비극이 있는가 하면, 넘칠 것 같았던 맘속 무언가를 후, 하고 불어낼 수 있었던 순간이 미나토에게도 있었다.






3. 저마다의 숲에서 나온 아이들은 울지 않는다

    감독 고레에다는 대개 진심을 후, 불어내지 못하는 아이들을 영화의 주인공으로 조명해 왔다. 침묵은 곧 고레에다에게 하나의 기호다. 침묵은 발화하지 않는 아이들로부터 이야기를 읽어내야 할 기호이자 울지 않는 아이들로부터 울음을 해독해 내야 할 암호이다.

    고레에다의 영화 속 울지 않는 아이들이 참는 것은 단지 눈물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2005)〉 속 엄마가 떠나고 남은 사 남매 중 첫째 오빠 아키라는 여동생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담담하게 동생을 캐리어에 담는 방식으로 기이한 장례를 치른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에서 코이치는 이혼한 두 부모의 재결합이라는 기적 하나를 꿈꾸며 긴 여정을 떠나지만, 막상 기적을 기도해야 하는 찰나 아키라는 가족 대신 세상의 구원을 택하며 오래 바라왔던 소원을 꾹 삼킨다.

    아키라에게도 코이치에게도 참는다는 감정은 어울리지 않고 낯설다. 아이들은 여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황과 감정을 경험할 때 혼란스러워한다. 그 정의하지 못한 무언가를 속으로 꿀꺽 삼키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함으로써 그 혼란스러움을 표출한다. 아이의 내면에 자리 잡은 건 분명 괴물이 아닌데도 괴물로 드러난다. 미나토와 요리도 저마다의 괴물을 앓는다. 사랑과 우정 사이의 헷갈림, 가정폭력이 초래한 심리적 지배는 아이들이 다룰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자 두려움이었다.



    〈괴물〉에서 아이들 마음속에 사는 괴물은 주인공 두 소년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선생님이 지우개를 뺏어가도 또다시 책상을 강박적으로 지우는 남자아이,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를 눈치채고 미나토에게 적대심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여자아이도 일견 ‘평범하지는 않은 아이’로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행동을 단순히 개선되어야 할 이상행동으로만 본다면, 들춰지지 않은 마음과 진실을 ‘괴물’로 요약하는 것만큼이나 아이들의 세상은 납작해질 것이다. 관객의 책임은, 아이의 마음에서 떨어져 나온 괴물의 편린이 어떤 진실을 숨기고 있는지 살펴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 〈괴물〉이 여러 시점을 경유해 도착지로 삼은 주제는 ‘결국 아무도 모른다’이기보다는 사람들의 시야엔 불가피한 사각지대가 있고 그곳에 놓인 진실은 쉽게 마주할 수 없기에, ‘모두에게는 각자의 진실이 있다’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저마다의 진실은 각자의 숲으로 존재한다. 그 숲 안에서만 헤매고 나오지 않는다면 누구도 진실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는 복잡성과 이해의 한계가 얽히는 와중에, 서로의 숲에서 나온 미나토와 요리는 상호 이해의 가능성으로서 존재한다.






4. 둘만의 아지트, 암호 그리고 우주

    미나토와 요리는 기어코 각자의 숲에서 나와 서로의 숲을 드나든다. 둘만의 하굣길, 한 짝씩 나눠 신는 신발, 원고지 위 뒤집어진 이름의 암호는 곧 둘만의 숲이었다.

둘만의 공간으로 묘사되는 열차 아지트는 그 자체로 미나토와 요리의 마음을 대변한다. 아이들의 진실과 본심을 찾아 헤아리기 어려운 만큼 아지트 역시 숲 속 깊숙이에 자리 잡고 있다. 여러 번 두드리고 살펴야 도달할 수 있는 아지트의 문은 곧 아이들 마음의 문을 은유한다.


    본래 열차는 복수의 것, ‘무리’로 있을 때에 제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두 소년의 아지트는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생명력을 다한 열차 하나이다. 집단의 범주에서 벗어나 이탈해 있다는 특징은 가족과 학교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미나토와 학교에선 괴롭힘을, 가정에선 학대를 당하는 요리의 상황을 처연하게 상징한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멈춰있던 열차는 아이들이 괴물 같은 마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열차 안에서 미나토와 요리는 서툰 솜씨로 아지트를 장식하고 과자를 나눠 먹으며 장난감을 만드는, 가장 아이다운 모습을 보인다. 이곳에서 두 소년은 크게 웃고 빠르게 달릴 줄 안다.



