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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11. 한국인 모임

by 줄리아

코로나로 인하여 조촐한 입학식이 진행되었고, 학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공부하는 과정은 법학석사과정, LLM(Master of law) 프로그램이었다. 학비가 비싸기로 유명한 대학교답게 학비가 어마 무시하게 비쌌다.

LLM 프로그램은 대부분 외국인 변호사들, 변리사들, 또는 법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로펌 등에서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해 줘서 온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나는 법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석사과정을 같은 학교에서 듣고 있는 남편과 항상 붙어서 학교에 와서 밥을 먹고, 수업이 끝나면 남편과 만나서 집으로 갔다. 학교 생활을 늘 남편과 함께하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컴퓨터로 판례를 찾고, 관련 법률을 찾는 수업(한국 로스쿨에도 이와 같은 수업이 존재한다)을 듣는데, 옆자리에 앉은 동양인 남성분이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시죠?”

아마 내 외모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한국인의 냄새를 맡은 것 같다. 그분은 변리사로, 이미 LL.M. 프로그램을 듣는 많은 한국인과 이미 친해진 것 같았다. 한국인 모임 카톡 방에서도 모임이 추진되고 있었고, 그분도 그 모임에 참석한다고 했다. 나는 그전까지는 한국인 모임에 관심이 없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한국에 돌아갈 것인데 굳이 미국까지 와서 한국인들과 또 친해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한국인들끼리 나만 빼고 다들 친해진 것 같아서, 어떠한 모임에서 제외되거나 소외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나는 바로 그 모임에 출석했다.


한국인 모임은 LA 한인타운의 곱창집, 횟집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인타운 자체도 한국인들이 서빙하고, 음식도 한국보다 더 맛있었기 때문에 이게 한국인지, 미국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국인 약 20명 정도가 LL.M. 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고, 그중에 열정적으로 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이 약 10명 정도가 있었다.


나와 다른 여자 변호사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회사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줘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 다른 여자변호사님도 현재 미국에서도 한국에서 보내오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셔서, 돈을 한 푼도 안 벌면서 완전히 내 돈으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도 나한테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위축이 들기 시작했다. 다들 소속된 회사가 있는데 나는 백수였다. 결혼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 이야기로 서로 친해지는 반면,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은 솔로들의 데이트 이야기와 LA의 핫플레이스를 공유하며 서로 친해졌다. 나는 뭐 아이도 없고, 그렇다고 솔로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과 공통된 주제가 없어서 굉장히 어색했다.


특히 로펌의 지원을 받고 이런 프로그램을 수료하는 변호사님들은 자신의 클라이언트 회사를 확보하는 것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상황이었다. 회사에서 지원을 받고 LLM 프로그램을 수료하는 한국인 분들도 최대한 경쟁력 있고, 능력 있는 변호사들, 변리사들을 알아가야 나중에 업무에 활용할 수 있었다. 서로 니즈가 맞아떨어지는 모임이었다. 백수였던 나를 제외하면 모두들 업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서로 인맥을 쌓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는 이런 모임이 참 불편했다. 소속된 직장이 없는 나로서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비구성도 나를 포함하여 여자가 셋이고 나머지는 모두 남자들인데, 기혼자인 나는 남성들이 가득한 그 모임이 편할 리가 없었다.

초반에는 이 모임에 정말 나가기 싫었지만, 오히려 나의 남편이 이런 모임에 꼭 나가야 한다며 적극 권장하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도 앉아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가끔씩 말도 했다. 모임이 시작되고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각자의 회사 이야기, 자녀들의 이야기에서 미국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변경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이 아닌 낯선 땅에서 이 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외국에서는 같은 나라의 사람이라는 존재만으로도 참 위안이 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고등학교 시절 1년간 미국에 있을 때에는 이런 감정을 느껴보지 못하였다. 내가 1년간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나를 포함해서 총 4명의 한국인이 있었는데, 2명은 한국인이지만 미국인에게 입양된 아이들로 한국말을 하나도 못하는 그야말로 미국인이고, 나머지 1명은 목사님 따님으로 영어를 정말 못하셨다. 유일하게 있는 한국인 언니가 영어를 정말 못하면서 왜 나랑 대화할 때만 자기가 단어만 띄엄띄엄 영어로 말하길래, 이건 뭐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도 아니고.. 답답하고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아서 점차 교류를 줄였었다(사실, 나는 내가 친하던 다른 미국인 애들 무리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그 분과 많이 소통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엄마 아빠가 나를 미국에서 지켜주거나 다 케어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입장으로서 미국에 있다 보니 항상 승모근을 올리고 긴장을 잔뜩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한국인 모임에 나가면 그래도 다들 같은 분야에서 일하던 한국인들이라서 정말 마음이 이상하게 편해져서 나도 모르게 한국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긴장이 조금씩은 풀려서 마음이 편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업무적으로 이 모임에서 만난 분들이 필요해져서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 모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한국에 있는 것 같아서 행복했지만, 이제 한국에서 이 사람들을 보니 내가 마치 LA에 있는 것 같아서 LA의 기억에 의하여 다시 행복해진다(그분들도 내 얼굴을 보면 자기들이 LA에서 살았던 집이나 차들이 생각난다고.. 모두들 만나면 미국이야기 밖에 안 한다). 미국에 있을 당시에는 이렇게까지 이 인연이 소중할 줄 몰랐다. 지나고 보니, 더 열심히 모임에 참석하고 다른 분들을 열심히 알아둘걸..이라는 후회가 살짝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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