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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진 Oct 04. 2024

톡톡 톡톡 톡톡톡 두려움

써놓고 보니 참으로 작고 하찮은

오늘 아침 강원도 이곳의 기온은 11도이다. 나는 지금 수면 양말에 후리스를 껴입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이런 차림으로 뜨거운 차를 호호 불며 마시고 있는 상황이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일년 중 가장 사랑하는 날씨가 펼쳐지는 시기가 왔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게 내 안에 '이러다 지구가 정말 어떻게 되는거 아냐?'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주 촬영 때문에 부산에 갔었다. 그 날은 분명 반바지와 반팔 차림이 당연한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그런데 5일만에 여름에서 초겨울이 된 것이다.

가장 기뻐하는 것을 맘껏 누리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 나를 땅 밑으로 끌고 내려가는 두려움, 되는대로 취하게 만들고 뭐라도 하게 만들고 누구라도 좋으니 만나게 만드는 두려움.


불을 끄고 누우면 스믈스믈 찾아오는 어지러운 것들 덕분에 숙면을 취하지 못한 탓인지 머리가 멍하다.

수많은 자기계발서가 꿈을 이루기 위해 적어야 한다고 알려준다. 이 공식은 분명 네거티브 띵에도 적용이 되는 것이리라. 지난 밤 잠자리에 누운 나를 두렵게 했던 일들이 뭐가 있었던지 톡톡 톡톡톡 여기에 적어본다.

점심에 본 해수면의 변화로 바뀔 미래의 지도 이미지, 말수가 적은 딸 아이의 반에 있다는 질투심 많은 여자애들 무리, 반포의 국평 아파트가 60억을 넘겼다는 뉴스, 그래서 이번 기회는 절대 놓치면 안된다는 월급쟁이 부자라는 인플루언서의 포스팅, 환절기에 접어들며 시작된 컨디션 난조, 5년 전 수술한 부위의 유착 때문에 자꾸만 말리는 어깨, 진짜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오래할 수 있다는 어느 유튜버의 말, 오늘 저녁 놀러와 하룻밤 묵고 가겠다는 반려인의 지인, 1시간 반 후 이뤄질 아직은 어색한 학부모와의 만남, 이사가기 전 정리해야할 물건들.


톡톡톡 톡톡톡

10pt로 쓰여진 세글자 두려움

써놓고 보니 뭐랄까 참으로 작고, 하찮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 나랑 관계가 없는 일들,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 의외로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들, 해결하기 귀찮다면 버티고 안고 가야 할 일들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글로 쓴다는 건 힘이 세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막연한 것들을 이렇게 써놓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게 다 뭐라고 그리 거대하게 느껴졌지 싶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지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 누구나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물리적인 존재인 나는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톡톡톡 적어본다.

나를 두려워하게 만든 너네들 우선 여기에 있어봐. 나는 이제 일어나서 뜨끈한 물로 샤워를 하고 어제 입었던 것 보다 더 도톰한 옷을 입고 이 기쁜 날을 누리고 올게. 또 따질게 있다면 이따 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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