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작은 마을 하나가 있습니다. 외부 자본이 투자되지 않고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산골 마을 하라사와입니다. 한 기획사가 정부지원금을 받기 위해 글램핑장 설립을 준비합니다. 회사의 계획서 안에 하라사와의 자연을 보전하려는 의지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기획사 직원들과 마을 사람들의 대립으로 흘러갈 것 같던 영화는 두 직원이 도쿄에서 하라사와로 이동하는 차 안의 장면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듭니다. 특히 결말부의 전개는 정적인 영화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던 관객들에게 창황한 충격을 안겨줍니다. 결말을 납득하고 싶은 관객은 영화의 엔딩인 하류로부터 시작점인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혼란한 마음을 안고 돌아가는 길, 여러분은 영화가 쏘아 올린 총소리를 들으셨나요?
1. 인류세의 지구: 작은 마을로 보는 행성의 미래
이미지 출처: ebs 다큐프라임 인류세 1부 – 닭들의 행성
인류세(Anthropocene)란 2002년 대기 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처음 제안한 이후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지구 환경의 미래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질시대 개념입니다. 인류세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이전의 지질연대와는 구분되는 개념이며, 인류세에 일어나는 대표적 변화로는 이산화탄소의 급격한 농도 증가, 해양 산성화, 오존층 파괴, 생물종 다양성의 파괴 등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변화의 주요 원인이 ‘인류의 활동’이라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뒤 인류가 기술로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행한 활동들은 빙하기 이후부터 홀로세까지 무려 1만 1천 년간 지속되던 지구의 안정 상태를 빠른 속도로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학계에서 일어나는 패러다임 전환이 우리의 실생활까지 와닿기에 지구의 위기는 다소 막연하고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처럼 막연하게만 느껴지는 전지구적 이야기를 압축시켜 일본의 한 산골 마을로 가져옵니다.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가 살아가는 하라사와는 외지인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마을 사람들 내부의 교류로 살아가는 작은 마을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집터와 오갈 수 있는 길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개발되지 않은 채 울창함을 유지하고, 계곡물은 오염되지 않아 식수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합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라던 타쿠미의 말대로 하라사와는 글램핑 사업이 진행되기 전까진 자연과 인간의 균형이 잘 유지된 일종의 성역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글램핑 사업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전에도 이 마을의 균형에 균열이 나고 있다는 징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옆 마을로부터 들려오는 총소리입니다. 첫 총소리는 타쿠미가 우동집으로 조달해 줄 물을 옮기던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총소리의 정체를 묻는 마을 주민에게 타쿠미는 ‘옆 마을에서 사슴을 사냥하는 소리’라고 답합니다. 심각하게 다루어질 것만 같던 위협적 소음은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간 이후 관객의 기억에서 차츰 잊혀집니다. 사슴 사냥은 아직 하라사와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며, 왠지 하라사와의 사슴들만큼은 안전하게 지켜질 것만 같습니다. 두 번째 총소리는 글램핑장 설립이 현실화되려는 위기 속에서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타쿠미와 감정적 교류를 나누는 듯 보일 때 들립니다. 이후 세 사람이 하나의 실종을 깨달으면서부터 영화는 급박한 위기감 속에서 진행됩니다.
영화의 총소리에는 두 가지 공통된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 그것은 타쿠미가 ‘상류(다른 마을)에서 하류(하라사와)로 흐르는 물을 뜰 때’ 발생합니다. 둘, 타쿠미는 사슴을 사냥하는 총소리로부터 잊고 있던 딸의 존재를 떠올립니다. 이러한 총성의 조건을 결말부와 연관 짓는다면 사슴이 갑작스럽게 하나의 앞에 나타난 일과 하나가 쓰러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른다. 상류에 사는 사람들은 하류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글램핑장 설명회에서 마을 이장이 직원들에게 전한 조언입니다. 사슴 사냥이 이루어지던 이웃 마을은 하라사와의 계곡을 향해 물이 흘러오는 곳, 즉 하라사와로부터의 상류입니다. 비록 하라사와 사람들은 외부인들의 사슴 사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상류의 사냥 행위는 결말에 이르러 하류인 하라사와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웃 마을에서 총을 맞아 하라사와의 가장 하류지점까지 도망쳐 온 어미 사슴과 새끼 사슴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려는 낯선 인간, 하나와 만납니다. “어미 사슴은 새끼가 위험할 때 인간을 공격한다”던 타쿠미의 말대로 하나는 사슴의 공격을 받아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주연 인물 중 유일한 어린아이인 하나는 영화의 여러 장치를 통해 사슴과 이어진 인물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하굣길, 하나는 타쿠미에게 사슴이 먹이를 먹는 곳과 물을 마시는 곳을 소개받고, 이후 혼자 숲을 돌아다닐 때 그곳을 유의 깊은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때의 카메라는 하나의 상반신을 클로즈업하여 정면으로 비추고, 하나는 카메라 너머의 관객과 시선을 마주합니다.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는 나오지 않는 독특한 연출입니다. 이를 통해 관객은 감독이 의도한 메시지가 하나라는 인물 안에 숨겨져 있음을 짐작합니다.