    3막의 후반부 태풍이 온 동네를 삼킨 날 사오리와 호리 선생은 사라진 두 소년을 찾아 나선다. 산사태에 쓰러진 열차를 찾은 두 어른은 창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때 아지트 내부에서 창문 위를 올려다보는 숏은 분명하게 우주를 연상시키고 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별이 되고 어른들의 분주한 손바닥은 은하수가 된다. 이 연출은 아지트 안의 인물이 창밖을 바라보는 시점에서만 유효하다. 이 시점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열차의 주인들, 즉 미나토와 요리뿐이다. 두 소년이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건 위협적인 산사태가 아니라 황홀한 우주, 나아가 빅 크런치였을지도 모른다.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고장 난 열차를 이끈 미나토와 요리가 도착한 곳은 결국 빅 크런치였을까.






5. 가자, 빅 크런치가 오고 있어

    세 명의 시점을 경유하기 위해 채택된 - 같은 사건으로 세 번씩이나 회귀해 서술하는 플롯의 형식은 빅 크런치 모티프의 결과로 보인다. 영화 속 요리가 설명하는 빅 크런치는 무한하게 팽창하던 우주가 확장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팽창하지 않는 우주 안에서 모든 것은 본질로의 회귀를 시작한다. 소고기덮밥은 소로 바뀌고 인간은 원숭이로 돌아가고 공룡은 되살아난다는 예시들은 죽은 고양이의 재탄생과 미나토 아빠의 환생까지 빅 크런치의 하위 항목으로 수렴하게 만든다. 일견 미나토와 요리는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욕망이 있는 것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두 소년이 빅 크런치를 ‘대비’하지 않고 ‘준비’했던 이유는 빅 크런치가 그들의 원형을 찾아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가정을 꾸리라는 엄마의 작은 바람을 소박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년, 사내다움을 요청받는 소년, 돼지 뇌를 이식받고 병을 고쳐야만 하는 소년. 미나토와 요리의 욕망과 정체성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어른들의 부름과 요청에 따라야 했던 소년들은 본인의 욕망과 정체성이 정상성에서 벗어나 변형되어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빅 크런치가 온다면 우리의 욕망이 ‘변형’ 이전으로 돌아가리라. 무너지는 산과 쓰러지는 나무를 보면서도 두 소년이 공포가 아닌 환희를 느꼈던 이유는 산사태(빅 크런치)라는 현상 자체에 본질과 진실을 되찾고 싶은 두 소년의 열망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풍 속에 각자 남겨진 어른들과(요리 부, 교장) 함께 있어도 합이 맞지 않는 두 어른의 모습(사오리, 호리 선생)은 참혹할 정도로 처연하다. 이들을 등진 두 소년은 서로를 끌어주고받아주며 태풍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빅 크런치에 도달한다.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멎은 환한 세상에 도착하자마자 두 소년은 비로소 자신들이 아닌 세계의 환생을 확인하게 된다. 새로 태어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언제나 세상의 몫이어야 한다.



    빅 크런치를 맞이해 영화의 엔딩에서 1부 초반 장면으로의 회귀를 시도해 보자. 아침 등굣길을 나서는 미나토에게 사오리는 도로의 흰 선을 넘으면 지옥이라고 이야기한다. 듣는 둥 마는 둥 한 미나토는 풍선이 매달린 나뭇가지를 향해 힘껏 뛰어보지만, 턱없이 모자랄 뿐이다. 엔딩 장면에서 더 힘차게 뛰어오른 미나토는 유난히 길게 팔을 뻗고 있는 나뭇가지에 마침내 손이 닿게 된다. 흰 선 위로 걷지 않아도 되는, 정상성과 규범을 따르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가장 크게 들려오는 소년들의 웃음과 외침은 이렇게 해석되는 것만 같다. '우리가 가장 우리답게 달려 나갈 수 있는 곳은 여기야!'


    그 흰 선을 지우는 몫은 언제나 세상의 몫이어야 한다. 영화는 아주 미약하고 아주 느리더라도 흰 선이 지워지는 세상만이 오로지 아이들을 열린 곳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엄마는 이해되지 않는 학교를 괴물로 여기고 학교는 학부모를 몬스터라고 부르며 소년은 자기 안에 싹튼 알 수 없는 감정을 괴물로 본다. 영화는 끊임없이 묻고 있다. “괴물은 누구인가?”


    영화에서 괴물이라는 것이 직접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건 단 한 장면뿐이다. 미나토와 요리가 하는 괴물 놀이의 여러 카드 속 ‘괴물’은 검은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괴물은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있는 심장의 형상을 한, 마음이다. 나에겐 없는 남의 괴물을 기꺼이 들여다볼 것인지, 남이 없다고 해도 분명히 존재하는 나만의 괴물을 기어코 돌파해 나갈 것인지 - 영화는 이 물음을 두 가지 대사로 변주해 질문한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말 “괴물은 누구인가?”는 곧 교장실에 있는 사오리의 대사와 오버레이 되어 나지막이 울려 퍼진다.


“당신은 인간의 마음이란 걸 가지고 있나요?”







editor: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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