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꽤 괜찮은 사람이 되는 중이었다.
서른 중후반이 넘어서 의도치 않게 괜찮은 습관이 생겼다. 사람을 만나서 말을 하거나 글을 작성할 때, 핵심적인 내용이나 단어를 언급하기 전에 그것에 관한 정의를 먼저 하려고 노력을 한다(물론 잘 안 된다, 이제 조금 의식을 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손흥민 축구 잘하냐?"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예전엔 당연히 월요일 맨시티 경기에서 어쩌고 저쩌고 해서 토트넘이 이겼고, 신나게 말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월요일 경기를 말하는 건지, 토트넘 소속으로 뛰고 있는 전체 시즌인가, 아님 국가대표 손흥민인가… 어디에서건 당일 컨디션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 그는 축구 엄청 잘합니다. 이러한 추상적인 말을 할 게 아니라면, 명확한 답변을 해야 한다면 수치화된 근거, 경기 영상 준비를 위해서 질문에 대한 적확한 정의가 필요하겠다.
잠시, '내가 왜 이렇게까지?' 생각을 해보니 두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먼저 알쓸 시리즈 애청으로 인한 나도 모르게 천천히 생긴(사람은 쉽게 변하진 않는다) 완성되지 않은 습관인 것 같다.
2022년 12월부터 방송한 알쓸인잡, 인문학과 인간이 주제여서 인지 몰라도 시리즈 중에 단언컨대 나에겐 몰입감이 최고였다(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인문인간).
방송 출연진이 작가와 과학자(물리, 천문, 법의학)로 나누어지고 이로 인하여 문, 이과 사고방식의 차이를 보는 재미가 굉장했다. (사람을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지만 성향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과학자는 의심할 수도 없는 어쩌면 당연한 것도(주로 추상적이거나 아니면 사람마다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 일단 질문을 정의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한다. (위에 언급한 축구선수 손흥민, 나의 옆집에 살고 있는 축구를 하는 고등학생 손흥민일 수도 있다.)
인문인간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질문에 정의를 먼저 한다? 이런 이과적인 프로세스는 어떻게 가능한 거야. (이와 관련된 내용을, 사랑을 주제로 출연자들이 하는 논의가 흥미로웠다. 직접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물론 명확한 답변을 위해 질문 또는 단어에 관한 정의는 필수적일 수밖에 없지만, 나의 경우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생략을 많이 해 왔다.
또한 임의로 주어와 동사의 위치도 변경하곤 했다. 재미를 위해서 도치를 했던 게 좋지 않은 버릇이 되었다. (무분별하게 생략하고 쓸데없이 자리바꿈을 하는 대화라니, 반성합니다.)
아마도 정의하는 습관이 생긴 건 두 번째 이유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22년까지 했던 일이 공학 SW 개발이다 보니(대단한 개발자는 아님), 문과적인 아니면 간단한 상대의 언행만으로도 유추를 잘하는(내가 알면 그도 알 거라는 착각) 능력, 성향과는 다르게 직업적인 습관이 생긴 것 같다. 무섭네 무서워~
그 덕에 조금 더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잘 이해가 안 되면 질문하는 좋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역시 사람은 배움이나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비유를 하자면 (잘 생긴) 게임 캐릭터가 레벨업 하는 거와 같은, 타이틀은 ‘꽤 괜찮은 사회 구성원이 되기‘.
함께 일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준 에릭 브로(게임으로 생각하면, 탑승하면 레벨업 가능한 버스의 운전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는 건강해진다고 해서 다시 함께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다른 일을 할 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금 더 세상을 경험하길 원하고 가능하면 99(세) 만렙을 찍고 싶은 털형은 치료법이 적절한 타이밍에 나오길~ 혹시 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