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진 Oct 04. 2024

초조하다 초조해 너무 짧은 가을

가을 아침이다. 제일 좋아하는 단가라 티에 코듀로이 팬츠를 입고 헐레벌레 산책을 나선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나는 꽤 오래전부터 가을병을 앓고 있다. 불치병인 이 병은 짧디 짧은 가을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강박으로부터 발현된다. 대표 증상은 코끝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기 시작하기만 하면 미친놈처럼 싸돌아다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여름 내 까맣게 잊고 있던 다도세트를 꺼내어 멋진 척 하기, 가보지도 못한 프랑스 재질의 감성 음악 듣기, 고가의 핸드크림과 예쁜 양말 쇼핑 등 우리 엄마 말을 빌리자면 매년 질리지도 않고 하는 육갑잔치같은 증상들이 있다.


오전 내내 반려인과 서퍼비치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 거리며 파도를 타는 무리들을 구경했다. 서핑보드에 발목을 묶고 바다에 나간 사람들은 오늘은 파도가 좋다며 즐거워하는 분위기였다.


볼만한 전시 공연도 없고 백화점도 없는 이 놈의 촌구석 학기만 끝나봐라 뒤도 안돌아 보고 떠날테다!

반려인들 앞에서 성토대회를 한게 저저번주인데 이렇게나 날씨가 좋다니. 변덕이 죽 끓는 가을병 환자는 가을 날의 죽도해변에 반해서는 나 강원도 좋아했네? 시골이 싫은 게 아니고 여름이 싫었던거네. 어물쩍 말을 바꿔버린다.


돌아오는 길에 설악산에 있는 작은 음식점에 들러 등산객들과 어울려 돌솥산채비빔밥을 먹었다. 맛 없는데 맛있는 기분. ‘아 가을 바다 가을 산 너무 좋아‘ 좋은 김에 작은 서점에 들러 여행 에세이 두권을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초조하다. 가을이 너무 짧아서 초조해. 이번 주말에 날씨 좋던데 뭐하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 톡톡 톡톡 톡톡톡 두려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