앞서 언급한 상하류의 개념을 어른과 아이의 관계로 대치해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변화시킨 지구의 환경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가야 합니다. 시간을 거대한 계곡으로 상정한다면 전세대의 삶은 상류, 후세대의 삶은 하류입니다. 마치 사슴이 인간의 활동으로 서식지를 잃은 것처럼, 이웃 마을의 사냥이 하라사와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이전 세대가 내린 결정들은 후세대가 될 아이들의 삶으로 내려옵니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무력해진 하나의 모습은 총알이 몸에 박힌 새끼 사슴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평화롭게만 보이던 산골 마을의 아이가 상류의 오염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습니다. 다음 희생자는 어느 마을의 아이가 될까요. 여러분 마을의 아이들은 무사한 내일을 보낼 수 있을까요.
2. 원형이 되어가는 상하류의 개념
상하류의 개념은 언뜻 영원히 위치가 뒤바뀌지 않는 수직구조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영화는 여러 힌트를 이용해 상하류는 수직이 아닌 원형의 구조이며, 오염된 하류의 물이 다시금 상류로 들이닥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장면은 나무의 윗부분을 로우앵글로 비추며 천천히 앞으로 이동하는 트래킹숏입니다. 같은 구도로 촬영된 두 숏의 차이가 있다면 음악의 사용방식과 시간대입니다. 평화로웠던 낮 시간대의 오프닝에 비해 점점 하늘이 캄캄해지는 엔딩은 개인의 힘으로 대처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이 닥쳐올 듯한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왜 이러한 변형된 수미상관 구조가 사용된 것일까요.
오프닝에서 사용된 장엄한 음악은 하나의 얼굴이 보이며 부자연스럽게 멈춥니다. 반면 엔딩장면의 음악은 끊기는 지점 없이 계속됩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하나의 죽음 여부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끊어지지 않은 현악의 선율을 따라 숲으로 들어가는 두 부녀는 비록 밤길을 걷고 있지만, 밤 뒤엔 낮이 올 것이고 하나의 회복 여부에 따라 엔딩장면은 오프닝 장면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하라사와와 주변 환경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프닝 장면 역시 언제든 엔딩장면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두 부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거대한 원형구조이며, 하나의 회복을 결정짓는 일은 이제 개인의 노력으로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의 시선을 통해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공간이자 하라사와의 사슴들이 물을 마시는 장소인 호수의 이미지 역시 원형입니다. 이때 호수의 수면에 비친 나무들은 반대 방향으로 서 있습니다. 인간에게 익숙한 나무의 모습처럼 땅에서부터 자라나는 형태가 아닌 마치 위에서 아래로 뻗어나가는 것 같은 이미지입니다. 인류세 개념의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만이 지구 환경에 일방향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수직관계로 인식하여 벌인 인류의 행동들은 현재 행성 자체의 종말 시기를 빠른 속도로 앞당기고 있으며, 그 결과는 인간의 삶으로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영화는 흔히 어린 시절 배운 먹이사슬 구조의 최하위층인 식물이 상위에 위치한 이미지를 사용하면서 상하류의 위치는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구조이며, 무너진 지구의 균형에서 타격을 입는 것은 인류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3. 이분법적 진영에서 벗어난 존재
영화의 주인공이자 관객에게 가장 오랫동안 얼굴을 비추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타쿠미는 좀처럼 그 속을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그의 표정은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적이며, 꼭 필요한 상황이 아니면 말을 꺼내지 않을 정도로 과묵합니다. 하라사와로 이동하는 긴 이동장면을 통해 자세한 서사가 설명되었던 두 기획사 직원들과 달리 그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은 아내의 사진을 통해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 짐작만 될 뿐 관객이 그에게 정을 붙일 수 있는 서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영화 내의 인물들과도, 심지어는 관객들과도 일종의 거리두기를 하며 살아가는 타쿠미는 오직 하나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연의 정보들을 안내해 줄 때에만 부드러운 표정과 많은 대사량을 소화합니다.
