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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Sep 16. 2017

밤길을 달리는 할머니

장사가 늦게까지 이어진 날. 지친 몰골로 퇴근해 밥상 앞에 앉았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켤 여력도 없어 식당에서 싸들고 온 반찬 두어 개와 남은 밥을 양푼에 넣고 비비던 참이었다.


"여보세요."

"네, 네."

"무슨 전화야?"

"너 먼저 먹어."


엄마는 허물처럼 벗어둔 바지를 다시 추려 입고 황급히 나갔다. 안 봐도 비디오다. 늦은 시각, 누군가가 밥 먹을 곳을 찾지 못해 엄마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퇴근 후에도 쉬지 못하는 엄마에게 화가 나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기왕 비빈 밥이니 안 먹을 수도 없고 수저를 들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샤워를 하고 물을 한 모금 마실 즈음에 엄마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엔 누구래?"

"응. 반바지 아저씨."

"줄 게 있었어?"

"된장찌개에 대충 줬어. 뭐라도 달라고 하는데 뭐가 있어야지."

"그래도 어찌어찌 한 끼 하고 가셨나 보네. 밥 먹어."

"응."


물을 마저 마시고 밥상 앞에 다시 앉았다. 밥도 조금씩만 먹는 할머니가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는지, 손님에게 전화가 오면 아직도 뛰어 나간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부터 엄마는 밥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다. 누가, 어딘가에서 불쑥 찾아오면, 앉을자리 안내도 해주지 않은 채 밥부터 먹으라며 부엌으로 사라지곤 했다.


"나 처녀 때 포항에서 잠깐 살았잖아."

"어."

"그때 우리 오빠가 그 동네에 밥 먹을 데가 마땅치 않다고, 월급 줄 테니 회사 그만두고 내려오라고 한 거잖아."

"그래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간 거야? 그 젊은 나이에?"

"어. 밥보다 중요한 게 어딨니?"


아프다고 끼니를 거르면, 머리맡에 예쁘게 깎은 복숭아라도 놓아주시던 외할머니를 닮았나, 엄마는 끼니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엄마의 오빠, 그러니까 나의 외삼촌은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기술자였다. 특수용접인가 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국의 건설 현장을 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밥 먹을 데가 마땅찮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동생에게 "너는 나에게 밥을 다오, 나는 너에게 돈을 줄 터이니"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그때 외삼촌 옆에서 기술을 배우던 사람이 지금의 우리 아빠다. 손예진처럼 생긴 젊은 처자가 조신하게 밥상을 차려내는 모습에 안 반하면 이상하지. 당시 망아지같이 살던 아빠는 엄마에게 반해 삼 년을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외가 식구들은 이미 우리 아빠 편이었다던데. 건설 현장에서 밥을 짓던 엄마가 스님이 되겠다고 절에 들어가 일 년간 절밥만 짓다 머리 깎기 직전에 외할머니의 곧 죽겠다는 전화에 산을 내려와 결혼을 한 걸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밥이랑 인연이 많다."

"응?"

"오빠들 따라다니면서 밥 지어주고, 절밥도 짓고, 시집살이할 때는 시부모님 손님들이랑 친척들 밥 짓고..."

"그러게. 너희 아빠 따라다니면서 옆방 현장 소장들 밥해주고 빨래해주는 알바도 했어."

"맞아. 그때 아저씨들이 나 놀러 오면 인형도 사주고, 옷도 사주고 그랬는데."

"엄청 귀여워했지. 지금은 잘 지내나 몰라."


그렇다. 엄마가 밥 좀 달라는 손님의 전화에 달려 나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현장 밥을 지겹도록 먹던 오빠와 남편, 그의 동료들이 눈에 밟혀 배 고프다는 아저씨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친구가 그러는데, 밥을 지어서 대접하면 그만큼 자신의 업보가 덜어지는 거래."

"그런 말을 하는 친구가 있어?"

"어. 군대에서 취사병 했던 친구야."

"뭐???"


아마도 이제 엄마에게는 업보랄 게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엄마가 열심히 밥을 지어 대접하는 까닭은 자신의 남편이, 자식이, 친구가 어디 가서 따뜻한 밥 한 끼도 못 얻어먹진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그 마음을 알기에 지친 몸을 이끌고 밥을 차려주러 달려 나가는 엄마에게 뭐라고 할 수가 없다. (뭐라고 해도,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잔소리만 한다고 핀잔이나 듣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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