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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Oct 04. 2024

갭이어라는 사치

자발적 유배 생활

2023년 10월, 강원도 속초.

자유로운 직업과 사고를 가진 반려인 덕분에 서울을 벗어나 바다가 있는 마을에서 초등 저학년인 반려아이와 함께 갭이어를 시작했다.


차 소리와 사람 소리, 도시의 소리, 마켓컬리 박스를 정리하며 분주하게 시작하는 아침, 회의 또 회의, 배달 음식, 회신해야 하는 메일들, 테이크아웃 커피, 학원차로 하교하는 딸 아이, 런드리고 세탁서비스, 사무실 창 밖으로 보이는 담벼락, 이모님이 대신 해주시는 살림, 아직 다 읽지 못한 자기계발서, SNS, 잠들기 전 어두운 방에서 보는 최애 웹툰.


강남 한복판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버티느라 염증지수 최고치를 갱신해버렸던 2023년의 나는 나 자신을 일년 동안 강원도에 유배시키기로 했다.


1년이 지난 오늘 2024년 10월, 속초.

유배지에서 보내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아주 보통의 어느 하루는 이러하다.

알람 없이 새 소리, 풀벌레 소리로 눈을 뜬다. 창 밖 날씨를 확인하고 '오늘도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기도를 한다. 2층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1층으로 내려온다. 강아지 두 마리의 물 그릇을 갈아주고 아침밥을 챙겨준다. 양배추 사과 샐러드와 토스트를 준비한다. 아이를 깨워 함께 아침을 먹으며 지난 밤 꿈 이야기를 나눈다. 7분 거리의 푸른 잔디가 있는 시골학교로 아이를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온다. 앞마당에서 설악산을 바라보며 드립커피를 마신다. 최근 푹 빠진 샹송을 틀고 간단히 모닝 청소를 한다. 이불을 털고 햇볕에 바삭하게 말린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한다. 빨래를 하고 옷장을 정리한다. 청소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 송길영의 '호명사회'를 읽는다. 텃밭에서 가지를 따다 중화풍으로 볶아 갓 지은 밥에 얹어 식사를 하며 핑계고를 본다. 사용한 식기를 바로 설거지해서 건조대에 말린다. 아이 하교까지 시간이 있어 15분 거리에 있는 온천에 들러 온천욕을 한다. 하교시간에 맞춰 학교로 데리러 간다. 선선한 가을 날씨가 아까운 마음에 속초 해변으로 산책을 간다. 편의점 앞 벤치 테이블에 아이와 나란히 앉아 삼각김밥과 라면을 먹으며 저녁노을을 감상한다. 모래사장과 방파제 길을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하늘이 너무 예뻐서, 사진으로 남긴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는 줌으로 화상영어 수업을 하고 나는 그 사이 그냥 아무일도 하지 않고 앉아서 생각한다.

무탈함, 안온함, 단순함, 여유로움. 운이 좋은 나는 이토록 소중한 일상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내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다니'

'내가 배달음식 없이 삼시세끼 밥을 해먹다니'

'내가 아무 계획함도 없이 하루를 보내다니'


닳아서 희미해지고 있던 나에게 그저 다른 환경을 주고 싶다는 단 하나의 생각으로 시작한 일년살기는 분명 작지만 확실한 기쁨들을 느끼게 해준 시간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에서 200km 떨어진 이 곳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중요한 건 장소가 아니라 '내면의 단단함'이라는 깨달음이었다. 일년 전 나는 삶의 한 가운데에서 도망쳐 나왔다. 일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이 곳에서만 나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서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가 찾는 것은 나 자신이었으니. 오히려 내가 살아가야 할 그 곳에서 나를 찾을 수 있다면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갭이어는 분명 나에게 사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단단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어떨 때 (나의 경우엔 바스라질 것 처럼 위태로울 때였다.) 장소의 전환은 확실한 도움이 된다. 나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낯선 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분이 있다면이 사치의 클라이막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라는 걸 귀뜸해주고 싶다. 속도에 매몰된 일상을 살던 사람이라면 차고 넘치는 시간이 본인을 아주 당혹스럽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유념하시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나를 만나는 일은 실로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멀리까지 와서도 관성대로 움직인다면 갭이어의 목적은 완전히 희석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를 증명하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려는 스스로를 끝까지 말려서 내 안으로 침잠하게 할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지 않으면 소멸될 것 같은 불안의 한 가운데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나를 만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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