그의 직업은 명확하지 않으며, 마을의 심부름꾼이자 자연과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는 중간 다리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하라사와의 식수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물을 떠다 주고, 자신이 알고 있는 환경적 지식을 이용해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균형을 잃지 않으며 자연을 이용할 수 있을지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그는 완전히 인간 세계에 섞여 사는 사람도, 정령을 자처하며 자연과 일치되는 사람도 아닌 두 진영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살아가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이렇듯 어느 진영에도 치우쳐져 있지 않은 그의 속성은 처음 회사의 입장만을 대변하려 왔던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에게 새로운 영감을 줬습니다. 글램핑 사업 설명회를 귀찮은 잡무 정도로 생각하던 타카하시가 타쿠미와의 교류 이후 부조리적인 회사를 그만두고 하라사와에 이주하여 살아갈 계획을 세우는 모습은 꽤 고무적인 변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을의 균형에 설득되어 가는 것 같았던 두 직원은 결국 글램핑 사업 유치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서진 못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인류와 자연의 적절한 균형’이란 철저히 인간 중심적입니다. 타카하시는 경비원 증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거나 정부 지원금을 노린 회사의 무리한 계획을 공론화하는 대신 자신이 그 경비원 자리에 들어가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려 합니다. 마유즈미 역시 어떻게 하면 사슴이 글램핑장 안의 사람들을 위협하지 않을지에 초점을 맞출 뿐 글램핑장으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사슴들이 어디로 가야 할 지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타협해 보려던 타쿠미의 노력은 그가 유지하려던 마을의 균형을 깨뜨려버렸고, 그 결과는 딸에게 위협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결말부에서 타카하시의 목을 조르던 타쿠미의 분노는 어쩌면 총소리를 간과하던 자기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4. 사슴이 사라진 세계
사냥꾼들의 총알과 휴양객들의 모닥불을 피해 사슴들은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요. 하라사와로부터 끝없이 하류로, 하류로 내려가다 보면 사슴들이 정착할 공간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산을 하강하던 사슴들이 만날 최종적 풍경은 낙원이 아닌 인간들이 만든 도로와 도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화 속 도시의 사람들이 하라사와 주민들에 비해 상당히 수직적이고 자본 중심적으로 그려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도시와 시골 환경의 대립이 아닙니다. 인류세 논의에서 자연환경의 부정적 변화를 모든 인류에게 동일한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자본가들의 가해를 지우는 행위이며, 때문에 인류세 대신 ‘자본세’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에겐 분명 개인의 결함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타쿠미와 같은 균형을 가질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은 계급 차이와 자본가들의 압박 때문이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마을 사람들은 왜 글램핑 유치를 전면 반대하지 못하고 일정 부분 타협해야만 했을까요. 외부의 자본 없인 소규모의 지역사회가 유지될 수 없을 만큼 현재 세계의 자본은 도시 중점적이며, 도시의 자본은 하라사와의 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사슴의 멸종과 연결되는 미래 세대의 멸종은 결국 환경과 함께 노동과 계급의 문제가 함께 개선되어야만 막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악하지 않고, 자본과 계급 역시 그것 자체를 악이라 치부할 수 없습니다. 타쿠미와 하나에게 벌어진 비극은 그들이 악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들 개인의 결함으로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만큼은 절대 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균형을 깨트리는 행위와 선택, 그로 인한 하류의 오염과 뒤집히는 상하류의 관계만이 존재했습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악하지 않은 행동으로도 사슴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간 인류가 생각해 오던 균형의 기준을 뒤엎는 이 영화는 그렇게 ‘악하지 않은 이들’이 숨어있던 변명 거리들을 지워 나갑니다. 오늘 여러분의 상류에선 무엇이 흘러 내려오고 있으며, 여러분은 하류를 향해 무엇을 흘려 보내고 계시나요. 옆 마을의 총소리를 간과한다면, 균형은 무너질 것입니다.
editor: 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